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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문화일반

권력욕에 사로잡힌 황정민의 ‘리차드3세’, 한국 정치인과 겹치다

등록 :2022-01-13 18:21수정 :2022-01-14 02:31

황정민과 함께 4년 만에 돌아온 연극
2월13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서
연극 <리차드3세> 공연 사진. 샘컴퍼니 제공
연극 <리차드3세> 공연 사진. 샘컴퍼니 제공

“연극을 처음 할 때부터 선배들이 올리는 많은 고전 작품을 보며 동경해왔습니다. 그게 고전의 힘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고전들이 사라졌습니다. 클래식한 고전의 위대함이 없어진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리차드3세>를 하게 된 이유입니다.”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씨제이(CJ) 토월극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리차드3세>의 주인공으로 오르는 배우 황정민은 이렇게 얘기했다. 2018년 초연이 객석 점유율 98%를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막을 내린 뒤 4년 만에 돌아왔다. 초연 당시 황정민의 10년 만의 연극 복귀작으로 화제가 됐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원작인 이 연극은 영국 요크 왕가의 마지막 왕인 실존 인물 리처드 3세(1452~1485)가 주인공이다. 그는 어린 조카 에드워드 5세를 몰아낸 뒤 왕위에 올랐지만 2년 만에 반란군에게 죽임을 당하는 인물이다. 셰익스피어 희곡은 역사의 소용돌이와 부침에서 욕망이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연극 &lt;리차드3세&gt; 공연 사진. 샘컴퍼니 제공
연극 <리차드3세> 공연 사진. 샘컴퍼니 제공

전날 본 연극에서 피의 군주 리처드 3세를 맡은 황정민은 광기 어린 열연을 펼쳤다. 100분 내내 허리 한번 펴지 않고, 뒤틀어진 자세로 다리를 절고, 손목과 손가락마저 구부리는 등 셰익스피어가 묘사한 리처드 3세를 그대로 연기했다.

“불만의 겨울은 가고 태양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여름이 왔구나.” 극 초반 이렇게 말하며 등장한 황정민은 공연 내내 무대를 장악했다. 그는 뒤틀린 육체 때문에 누구에게도 사랑받아본 적 없는 고독한 악인을 표출했다.

때론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때론 능청스러운 모습으로 무대를 쥐락펴락했다. 울분과 광기를 담은 그의 표정과 대사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냉소적인 어조와 특유의 리듬감을 살려 악인의 음흉한 뉘앙스를 그대로 묘사했다. 황정민의 안정감 있는 발음 역시 빛을 발했다.

연극 &lt;리차드3세&gt; 공연 사진. 샘컴퍼니 제공
연극 <리차드3세> 공연 사진. 샘컴퍼니 제공

“나는 왕관을 꿈꾼다. 나 그것을 가지리. 그리하여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영광의 옷을 입으리.” “나는 진군해야만 한다. 나는 진군한다. 악인은 절대 잠들지 않는다.” 그의 대사는 권력과 욕망을 향한 날것의 인간을 보여준다.

리처드 3세는 뛰어난 언변과 권모술수로 경쟁 구도의 친족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간다. 자신의 집권에 방해되는 가신들도 하나씩 없애버린다. 욕망을 위해서, 권력을 위해서, 왕이 되기 위해서다.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은 비극적으로 그려지지만, 극 중간마다 나오는 능청스러운 대사는 관객의 웃음을 이끌었다.

권력이 가까워질수록 그는 더욱 잔혹해진다. “악을 택하고 선을 그리워하는 것이 낫다”고 말하며 자기 행동을 정당화한다. 결국 그토록 원했던 최고 권좌에 오른다.

그는 “모두 그렇게 무섭게 보지 마세요”라는 말을 관객에게 툭 던진다. 관객은 ‘욕망이 없는 사람은 손 들어봐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악인의 최후답게 그는 뉘우치는 대신 “내 죄를 묻는 그대들의 죄를 묻겠다”고 말한다. 이 말 역시 객석에 의미 있는 물음으로 돌아온다.

연극 &lt;리차드3세&gt; 포스터. 샘컴퍼니 제공
연극 <리차드3세> 포스터. 샘컴퍼니 제공

연극은 리처드 3세를 뒤틀리게 한 게 무엇인지를 살짝 보여준다. “세상은 약하고 가난한 자에게 원하는 것을 제때 준 적이 없다”는 그의 말에선 상처받고 소외된 자의 울분이 묻어난다. 권력을 탐하는 것 외에는 기댈 곳 하나 없는 나약한 인간에 대한 연민도 느끼게 한다.

극 초반에 “태양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여름이 왔다”고 했던 리처드 3세는 “잡히지 않는 무엇을 찾아 헤매었으나 축제는 사라지고 불만의 겨울은 다시 왔다”며 사라진다.

황정민의, 황정민에 의한 <리차드3세>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의 무대 장악력이 도드라진다. 다만 그에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주변 인물의 욕망과 갈등 구조가 약한 건 아쉽다. 연극은 리처드 3세가 점점 악인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권력욕에 사로잡힌 인물로 묘사한다. 입체적이기보다 평면적인 인물이어서 극적 긴장은 다소 떨어진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나온 이 연극은 권력을 차지하려는 한국 정치인들을 떠올리게 한다. 리처드 3세는 대선에서 이기기 위해 칼보다 독한 말로 상대를 공격하는 정치인, 상대방을 제거하기 위해 흑색선전·네거티브·권모술수를 동원하는 정치인과 겹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다. 대선 승자는 패자를 리처드 3세처럼 악인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가들은 리처드 3세가 셰익스피어 희곡에 묘사된 것처럼 악인은 아니라고 하니 말이다. 공연은 2월13일까지 예술의전당 씨제이 토월극장에서 열린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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