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史記) ‘은본기’(殷本記)는 은(殷)의 폭군 주왕(紂王)이 발명한, 전무후무한 잔혹한 형벌에 대해 짧게 말한다. 원망하는 백성과 반기를 드는 제후들이 쏟아져 나오자, 주왕은 다양한 혹형으로 그들을 다스렸다. 그 중 ‘포락(炮烙)의 형(刑)’이 가장 독창적(?)이었다.
포(炮)는 진흙을 바른 음식을 불 속에 넣어 굽는 것이다. 또는 어떤 물건을 숯불을 묻은 재 안에 넣어두는 것이다. 낙(烙)은 ‘불로 지진다’는 뜻이다. 낙화(烙畫)는 불에 달군 인두로 나무나 종이를 지져서 그린 그림이고, 낙형(烙刑)은 불에 달군 쇠붙이로 사람을 지지는 고문이다. ‘포락의 형’은 곧 사람을 불 속에 던져 지지고 태워 죽이는 형벌이다.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傳)은 좀 더 상세한 설명을 붙인다. 숯불을 괄하게 피우고 그 위에 기름칠을 한 구리기둥을 다리처럼 걸친 뒤 ‘건너가면 살려 준다’고 말한다. 벌겋게 달아오른, 기름으로 미끈거리는 둥근 기둥을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당연히 숯불 위에 떨어진다. 곧 부질없는 희망을 품고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다가 불길에 떨어져 죽게 만드는 형벌이 ‘포락지형’이다. 주왕의 여자 달기(妲己)는 자신의 사내가 창안한 이 혹형으로 절규하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깔깔거리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떨어지면 즉사하는 높은 곳에 다리가 놓여 있다. 강화유리를 밟으면 살고 보통유리를 밟으면 떨어져 죽는다. 우연과 앞선 자들의 죽음이 절묘하게 조합된, 극도로 희귀한 경우에만 다리를 건널 수 있다. 실제 다리를 건널 가능성은 0에 가깝다. 게임에 참여한 사람 대부분이 추락사하는 것을 전제한 설계다.
<오징어 게임>은 충격적 에피소드가 숱하게 나오지만, 나로서는 유리다리 에피소드가 가장 충격적이었다. 다른 에피소드와는 달리 이 에피소드에는 사람들이 다리에서 떨어져 죽는 장면을 관람하는 자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보석을 박은, 사치스런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술을 홀짝거리며 약자의 공포와 죽음을 천천히 감상하는 자들! 끔찍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주왕과 달기는 얼굴을 드러내놓고 죽음을 감상했다. 은(殷)의 사람들은 누가 ‘포락지형’의 설계자인지, 감상자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의 설계자와 감상자들은 가면을 쓰고 밀실에서 약자의 공포와 죽음을 즐긴다. 주왕과 달기는 반란을 통해 축출될 수 있었지만, 얼굴을 가린 채 밀실에 몸을 감춘 <오징어 게임>의 설계자와 감상자는 쉽게 축출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만든 약자의 상살지옥(相殺地獄)도 당연히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모두들 <오징어 게임>이 세계 1위의 드라마가 되었다고, 한류의 세계화가 이루어졌다고 감격해 마지않는다. 이 드라마가 거친 방법으로 드러내고 있는, 구조화된 빈부격차, 곧 계급의 문제를 내셔널리즘이 은폐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이 부조화가 심히 불편하다. 유리다리 에피소드에서 변태적 욕망을 충족시키려다가 권총 앞에 제 몸을 드러낸 사내 역시 가면과 밀실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살덩이에 불과했지만, 그들이 축출되지 않고 멀쩡한 것은 이 부조화 때문이 아닌가? ‘주왕(紂王)들이여 영원하라!’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