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현상학

환상 없는 사랑을 위하여

헤르만 슈미츠 지음, 하선규 옮김 l 그린비 l 2만9800원

<사랑의 현상학>은 독일 현대 철학자 헤르만 슈미츠(1928~2021)의 1993년 저작이다. 슈미츠는 국내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독일에서는 철학의 여러 영역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을 쌓은 사유의 거인으로 꼽힌다. 1960년대부터 16년에 걸쳐 쓴 10권 분량의 <철학의 체계>가 그의 대표작이다. 이 대작 말고도 파르메니데스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후설과 하이데거까지 철학사를 자신의 고유한 시각으로 재해석한 10여권의 저작을 냈고, 자유·논리·의식·신체·시간과 같은 철학적 주제를 해명한 저작을 다수 썼다. <사랑의 현상학>도 그런 ‘주제 연구’의 성과물 가운데 하나다.

광고

‘사랑의 현상학’이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슈미츠의 철학 방법론은 현상학이다. 현상학은 전통적 이론이나 관습적 사유의 틀을 모두 배제한 채 ‘사태 자체’로 다가가 그 사태가 현상하는 대로 포착하고 기술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현상학 창시자 후설의 현상학은 ‘의식’이라는 형이상학적 전통의 굴레에 갇혀 있었으며 후설 이후의 현상학도 그 굴레를 벗지 못했다고 슈미츠는 비판한다. 현상학이 사태 자체에 다가가려면 ‘의식의 차원’에서 벗어나 ‘신체의 차원’으로 내려와야 한다. 우리 인간이 의식의 존재이기 이전에 신체의 존재라는 사실에서 탐구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슈미츠의 생각이다. 이 ‘신체 현상학’의 방법론을 적용해 사랑이라는 현상을 독특하고도 독창적으로 분석한 것이 이 책이다.

광고
광고
독일 현대 철학자 헤르만 슈미츠.  위키미디어 코먼스
독일 현대 철학자 헤르만 슈미츠. 위키미디어 코먼스

슈미츠가 여기서 다루는 ‘사랑’은 두 사람이 만나 이루는 ‘성적인 파트너 사랑’이다. 이 사랑의 내적인 구조와 역사적 변모를 살피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통상의 철학서와 달리 이 책은 철학·신학 저술뿐만 아니라 <트리스탄> 같은 중세 운문소설부터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같은 근대소설까지 두루 아우르며 사랑이라는 사태를 파고들어 간다. 그리하여 이 책의 첫머리는 괴테의 소설 <친화력>의 주인공 오틸리에의 일기 한 구절로 시작한다. “사랑이 없는 삶, 사랑하는 사람의 가까움이 없는 삶이란 일종의 삼류 희극, 즉 서랍 속에 내버려진 형편없는 작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랑의 역사와 관련해 이 책이 먼저 주목하는 것이 고대 그리스-로마의 사랑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파트너 사랑’은 필리아(philia)와 에로스(eros)로 나뉘어 있었다. 슈미츠는 필리아를 ‘혼인으로 가정을 이룬 남녀의 친밀한 관계’로 이해한다. 반면에 에로스는 ‘유혹적인 자극과 열광적인 흥분이 어우러진 황홀감’의 사랑이다. 그리스인들에게 필리아적 사랑과 에로스적 사랑은 분리돼 있었고 자주 갈등을 빚었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알케스티스>에는 두 사랑 사이의 갈등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알케스티스는 남편 아드메토스를 대신해 저승에 가는 ‘열녀’다. 필리아와 에로스는 로마제국 시대에 이르러 아모르(amor)라는 이름의 사랑으로 통합됐다. 아모르 안에 친애와 성애가 합쳐진 것인데, 이렇게 통합된 아모르는 현대적 의미의 사랑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하나로 합쳐졌다고는 해도 필리아적 요소와 에로스적 요소 사이의 긴장과 불화가 아주 사라지지는 않는다.

광고

슈미츠가 특히 주목하는 것이 사랑의 구조 안에 깃든 이런 갈등의 성격이다. 이를테면 슈미츠는 사랑을 한편으로는 ‘감정’으로 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황’으로 보는데, 이 두 가지 사랑의 양상은 원천적으로 충돌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분명히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곧 당사자가 느끼는 ‘감정’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랑은 ‘사랑하는 두 사람’을 둘러싼 ‘상황’이기도 하다. 사랑의 감정은 내밀한 것이어서 당사자는 자주 그 감정에 매달리고 매몰된다. 동시에 사랑은 파트너들에게 공동의 상황에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감정과 상황은 ‘존재 층위’가 다르다. 그리하여 감정-사랑에만 빠져들면 상황-사랑에서 벗어나 표류할 수 있고, 반대로 상황-사랑만 앞세우면 감정-사랑이 짓눌려 꺼져버릴 수 있다. 이것이 ‘사랑의 딜레마’다.

이런 딜레마적 상황은 슈미츠가 ‘응축 영역’과 ‘정박 지점’이라고 부르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응축 영역’이란 사랑의 감정이 응집되는 대상 곧 사랑의 파트너를 말한다. ‘정박 지점’이란 사랑이 닻을 내리는 지점 곧 사랑하는 이유다. 문제는 응축 영역과 정박 지점이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라는 데 있다. 슈미츠는 ‘먼저 죽은 파트너를 생각나게 한다’는 이유로 어떤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를 사례로 든다. 그 경우에 사랑의 대상은 현재의 여자이지만 그 사랑의 목표는 과거의 여자다. 응축 영역 곧 사랑의 대상과 정박 지점 곧 사랑의 이유가 분리돼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랑은 파국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슈미츠가 ‘변증적 사랑’과 ‘연합적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도 선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변증적 사랑’은 두 파트너 사이의 대결적 관계에 주목하는 사랑이고, 반대로 ‘연합적 사랑’은 두 파트너가 이루는 공통의 관계에 주목하는 사랑이다. 프랑스에서는 사랑을 주로 변증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고 반대로 독일에서는 사랑을 연합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고 슈미츠는 지적한다. 이 책은 변증적 사랑의 대표적인 경우로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분석한 사랑을 꼽는다. “사르트르의 의미에서 사랑은 병 속에 갇힌 두 마리 문어가 벌이는 싸움과 흡사하다. 두 마리 문어는 스스로 신이 되려는 분투 속에서 상대방에게 최면을 거는 것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서로 잡아먹으려고 한다.” 변증적이기만 한 사랑 곧 도전과 응전이 반복되는 대립적 사랑은 일면적인 사랑이고 그래서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슈미츠는 사랑에 관한 긴 현상학적 분석을 마친 뒤 마지막에 “사람들이 깨어 있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일을 돕는 것”이 책을 쓴 이유라고 밝힌다. 사랑은 구조상 깨지기 쉬운 것이기에 원숙한 사랑에 이르려면 환상의 베일을 벗고 사랑의 취약성을 잘 들여다보아야 하며, 그렇게 들여다보는 데 현상학적 사유와 훈련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