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일순 영정.
강일순 영정.

최제우 최시형 강일순
박맹수 편저 l 창비 l 2만 3000원

‘최제우 최시형 강일순’은 창비가 최근 내놓은 ‘한국사상선’ 1차분 10종 가운데 근대 인물을 다룬 첫 번째 책이다.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동학의 사상을 이어받아 증산교를 세운 증산 강일순(1871~1909)의 글과 어록이 묶였다. 한국 근대사상 연구자 박맹수 원광대 명예교수가 편저자로서 본문에 들어갈 글을 선별하고, 세 사람의 삶과 사상을 다룬, 압축적이면서도 핵심을 담은 서문을 썼다.

세 사람의 문헌 가운데 증산의 어록은 증산교 계통에서 펴낸 종교 서적이 아닌, 일반 학술서나 교양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편저자는 증산을 ‘참 동학’의 길을 선포한 사람으로 주목한다. 증산의 집안은 유서 깊은 양반 가문이었으나 아버지가 큰 빚을 져 어린 증산은 극심한 빈궁 속에 자랐다. 경제적으로 빈곤층 출신이면서 신분상으로는 양반 가문 후손이라는 이중성이 증산의 삶을 규정했다. 여기에 더해 눈여겨볼 것이 증산이 태어나 자란 곳이 전라도 고부(정읍)라는 사실이다. 고부는 당대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돌파하려고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진원이었다. 동학과 동학혁명은 증산 사상의 모태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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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은 여섯 살에 서당에 들어가 8~9살에 시문을 지을 정도로 총명했지만, 궁핍한 집안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청소년기를 머슴살이로 보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24살의 증산은 김개남 부대를 따라 청주까지 종군했는데, 특이한 것은 종군하는 중에도 “겨울에 이르러 패멸할 것”을 예언했다는 사실이다. 뒤에 증산은 일본군에 학살당한 동학농민군의 산 같이 쌓인 주검들을 보며 몇 날을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동학의 처절한 실패를 겪은 뒤 증산은 몇 년 동안 온 나라를 주유하는데, 이 시기에 서학을 비롯한 온갖 사상을 섭렵하고, 특히 충청도에서 김일부을 찾아가 ‘정역’을 배웠다. 또 지배층의 가렴주구와 민중의 비참한 삶을 생생히 목격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증산은 1901년 모악산에서 수련하던 중 후천개벽의 진리를 얻고, 190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민중의 원한을 푸는 해원상생의 천지공사를 벌였다. 천지공사란 천지의 운수를 크게 바꾸어 새로운 세상을 여는 종교적 제의다.

증산의 사상은 시종일관 민중 중심이라는 점에서 동학을 이어받는다. 증산은 빈천하고 병들고 어리석은 밑바닥 민중을 높여야 새 세상이 온다고 설파했다. 증산 개벽 사상의 핵심은 양이 음을 억누르는 선천시대가 끝나고 음과 양이 동등해지는 정음정양의 후천시대가 열린다는 데 있다. 증산의 이런 우주론적 사상은 여성의 해원과 해방에 대한 특별한 강조로 이어졌다. 선천시대 수천년 동안 차별과 억압을 당한 여성들의 원한을 풀어냄으로써 진정한 남녀 동권 시대를 여는 것이 증산이 주재하는 천지공사의 중요한 내용 가운데 하나였다. 증산은 “사람을 쓸 때도 남녀의 구별이 없어지는” 때가 올 것이라고 단언했다. 증산은 청춘과부 고판례를 부인으로 맞은 뒤 ‘수부’(으뜸이 되는 여성)로 삼아 뒤를 잇게 함으로써 자신의 사상을 실천했다. 편저자는 증산의 죽음으로 증산교가 여러 계파로 나뉘면서 증산 사상을 올곧게 정립할 기회가 없었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증산의 삶과 사상의 정본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