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가 쓴 ‘피와 폐허’를 읽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폭력이었던 2차대전을 다시 곱씹습니다. 오버리는 ‘히틀러·무솔리니·일본 군부가 전쟁을 일으켰다’는 납작한 서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2차대전을 영국·프랑스 같은 기존 제국주의 열강들과 그들이 만들어놓은 질서에 반발한 독일·일본·이탈리아 등 후발 국가-제국들 사이에 벌어진 충돌로 풀이합니다.
‘생존공간’(Lebensraum)은 이 후발 제국들이 지닌 기본적인 태도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개념입니다. 단순히 말해, 민족이 생존하기 위해선 정복을 통해서라도 나라 밖의 영토와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 절실하고 불가피하다는 주장입니다. 침략자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행위가 생존을 위한 ‘자위’에 해당한다고 주장합니다. 한마디로 저 살기 위해선 침략하는 것이 어쩔 수 없다는 얘깁니다. 우리는 과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반도가 ‘대륙에서 일본 열도를 향해 뻗은 칼’이라 위험하니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한반도 침략 뒤 내걸었던 ‘대동아공영권’은 바로 일제가 아시아에서 추구했던 ‘생존공간’이었죠.
2차대전이 끝나고 ‘국가’들의 시대가 열리면서 제국의 시대는 과연 완전히 저문 것일까요? 1920년대 말 전 세계적 경제위기 속에서 제국주의 열강들이 각자도생을 꾀한 것이 후발 제국들의 제국주의적 욕망에 불을 붙였다는 오버리의 진단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자지구에서 ‘생존공간’을 앞세우는 새된 목소리는 높고, 반전과 평화를 말하는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습니다. 끔찍한 ‘피와 폐허’를 다시 겪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최원형 책지성팀장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