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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생각

불균형한 권력 속에서 우정은 언제까지 가능한가

등록 :2021-10-29 04:59수정 :2021-11-18 20:36

두 예술학도가 함께 살게 된
아파트에서 맞은 청춘의 반전

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l 엘리 l 1만5000원

누군가를 만나 내면이 “지혈”됐다고 말하는 화자가 있다. 지혈이라. 대학원 새 학기, 새 친구들과의 만남 속에 스며든 차분한 설렘이 소설 도입부의 기후이지만, 곧 먹구름이 몰려오리란 걸 짐작할 수 있다. 그 누군가를 만나기 전엔, 스스로의 피를 닦고 상처를 보살피지 못한 캐릭터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물론 피투성이가 된 자신을 혼자 감당하는 일은 쓸쓸하고 꼭 그래야 한다는 법도 없지만, 언제나 곁에 있어서 가장 빨리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존재는 자기 자신뿐일 때가 많다. 그때 피 흘리는 자신을 방치하지 않기, 회복시키기가 어른의 성장이라면, 지혈 같은 치명적 관계와 이후의 시간은 그 더딘 성장의 풍경이다.

20대 소설가 지망생 ‘나’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원 순수예술 석사과정에서 ‘빌리’를 만난다. 둘은 같은 학교에서 같은 강의를 듣지만 다른 점이 많다. 나의 소설은 합평에서 좋은 피드백을 별로 못 받는데, 빌리의 소설은 교수와 동료 학생 모두의 인정을 받는다. “장식이 없고 엄격하면서도 회화적인 은유와 이미지로 가득 차” 있는 빌리의 문장들은 “너무 많은 것을 채워 넣어 완전히 실패해버린 내 소설이 그런 모습이었으면 했던 바로 그 소설”이었다. 합평 시간 모두가 내 소설의 약점을 조목조목 겨눌 때도, 빌리는 빛나는 구석을 찾아내 말해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컬럼비아에서 만난 나의 친구, 나의 치유자.

범재와 천재라는 선천적 차이와 계급적 차이가 층층이 쌓아 올려지면서 <아파트먼트>는 본격적으로 독특한 리듬의 가독성을 만들어낸다. 중산층인 나에겐 학비와 생활비를 주는 화학공학 기술자 아버지가 있고, 빌리에겐 금전적으로 도움이 안 되는 “게으름뱅이” 노동자 아버지가 있다. 빌리는 놀다가도 “시계에서 삑 소리”가 나면 일하러 갔다. 

두 소설가 지망생을 통해 예술적 야망, 계급, 인간관계에 대한 섬세한 통찰을 그려낸 소설 &lt;아파트먼트&gt;를 지은 테디 웨인. 시대적 배경은 “서로 다른 두 개의 미국에서 온 두 사람이 친구가 될 수 있었던 마지막 시기”인 1990년대 후반이다. ⓒ Christine Mladi
두 소설가 지망생을 통해 예술적 야망, 계급, 인간관계에 대한 섬세한 통찰을 그려낸 소설 <아파트먼트>를 지은 테디 웨인. 시대적 배경은 “서로 다른 두 개의 미국에서 온 두 사람이 친구가 될 수 있었던 마지막 시기”인 1990년대 후반이다. ⓒ Christine Mladi

무엇보다 나는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살고, 빌리는 일하는 바 지하실에 산다. 내가 사는 뉴욕 아파트는 임대료규제법 적용 아파트(일정 비율로만 임대료 인상이 가능한 아파트)로 대고모가 임대차계약을 한 집이다. 대고모는 거처를 옮긴 상황. 빈집에 내가 들어가 산다면 아버지로선 기숙사비를 아낄 수 있었다. 한마디로 불법 전대다. 실거주자가 나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대고모의 계약도 끝난다. 나는 이웃 주민과 마주칠 일을 거의 만들지 않았다. 사람을 초대하는 파티는 가장 위험했다. 그런 내가 빌리에게 동거를 제안한다. 지하실을 벗어나 아파트에서 같이 사는 게 어떠냐고.

