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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생각

독자야, 손글씨에 반했니?

등록 :2007-02-08 20:38수정 :2007-02-08 20:58

캘리그래피로 디자인한 책들
캘리그래피로 디자인한 책들
베스트셀러 10권 중 한 권은 손글씨 제목
영화 포스터·상표·광고 카피에 쓰여
소비자 감성 사로잡던 아름다운 글씨 ‘캘리그래피’
북디자인 파고들어 책의 표정을 그린다
커버스토리 / 책표지로 번진 ‘캘리그래피’

손으로 쓴 글씨들이 활자의 세계를 넘보고 있다. 전통적으로 명조체나 돋움체(고딕체) 활자가 전담하다시피 하던 책 제목이 개성이 짙게 스며든 손글씨로 바뀌고 있다. 베스트셀러 책의 10권 중 적어도 한 권은 손글씨 제목이다. 가히 손글씨의 전성시대다.

손으로 쓴 글씨를 이 세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캘리그래피’(calligraphy)라고 한다. 그리스어에 어원을 둔 이 말은 ‘아름다운’(calli) ‘글씨’(graphy)라는 뜻을 품고 있다. 흔히 ‘달필’이나 ‘능필’로 통용되며, ‘서예’ ‘서법’을 뜻하기도 한다. 캘리그래피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을 캘리그래퍼(calligrapher)라고 한다. 필체가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드러내듯, 캘리그래퍼는 제품의 내용과 느낌을 글씨로 드러낸다.

캘리그래퍼의 숨결은 도처에서 확인된다. 일반 상표에서부터 광고 카피와 영화 포스터까지 캘리그래퍼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그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분야가 책이다. 캘리그래퍼 하면 책의 제목글씨를 쓰는 사람으로 통할 정도로 캘리그래피는 이 분야에서 주목도가 높고 영향력도 크다.

<행복한 이기주의자> <자유롭게> <사막에 숲이 있다> 같은 책들의 제목 글씨가 캘리그래피의 최근 사례들이다. 이 책들의 제목을 쓴 사람이 강병인(45)씨다. 그는 출판 분야의 캘리그래피 세계를 대표하는 손글씨 전문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가 처음부터 캘리그래퍼 세계를 알았던 것은 아니다.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한 그는 광과대행사에서 손글씨로 광고 카피나 제품 로고를 쓰다가 2002년께부터 캘리그래퍼로 독립했다. 술 이름 ‘산사춘’이 그가 쓴 글씨이며 최근에 디자인이 바뀐 ‘참이슬’도 그가 쓴 글씨다. 책 표지에서 그의 이름은 2003년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꿈엔들 출판사에서 펴낸 <뿔난 그리움>, 수선재 출판사의 <여유>와 같은 책의 제목 글씨를 그가 썼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지난해 출간된 <행복한 이기주의자>일 것이다. 주황색 바탕에 시원스럽게 써내려가 글씨는 독자들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이어 <자유롭게>와 <사막에 숲이 있다>의 제목 글씨를 썼다.

붓으로 글씨를 쓰고 있는 캘리그래퍼 강병인씨. 강병인씨는 <행복한 이기주의자> <사막에 숲이 있다> 등의 제목 글씨를 쓴 대표적 캘리그래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출판저널> 박신우 기자 제공
붓으로 글씨를 쓰고 있는 캘리그래퍼 강병인씨. 강병인씨는 <행복한 이기주의자> <사막에 숲이 있다> 등의 제목 글씨를 쓴 대표적 캘리그래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출판저널> 박신우 기자 제공
“<행복한 이기주의자>의 글씨는 여성 독자를 염두에 두고 부드럽고 감성적인 필체를 사용했다. ‘복’자의 ‘ㄱ’을 길게 늘여뺀 것은 행복의 느낌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것으로 생각해 그렇게 한 것이다. <자유롭게>는 이와 달리 남성 독자를 상정했고, 그래서 좀 강한 필체를 썼다. <사막에 숲이 있다>에서 특히 강조점을 둔 글자는 ‘숲’이다. 이 글자를 쓰면서 ‘ㅅ’으로는 숲의 이미지를 보여주려 했고, 받침자인 ‘ㅍ’에서는 웃는 사람의 모습을 담아 보려 했다. 숲 속에 웃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강병인씨의 설명대로 캘리그래피는 단순히 단어의 뜻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글씨 자체의 조형성을 최대화함으로써 책 내용을 시각화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디자인적 요소도 두드러진다.

캘리그래피는 글씨를 쓴다는 점에서는 전통적인 서예와 영역이 겹친다. 아름다움이나 균형감, 개성 같은 요소를 강조한다는 점에서도 두 세계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서예가 글쓴이의 주관과 정신을 최대한 강조하는 예술의 영역이라면, 캘리그래피는 상업적 고려가 우선한다는 점에서 서예와 다르다. 글쓴이가 주관을 너무 앞세우면 제품이 죽어버릴 수가 있다. 제품의 특성이나 이미지를 최우선으로 생각해 거기에 가장 합당한 글씨를 써내는 것이 캘리그래피다.


