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러시아 1891~1991
올랜도 파이지스 지음, 조준래 옮김/어크로스·1만8000원
1918년 8월30일 모스크바에 있는 한 공장을 찾았던 레닌은 사회주의혁명당 소속 여성 혁명가 파니 카플란이 쏜 두 방의 총을 맞고 큰 부상을 입는다. 후유증에 시달리던 레닌은 1922년 5월25일 큰 발작을 일으킨 뒤 전원주택에서 요양하면서 트로츠키와 스탈린을 두고 계승자 문제를 고민한다.
트로츠키는 탁월한 전략가이자 행정가이지만, 과거 멘셰비키에 몸담았던 전력, 자존심과 오만함 때문에 당내에서 인기가 없었다. “집단적인 통치체제 속의 대령으로 만족하기보다 자신의 독자적인 군대를 거느리는 장군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변변찮은 집안 출신의 스탈린은 소박하고 근면한 평당원들에게 신임을 얻고 있었으나, 레닌은 그가 “너무 무례”하고 “폭력배의 습관이 있다”고 생각했다. 레닌은 결국 트로츠키를 선택했다. 그는 12월23일~1월4일에 열리는 12차 전당대회에 전달할 쪽지(사실상 레닌의 유언장)에서 “나는 동지들이 스탈린을 그 지위에서 몰아내고 그보다 넓은 아량과 높은 충성심, 예의와 동료에 대한 배려심을 가지고 있으며 변덕스러움이 덜한 다른 인물로 교체하는 방안을 생각해보라고 제안하는 바이다”라고 썼다. 하지만 레닌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스탈린은 또 다른 경쟁자들인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의 전략적 지원을 받아 트로츠키를 당에서 축출했다. 그리고 레닌의 혁명 업적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그는 레닌이 죽자 추도식 연설에서 “레닌이 시작한 혁명을 완성하겠다”고 맹세하며, 자신이 “레닌의 유일한 계승자임”을 주장했다. 또 정적들을 ‘반레닌주의자’로 매도해 ‘피의 대숙청’을 벌여 권력을 확고하게 다졌다. 대숙청이 절정이었던 1937년 8월~1938년 11월 사이에 매일 평균 1500명가량이 총살당했다. ‘레닌주의적 명령’은 절대주의적 원리가 되었고, 스탈린 이후 권력을 잡은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고르바초프도 ‘레닌주의자’를 자처했다. 러시아 현대사의 권위자인 올랜도 파이지스 런던대 버벡 칼리지 교수는 “만일 75년 동안 볼셰비키 독재정치의 기본토대가 된 불변의 원칙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당의 통일성’이었다”고 주장한다.
파이지스의 <혁명의 러시아 1891~1991>는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올해 100돌을 맞은 ‘볼셰비키 10월 혁명’의 변천사와, 레닌로부터 고르바초프의 개혁 이후 소련의 몰락 과정을 보여준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혁명의 기원을 1891년 제정 러시아 시대의 여름 대기근까지 거슬러 올라간 뒤 1905년 피의 일요일, 1917년 2월 1차 혁명과 10월 2차 혁명에 이어 1991년 옐친 시대 소련의 해체에 이은 독립국가연합(CIS)의 탄생까지 100년을 러시아 혁명의 시작과 끝으로 잡았다.
지은이는 러시아 혁명의 부침을 세 세대로 나누어 설명한다. 1870년대~1880년대에 태어나 10월 혁명을 주도한 ‘구 볼셰비키’, 소련식 가치를 교육받아 ‘위로부터의 혁명’을 추진한 ‘스탈린 시대의 신 엘리트’, 그리고 스탈린의 범죄행위를 비난한 흐루쇼프의 해빙기에 정체성을 확립한 ‘60년대인’이다. 왜 혁명은 실패했는가? 혁명이 남긴 것은 무엇인가? 지은이는 “러시아인들이 공산주의 체제의 사회적 트라우마와 질환으로부터 치료받는 데에는 수십 년이 걸릴 것이다. 정치적으로 혁명은 죽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혁명은 100년 동안의 그 폭력적인 사이클 속에 휩쓸린 사람들의 정신 속에서 사후의 삶을 계속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정상영 선임기자 ch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