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독일 월드컵 기간 동안 베를린 시내에 조성됐던 구조물 가운데 근대 출판을 기념하기 위한 구조물. 위키미디어 코먼스
2006년 독일 월드컵 기간 동안 베를린 시내에 조성됐던 구조물 가운데 근대 출판을 기념하기 위한 구조물. 위키미디어 코먼스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매클루언(1911~1980)은 ‘구텐베르크 은하계’(1962)에서 15세기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만들어낸 일이 서구 문명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분석했습니다. 인류가 문자를 읽고 쓰게 된 시기는 6000년 정도인데, 텍스트를 대량 공급할 수 있게 한 인쇄술은 이중 500년 정도를 지배해왔습니다. 매클루언은 인쇄 문화가 가져온 근대 사회의 본질적인 변화를 ‘구텐베르크 은하계’라는 개념으로 포착해내고, 그것의 파편적·선형적·획일적인 성격을 비판적으로 바라봤습니다.

디지털 문화와 인쇄 문화가 엇갈리는 교차로에서 덴마크 학자 톰 페티트는 ‘구텐베르크 괄호’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구텐베르크 은하계’가 지배했던 지난 500년에 괄호를 치면, 그닥 상관없어 보였던 인쇄 이전의 필사본 전파 시대와 현대의 디지털 문화 사이의 연결고리가 좀더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겁니다. “이렇게 훨씬 기다란 역사적 틀로 바라보면 텍스트의 유동성과 협동적 창조, 자유로운 도용 같은 디지털 문화의 측면이 필사본 시대의 전례들과 더욱 면밀하게 닮았다는 것이 분명해진다.”(시몬 머리, ‘옥스퍼드 출판의 미래’)

‘구텐베르크 괄호’는 인쇄 문화에만 최적화된 것이라 여겼던, 텍스트를 쓰고 읽는 인간의 능력이 디지털 문화에서도 얼마든지 새로운 형태로 적응하고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문제는 이 과정이 단순한 전환이나 변환이 아닌, 적어도 이 은하계 바깥으로 나아갈 정도의 혁명이어야 한다는 데 있겠습니다. 그동안 생각을 종이라는 매체에 묶어둠으로써만 가능했던, 무언가를 이루고 나눌 수 있던 소중한 역량들은 이제 어찌하면 좋을까요.

최원형 책지성팀장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