글자 조형성 살려 내용 시각화

출판 영역에서만 보면 캘리그래피가 대중화한 것은 2~3년 사이의 일이지만, 전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책 디자이너들이 간간히 손글씨로 책 제목을 쓰기도 했는데, 습작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 캘리그래퍼들에게 자극을 많이 준 것은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의 글씨다. 신 교수는 출옥한 뒤인 1990년 낸 서간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부터 자신이 직접 쓴 서예 글씨를 제목으로 삼았는데, <더불어 숲> <나무야 나무야>를 비롯해 최근작인 <강의>까지 모두 자신의 서예 작품을 표지에 올렸다. 서예 작품이 상품의 제목으로까지 나아간 경우인데, 강병인씨는 “신영복 교수의 서예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필묵’이라는 손글씨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는 김종건씨는 강병인씨보다 먼저 캘리그래퍼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경우다. 1999년에 이 회사를 세운 그는 영화 포스터에서 인상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 곽경택 감독의 <챔피언>, 장이모 감독의 <연인>, 봉만대 감독의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의 광고 포스터 글씨를 썼다. 책 표지 글씨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공지영씨의 소설 <봉순이 언니>다. “캘리그래피의 주요 영역이 영화포스터나 제품 제목이었는데 요즘은 책 표지를 넘어 글씨를 디자인 요소로 활용하는 생활용품으로까지 퍼지고 있다”고 사정을 밝혔다.

캘리그래피 작품의 다수는 손글씨 전문가들이 쓴 것이지만, 책 표지 디자이너들 중에서도 손글씨에 도전해 성과를 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지난해 웅진지식하우스에서 나온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도 캘리그래피로 승부한 책인데, 이 글씨를 쓴 사람이 책 표지를 디자인한 이석운씨다. 석운디자인이라는 독립 디자인회사를 운영하는 그는 손글씨를 써보면 좋겠다는 뜻을 출판사 담당 편집자에게 밝히고 자신이 직접 글씨를 썼다. 책을 편집한 웅진지식하우스의 윤동희씨는 “책을 본 사람들이 제목 글씨가 아름답고 느낌이 강하다는 평가들을 많이 해주었다”고 말했다. 이석운씨는 앞서 지난해 김영사가 펴낸 허영만씨의 만화 <사랑해>의 제목 글씨도 직접 쓴 바 있다.

출판 영역 2~3년새 유행 번져

최근에 출간된 궁리 출판사의 <불안의 심리학>은 캘리그래피의 새로운 모습을 엿보게 해주는 책이다. 어지럽게 흩어지는 듯한 글씨는 책의 제목 그대로 불안을 암시한다. ‘아름다운 글씨’라는 캘리그래피의 본디 뜻을 배반하면서 악필에 가까운 글씨로 책의 내용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글씨도 캘리그래피 전문가가 아닌 궁리 출판사의 디자이너가 썼다. 글씨를 쓴 이현정씨는 “과거에서 여러 번 글씨에 도전을 해봤는데 좋은 글씨가 나오지 않았다가 이번에 성공한 셈”이라며 “종이 위에 플러스펜으로 작게 쓴 글씨를 크게 확대하면 글씨가 불안정해 보이는데 그런 효과를 이용했다”고 말했다.

손으로 쓴 글씨 ‘캘리그래피’
손으로 쓴 글씨 ‘캘리그래피’
국내에서 캘리그래피의 대중화는 최근의 일이지만, 일본이나 중국의 경우는 한국보다 훨씬 넓은 영역에서 쓰이고 있다. 강병인씨도 “2002년 일본에 갔을 때 거의 모든 제품 상표에 손글씨가 쓰이는 것을 보고 그때 캘리그래피의 힘을 새삼스럽게 느꼈다”고 말했다. 일본과 중국은 캘리그래피에 관한 한 한국보다 몇 발 앞선 나라다. 지난 3일에는 한·중·일 캘리그래퍼들이 모여 국제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그 세미나에 참석한 김종건 실장은 “세 나라 캘리그래피의 현황을 비교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세미나였는데, 국내 디자이너·서예가 250여명이 모여 성황을 이뤘다”고 모임의 분위기를 전했다.

캘리그래피가 전문분야로서 확고히 자리를 잡아가면서 이 분야 종사자들의 모임도 만들어지고 있다.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가칭)라는 단체가 그것이다. 여태명 원광대 서예과 교수가 회장을 맡고 전문 캘리그래퍼들이 이사로 참여하는 이 모임은 오는 가을 전시회를 열면서 정식 출범할 예정이다. 캘리그래퍼의 세계가 집단을 이룰 정도로까지 지평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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