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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 위키미디어 코먼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 위키미디어 코먼스

향락사회론
현대 라캉주의의 전개
마쓰모토 타쿠야 지음, 임창석·이정민 옮김 l 에디투스 l 2만5000원

마스모토 다쿠야(41, 교토대 교수)는 ‘모든 인간은 망상한다’, ‘창조와 광기의 역사’ 같은 저작으로 국내에 알려진 일본의 정신의학자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1901~1980)의 이론을 바탕으로 삼고 광범위한 정신의학 지식을 활용해 우리 시대의 사회와 인간을 분석한다. ‘향락사회론’(2018)은 ‘향락’(jouissance)에 초점을 맞춰 라캉 이론을 소개하고, 이 이론에 입각해 우울증·수치심·자폐증 같은 증상을 해석한 뒤 현대 일본 정치의 문제점을 ‘향락사회’라는 틀로 분석한다.

‘향락’과 관련된 라캉의 이론은 크게 보면 두 단계를 거쳤다고 이 책은 말한다. 첫째 단계는 1960년대까지인데, 이 시기에 라캉은 ‘향락은 없다’는 관점을 택했다. 향락이란 인간이 ‘언어로 이루어진 현실의 상징적 시스템’ 곧 상징계 속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잃어버리는 것을 가리킨다. 유아기에 어머니의 품속에서 향락을 누리던 인간은 현실 세계에 진입함으로써 향락을 박탈당한다. 향락은 상징계 안에서는 통상의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다. 향락을 얻으려면 상징계의 시스템을 유지하는 ‘법’을 위반하고 죽음을 각오해야만 한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에서 국법에 대항하는 안티고네와 같은 비극적이고 영웅적인 저항을 통해서만 향락에 가 닿을 수 있다. 이런 초기의 향락 개념을 자크 라캉의 제자 자크 알랭 밀레는 ‘불가능한 향락’이라는 말로 정식화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러 라캉의 관점은 크게 바뀌었는데, 핵심은 누구나 향락에 접근할 수 있는 사회가 됐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현되는 상징질서가 힘을 잃어버린 것이 이런 변화의 원인이다. 이 책은 라캉의 이 말기 향락 개념에 기대어 현대사회를 ‘향락사회’로 규정한다. 오늘날의 소비사회가 향락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향락사회는 향락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부추기고 강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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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 말기의 향락 개념을 임상과 정치를 해석하는 데 적용한다. 지은이가 정치 현상에서 주목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2010년대 이후 재일한국인·조선인을 대상으로 하여 폭증한 ‘헤이트 스피치’(증오 발언, 혐오 발언)이다. 왜 일본에서 헤이트 스피치가 만연하게 됐는가. 먼저 이 책은 라캉 이론을 따라, 인간이 언어를 받아들여 이 세계에 진입하는 순간 ‘향락’을 상실한다는 데서 논의를 시작한다. 향락을 잃어버린 상징계의 인간은 ‘내가 향락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타자가 향락을 빼앗아갔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게 되고, 이런 착각은 민족 차별과 배외주의를 낳게 된다. 더 나쁜 것은 오늘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그런 배외주의적 환상이 무제한으로 퍼짐으로써 보통 사람들까지 이 환상에 감염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런 환상의 유포를 통해 수입을 얻으려는 자본가들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인터넷은 환상적 향락을 생산하는 영구기관이 된다. 수많은 보통사람들이 이 영구기관에 합류해 인종주의와 배외주의를 통해 향락의 결여를 망각하고 거짓 충족감을 얻는다. 헤이트 스피치가 창궐하게 되는 것이다. 외부에서 주입한 욕망을 맹종하는 자기 상실의 자발적 실천이 헤이트 스피치인 셈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