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7월16일, 3·1운동 민족대표 등 48인에 대한 경성지방법원의 5차 공판이 시작되자마자 허헌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검사의 기소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애초 조선고등법원(지금의 대법원)이 사건을 경성지법으로 보낼 때 결정서 주문에 ‘송치’ 표현 없이 ‘관할 재판소로 지정’한다는 표현만 썼으니, 법리적으로 사건은 넘어온 게 아니라는 얘기였다. 법대로 하자는 말에 법정은 아연 긴장했다. 검사가 결정서 이유에 송치한다는 뜻이 있다고 했지만, 결정적 기속력을 갖는 것은 주문뿐이라는 반박에 입을 닫았다. 법원은 공소불수리, 곧 공소기각을 선고했다. 항소심에서 억지로 뒤집혔지만, 일제 법으로 일제의 의표를 찌른 통쾌한 승리였다.
이 책은 육법전서를 무기 삼아 법정 독립운동을 펼친 항일변호사 허헌·김병로·이인의 활약을 재조명한다. 형사절차의 빈틈을 공격하고, 독립의 갈망이 온 민족에게 있음을 열렬히 변호하는가 하면, 고문수사 실체를 폭로한 법정투쟁 현장을 생생하게 복원했다. 지은이인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에게 이 책은 ‘권력의 도구로서의 법’ 대신 ‘바람직한 법률가’를 갈망했던 대학시절 꿈의 소산이다. 군사독재 시절 인권변호사들 활약을 담은 <인권변론 한 시대>, 1990년대 이후 공익변론에 주목한 <한국의 공익인권소송>과 함께 양심적 법률가들이 시대적 과제에 어떻게 부응했는가를 보여주는 3부작의 하나다.
여현호 선임기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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