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두드린 딸이 책을 내밀었다. <90년생이 온다>. 그 애 방 책상에 놓여 있던 걸 봤었고 골똘히 읽는 모습도 봤다. 나랑 내 친구들 얘기니, 한번 읽어보라 했다. <82년생 김지영>, ‘응답하라 97, 94, 88’ 이후 이젠 너희들 차례가 왔구나, 했더니 실은 엄마또래보다 30대 말, 40대 초중반의 회사선배와 상사들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현재 90년대 생 두 딸은 목하 고통스런 청춘의 복판을 지나고 있다. 윗사람들에게서 받는 험한 말들에 베이고 부정적인 눈빛과 이해불가한 행동에 치여 햇볕에 내던져져 마른 흙 범벅이 된 채 바스락 말라가는 연체동물 같다고나 할까. 그런 와중이니 개인의 특성과 상황이 천양지차 다른데도 일반적으로 뭉뚱그려 표현한 자기들 90년생들의 삶의 문양을 다룬 글에서 모종의 이해와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어느 날 읽고 있는 책에는 <일단 오늘은 나에게 잘합시다>란 제목이 달려있었다. 산 이유인즉슨 제목에 끌려서라고 했다. 각자 회사에서 가장 어린 직원인데 긍정적인 피드백이나 잘해주는 사람이 드물다보니 스스로라도 응원해주고 싶었다는데 참 ‘오죽하면 여북할까’ 싶었다.

‘병아리 신입사원입니다’라는 노란 명찰을 달고 일을 시작해 몇 년이 지난 큰 딸은 종종 눈이 퉁퉁 붓도록 울면서 퇴근했다. 고객이 내뱉은 무례한 말과 삿대질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떨기도 했고 우연히 상사들이 하는 험담을 듣고는 며칠을 가슴아파했다. 마침내 정규직이 된 둘째도 각종 병증을 앓으며 코피를 쏟고 베개를 적셨는데 갈등과 슬픔은 거의 다 회사의 인간관계에서 생긴 것들이었다. 바늘귀만큼 좁고 가느다란 취업의 문을 뚫고 들어가 가족과 친구 외에 새로 관계 맺은 사람들 앞에 제 이름으로 또렷이 서서 일하고자 애쓰는 딸들이 지친 목소리로 묻곤 했다. 엄마도 회사 다닐 때 그랬어? 후배들한테 막말하고 면박주고 맘대로 판단하고 그랬어? 일 말고 개인적인 이슈로 괴롭혔어? 아니! 라고 말하진 못했다. 후배들이 내 나쁜 말을 삭이려고 몇 시간씩 울며 걷고 밤잠에 악몽을 꾸고 내가 한 행동 때문에 상담실을 찾아다녔을 줄은 그 때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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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선호에 찌든 마지막 구세대 인물들에게서 팔자 세고 성격이 드셀 거라며 태아감별로 죽어간 여아들 중에서 기적적으로 태어난 90년대 생 딸들은 개미처럼 성실하게 말처럼 오래 뛰며 자라났다. ‘알파 걸’이란 소리를 들었고 직업을 갖지 않는다는 생각은 꿈결에도 해보지 않았다. 새벽까지 도서실에 앉아 엉덩이가 네모가 되기도 했고 할 수 있는 모든 인턴활동과 취업스터디를 거듭했다. 스펙을 쌓느라 벽돌 같은 수험서를 사들였고 수백 장의 자기소개서를 고쳐 쓰고 정장 구두를 싸안고 가 수십 번을 면접위원 앞에 정자세로 앉았다. 386이다가 586이 된 부모가 한 달에 한두 번씩 장례식장에 문상 가고 요양병원에서 늙고 병든 부모를 붙들고 중환자실을 오갈 때 사회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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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은 요즘 변호사 채용 인턴십 프로그램 <신입사원 탄생기-굿피플>을 본다. 제 또래 남녀 인턴의 면접 태도, 옷차림과 표정, 일할 때 행동과 동료들의 관계를 뚫어지게 본다. 인턴이 실수를 하거나 능력발휘를 못 할 때는 같이 운다. 동병상련과 공감의 맞장구, 응원을 거듭하면서 멘토로 나오는 선배 변호사들의 태도와 평가도 눈여겨본다. 우리도 언젠가는 선배가 되겠지, 상사가 되겠지, 좋은 어른이 될 거야, 다짐도 한다. 90년대 생들의 상사는 이제 우리보다 젊다. 사회의 허리, 회사의 중견선배가 십몇 년 전 엑스(X)-세대로 불리던 사람들이다. 간단한 걸 좋아하고 ‘병맛’을 즐기고 재미있는 것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솔직함을 몸에 두른 밀레니얼 신인류를 키워 보내니 부디 환영과 환대는 아닐지라도 적대와 박대는 아니기를. 공정과 다정하기를. 칭찬은 아니어도 괴롭힘은 아니기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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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전 페미니스트저널 <이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