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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생각

우리가 행성의 시간을 나누어 줄게

등록 :2021-10-22 05:00수정 :2021-10-22 19:45

김초엽 소설집 ‘방금 떠나온 세계’
장애와 의사소통 문제에 생태적 사유까지

방금 떠나온 세계
김초엽 지음 l 한겨레출판 l 1만5000원

김초엽의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2017년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대상과 가작을 동시 수상하며 등단한 작가가 2년 만에 낸 이 책은 에스에프(SF)로는 처음으로 ‘오늘의작가상’을 수상했고, 지금까지 25만부가량 팔렸다. 상업성과 문학성을 두루 인정받으며 김초엽은 단박에 한국문학의 중심으로 진입했다.

첫 책의 이런 놀라운 성공은 웬만한 작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마련이다. 독자의 기대와 눈높이가 한껏 고조된 상태에서 다음 작품을 내놓기란 상당한 용기와 자신감이 필요한 일일 테다. 첫 책으로부터 다시 2년여 만에 나온 김초엽의 두 번째 소설집 <방금 떠나온 세계>는 다른 무엇에 앞서 첫 소설집을 ‘경쟁 상대’로 삼아야 하는 얄궂은 운명을 떠안은 셈이다. 게다가 그사이에 작가는 첫 장편 <지구 끝의 온실>과 논픽션 <사이보그가 되다>(공저)를 펴낼 정도로 다른 작업에도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했다.

결론을 당겨 말하자면, <방금 떠나온 세계>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에 결코 뒤지지 않고 오히려 그 책을 넘어서는 성과로 보인다. 5년차 작가 김초엽은 ‘소포모어 징크스’를 멋지게 극복하며 그에 대한 문단과 독자들의 기대가 옳았음을 입증했다. 

두 번째 소설집 &lt;방금 떠나온 세계&gt;를 낸 작가 김초엽. “처음부터 메시지를 찾으려 하기보다는 감정이나 장면의 흐름을 따라가보기를 권한다. 물론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게 어딘가에는 숨어 있겠지만, 처음 읽을 때에는 소설 속 감정에 동화되면 좋겠다”고 독자에게 당부하는 말을 전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두 번째 소설집 <방금 떠나온 세계>를 낸 작가 김초엽. “처음부터 메시지를 찾으려 하기보다는 감정이나 장면의 흐름을 따라가보기를 권한다. 물론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게 어딘가에는 숨어 있겠지만, 처음 읽을 때에는 소설 속 감정에 동화되면 좋겠다”고 독자에게 당부하는 말을 전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첫 소설집과 마찬가지로 <방금 떠나온 세계>에도 일곱 단편이 실렸다. 첫 책이 매우 다양한 소재와 주제에 걸쳐 있었다면, 이번 책은 비교적 일관된 주제의식을 담았다는 점에서 한층 높은 밀도를 보인다.

이번 작품집을 관류하는 열쇳말은 장애와 의사소통이다. 거의 모든 수록작에 장애를 지닌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 자신 청각장애를 지닌 김초엽이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인 김원영 변호사와 함께 올 초에 낸 <사이보그가 되다>는 장애와 과학기술 발전의 관계를 파고든 문제작이었다. 김초엽이 그 책을 준비하고 쓰던 무렵은 이번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을 쓰던 시기와 겹친다. “그 책을 쓰면서 얻은 여러 가지 생각이나 소재들이 자연스럽게 소설로 연결되었다. 다른 감각과 다른 인지 세계를 가진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고 김초엽은 19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출판 회의실에서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김초엽의 인터뷰 발언에서 나온 ‘다른 감각’ ‘다른 인지 세계’라는 표현에 주목해 보자. 김초엽의 소설들에서 장애는 결핍이나 훼손, 비정상이라기보다는 ‘다른’ 신체 조건 또는 보편성과 대비되는 개별성으로 간주된다. 단편 ‘마리의 춤’의 주인공 마리는 “시지각 이상증을 겪는” ‘모그’인데,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눈으로 굳이 춤을 배워 무대에 서겠다고 고집한다. 동료 모그들과 몸의 감각을 공유할 수 있는 프로그램 플루이드를 개발한 그는 플루이드를 이용한 자신들의 소통 방식이 ‘변화’이자 ‘진보’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변화와 진보를 앞당기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식이 테러라는 사실은 유감이지만, 소설 결말에서 모그가 아닌 화자 ‘나’는 마리의 플루이드가 “우리가 취할 수도 있었던 어떤 소통의 형태였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소설집 &lt;방금 떠나온 세계&gt;를 낸 작가 김초엽. “에스에프 장르의 정수가 담긴 게 단편이라 생각하고 저 역시 단편 쓰는 걸 좋아한다”며 “쓰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고 즐거웠기 때문에 그런 감정이 독자들에게도 잘 전달됐으면 좋겠다”고 19일 &lt;한겨레&gt;와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두 번째 소설집 <방금 떠나온 세계>를 낸 작가 김초엽. “에스에프 장르의 정수가 담긴 게 단편이라 생각하고 저 역시 단편 쓰는 걸 좋아한다”며 “쓰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고 즐거웠기 때문에 그런 감정이 독자들에게도 잘 전달됐으면 좋겠다”고 19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사실 장애가 결핍이 아니라 다양성 또는 진보일 수도 있다는 주장은 장애인들이 현실에서 겪는 고통을 가리는 것이 될 수도 있어서 조심스러워요. 제가 쓰는 소설이 에스에프 장르다 보니까, 현실과 거리를 두고 그런 이야기를 좀 더 급진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것 같아요.”