수치심이 시킨 일이다. 단지 아버지가 전문직이라는 이유로 빌리에 비해 “얼마나 쉽게 자금을 손에 넣었는지 인정”하면서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게는 풍부한 자원이 있었고 이곳(아파트)은 그 자원을 공유할 구체적인 방법이 될 수 있는 장소였다”. 빌리는 그 제안을 처음엔 거절했지만 몇 번 만에 받아들였다. 돈을 받지 않겠다는 나에게 빌리는 청소와 요리를 도맡겠다고 한다.

선천적이면서 동시에 계급적인 차이도 있었다. 바로 매력이다. 빌리는 잘생긴 외모에 여유로운 태도를 덧입었다. 사람들은 “중력”에 이끌리는 행성처럼 빌리 주위를 맴돌았다. 그중 더 눈에 띄지 않는 행성 하나가 나였다.

재능, 물질, 매력. 나와 빌리에게 주어진 불균형한 양의 세 가지 권력이 아파트라는 공간에서 뒤엉키고 서로를 육박하는데, 이 설정 자체가 쫄깃한 당김음의 리듬이 되어 문장을 지배한다. 나의 부유함과 빌리의 가난함, 빌리의 재능과 나의 평범. 센박과 여린박의 규칙성이 뒤바뀌며 의외의 박자를 만드는 당김음처럼 미끄러질 듯 불안할지언정, 신선하고 중독적이다. 

문학에 대한 열망만은 닮은 둘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찌릿, 작은 전하가 흐르”는 것처럼 “직렬로 연결되어 가슴 설레는 체험들을 함께 해나”간다. 특히 “완강한 피스타치오 껍질처럼 평생 굳게 닫혀” 있던 나는 빌리를 “신뢰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친구”로까지 여기게 되지만, 파국의 습기는 권력 차이 틈으로 축축하게 스며든다.

점점 내 소설에 대한 코멘트가 줄고, 청소되지 않은 날이 늘며, 자신에게 쓰는 돈을 “내 아버지 수입의 트리클다운(낙수효과)”으로 여기고, 친구들 앞에선 내 손을 두고 “일해본 적 없는 아기 손”이라며 무안을 주는 빌리. 그런 빌리가 소설로 장학금을 받아 아파트를 나가겠다고 말해주길 바라면서도 동시에 빌리가 떠나지 않길 바라는 혼란스러운 나. 그리고 도화선을 건드려버린 나의 어리석음…. 단단할 것 같던 관계가 실은 얼마나 무르고 연약한지, 선망과 질투는 물과 얼음처럼 상태만 다를 뿐 실은 같진 않은지, 불평등한 권력 속에서 우정 혹은 사랑은 가능한지. 외로움과 상실이라는, 삶의 정해진 대답이 오히려 독자에게 질문하고 또 질문한다.

이 소설을 쓴 40대 초반의 테디 웨인은 아직 한국에선 다소 낯선 이름이다. 미국의 떠오르는 신진 작가에게 주는 ‘화이팅 작가상’(2011)을 받았고, 현재 <뉴욕타임스> <뉴요커> 등에 고정적으로 칼럼을 싣고 있다. 웨인은 ‘남성성’의 불안정성을 드러내는 작업을 꾸준히 해오는 작가이기도 하다. 네 번째 소설인 <아파트먼트>에서도 동성애를 혐오하고 성확정 수술을 비판하며 “그런 건 여자애들이나 하는 행동”이란 말을 쉽게 꺼내는 ‘마초’ 빌리와 “주위를 어지럽히는 건 남자들이 하는 짓”이라고 덧붙이는 내가 있다.

전면적으로 드러난다고 보긴 어렵지만 동성애 코드도 읽힌다. (나는 환각 속에서 빌리에게 스킨십을 한 적이 있고, 그 일 이후 관계의 공기는 확 달라진다.) 절정에서 벌어진 기막힌 ‘두 편의 연극’ 뒤, 나는 빌리에게 또다른 우리의 공간을 원한다고 거의 애원한다. 그것은 심취였을까 사랑이었을까. 사랑은 심취와 달리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흔적의 자리 때문에 삶은 재편되곤 한다. 중년이 된 나의 삶은 완전히 바뀌어 있다. 빌리와는 달리.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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