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발하고 싶은 여자들 
청년여성들의 자살생각에 관한 연구
이소진 지음 l 오월의봄(2023)

“선생님, 저 또 무기력한 상태가 됐어요. 운동도 끼니도 꼬박꼬박 챙기거든요. 그런데 글쓰기도 두렵고 다 자신이 없어요.”

매달 만나는 정신과 선생님은 몇 년째 반복되는 말에도 온화한 표정으로 답한다. “그럴 수 있어요. 승은씨는 불특정 다수에게 글을 써서 자신을 드러내잖아요. 잠은 푹 주무세요?” 선생님은 일단 수면의 질을 해결하자며 내성 없는 밤 약을 한 알 추가했다. 범불안장애, 수면장애, 우울증 진단을 받고 약을 먹은 지 7년. 아침에는 알약 네 알, 밤에는 세 알을 꿀꺽 삼킨다. 약을 먹으면 불안감도 나아지고, 공황 발작도 줄어들고, 안심도 된다. 그렇다고 약이 모든 걸 마법처럼 해결해 주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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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은 불확실성의 연속이어서 나는 노동과 관계 앞에서 자주 주춤거린다. 최근에는 생리 전 증후군의 영향인지, 아끼던 이와의 이별 탓인지, 난치성 피부염 재발 때문인지 몸과 마음이 가라앉았다. 불과 두 시간 전까지도 나는 소파에 누워 울고 있었다.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할 거 같아.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야. 모두 실망할 거야.” 지금 내가 월경 직전이라 호르몬 때문에 하는 말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중간중간 괴상하게 웃었지만, 진심을 숨기긴 어려웠다. 나는 사라지고 싶었다.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기후 위기로 인한 기후 우울도 한몫할 테고, 어린 시절 상처도 영향을 미쳤겠지. 아픈 엄마를 떠올릴 때 드는 죄책감도, 능력주의 사회에서 불안과 불면을 조기 학습한 영향도 있을 거다. 점점 늘어나는 각종 약들과 내 노동 환경의 영향도 있을 거다. 몇 권의 책을 출간 계약했지만, 권당 100만원의 계약금은 진작 생활비와 병원비로 쓰였다. 책 한 권을 쓰려면 최소 6개월 이상 품이 드는데, 기간에 상관없이 내게 주어지는 돈은 100만원. 그나마 강연 자리라도 없는 시기에 수입은 ‘0’이다. 어려울 땐 식구들에게 기댈 수 있지만, 그때도 쉬진 못한다. 매일 읽고 쓰고 가사 노동을 하며 몸과 마음을 종종거린다. 어쩌면 우울할 이유가 너무 많아 모르게 된 것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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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 때면 단어 하나, 문장 하나도 또렷하게 마음에 박힌다.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 이소진 작가의 책은 사라지고 싶었던 날 제목만으로도 나를 붙잡은 책이다. 저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 여성이 우울하고 불안한 이유를 서랍을 정리하듯 나눠서 풀어낸다. 가부장제 속 딸의 위치, 노동 불안정과 성차별, 자기혐오와 자책 등 한 칸 한 칸 풍부하게 담긴 사례를 읽으며, 실체 없이 떠돌던 내 불안감도 조금씩 정리할 수 있었다. 나는 책 속에서 함께 불안했고, 함께 사라지고 싶었다. 아등바등 홀로 분투한 시간을 위로받기도 했다. 내 잘못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가장 믿지 못했으니까.

“연구 참여자들의 이야기는 내 경험의 변주였다.” 내가 자책 동굴에서 벗어나 기어이 글을 쓰게 한 힘도 이 문장과 연결되어 있다. 당신과 나는 함께 불안의 시대를 살고 있다. 서로의 이야기를 변주하며 지금을 살아내고 있다. “나의 과거에 우리의 고통이 있었다”는 책 속 문장을 ‘우리의 고통 속에 나도 있다’는 말로 해석한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불안할 것이다. 언제 벗어날 수 있을지 막막하지만, 문제는 구조적으로 사유하면서 정작 해결은 혼자만의 노력으로만 연결 짓는 습관을 덜어내고 싶다. 사라지고 싶다는 말을 살고 싶다로 바꿔 말하고 싶다.

홍승은 집필노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