김초엽의 이런 염려는 단편 ‘로라’에서 “신체장애를 낭만화하고 있다며 불쾌감을 표”하는 일부 장애인 단체의 태도를 떠오르게 한다. 이 작품에는 신체 감각이 여느 사람들과 다른 이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기존의 신체 일부를 잉여로 여겨 절단하고 싶어 하거나, 반대로 있어야 할 추가 신체 구조가 결여되었다는 느낌에 시달린다. 주인공 로라는 두 팔에 만족하지 못하고 세 번째 팔을 원하는 경우다. 로라의 연인인 진은 로라를 이해하고자 세계 각지에서 로라와 비슷한 증상을 앓는 이들을 만나 인터뷰해서 <잘못된 지도>라는 책을 출간한다.

“깨질 듯한 연약함”을 지닌 ‘인지 공간’의 주인공 이브, 그리고 “내적 시계가 망가”지는 바람에 바깥 세계의 시간 흐름에 한없이 뒤처지는 ‘캐빈 방정식’의 주인공 언니 역시 장애의 결핍과 훼손을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세계의 모든 지식을 구성원들이 공유하게 되어 있는 ‘인지 공간’의 격자 구조물이 사실은 매우 불완전하며 개별적 기억과 진실을 억압하고 배제한다는 사실을 그 격자 구조물에서 소외된 이브만이 알아차린다든가, ‘캐빈 방정식’의 언니가 안팎으로 어긋나는 시간의 흐름 속에 새로이 생성되는 우주적 시간을 유일하게 경험한다는 사실은 이들의 장애가 지닌 역설적 가능성을 알게 한다.

두 번째 소설집 &lt;방금 떠나온 세계&gt;를 낸 작가 김초엽.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두 번째 소설집 <방금 떠나온 세계>를 낸 작가 김초엽.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우리가 행성의 시간을 나누어 줄게.”

단편 ‘오래된 협약’에서 인류가 정착한 외계 행성 벨라타의 지배적 생명체이자 벨라타 행성 자체이기도 한 오브는 인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기약 없는 잠에 빠져든다. 인간들이 새로운 행성에 정착하고자 오브를 죽이고, 오브는 그런 인간에 맞서 독성 물질을 내뿜고 폭우를 퍼부으며 싸우던 끝이었다. 인간의 시간 관념으로는 짐작하기도 쉽지 않은 긴 수명을 지닌 오브가 “아주 짧은 순간”을 살다 가는 인간들을 배려하여 양보하기로 한 것.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이 행성의 시간을 잠시 빌려 온 것에 불과하다”고 벨라타 거주민 노아가 말할 때, 거기에서 가이아 이론을 비롯한 생태적 사고를 떠올리지 않기란 어렵다.

“이 작품은 쓸 때부터 인류세를 생각하면서 썼어요. 인류세란 인간이 변형시킨 지구잖아요? 지구에 시간을 빚지고 있는 게 인간이구요. 인간이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가더라도 이 관계는 똑같이 재연될 거라고 봐요. 그렇게 행성과 인간의 관계를 생각하며 쓴 작품이 ‘오래된 협약’입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소설가 김초엽.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소설가 김초엽.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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