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 학습담
외국어 학습에 관한 언어 순례자 로버트 파우저의 경험과 생각
로버트 파우저 지음 l 혜화1117 l 1만8500원

해외여행을 갈 때면 <필수 ○○ 여행회화> 같은 책을 들고 가던 시절이 있었다. 인공지능(AI) 번역기 덕에 이제는 스마트폰 하나면 웬만한 회화는 해결할 수 있다. 긴 글 역시 클릭 한번으로 무리 없이 번역된다. 굳이 외국어를 공부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 시대다. 하지만 한편에는 여전히 진학과 취업 등을 위해 외국어 공부에 매달려야 하는 이들도 많다. 다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외국어 공부 자체가 좋아 배운다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외국어 학습담>은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가 자신의 외국어 학습 경험과 외국어 학습법에 대한 생각을 담은 책이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평생 새로운 외국어를 순례하며” 살았다고 말한다. 영어가 모국어이지만 한국어, 일본어, 스페인어, 라틴어, 북미 선주민 언어, 독일어, 한문,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중국어, 몽골어, 에스페란토, 이탈리아어 등을 공부했다. 이 책도 한국어로 직접 썼다. 3년 전 펴낸 <외국어 전파담>에서는 ‘외국어’라는 개념이 언제 등장했는지, 외국어가 어디에서 어디로 어떻게 전해졌는지 등을 역사적으로 살펴본 바 있다. <외국어 전파담>이 교양서라면 이번 책은 외국어를 공부하는 이들을 위한 실용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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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책과 함께 나온 <외국어 전파담> 개정판에서 지은이는 책을 펴낸 뒤 독자들에게 많은 질문을 받았다고 말한다. “인공지능이 발달하면 외국어 공부를 안 해도 되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요?” “나이가 들어서도 외국어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외국어를 잘할 수 있을까요?”

첫번째 질문에 대한 지은이의 대답은 “적어도 나와 이 책의 독자들이 살아갈 21세기까지는 여전히 외국어 학습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우리가 언어를 통해 전하려는 ‘의사’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지식과 정보, 또 하나는 소통과 이해다. 지식과 정보를 다른 언어로 바꾸는 기술은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돼 있다. 그럼에도 사용자가 적은 언어는 정확도가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인공지능 기술의 기초가 되는 축적된 데이터의 양이 적기 때문이다. 중요한 정보의 경우 사람이 다시 점검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소통과 이해라는 측면에서 지은이는 더욱 회의적이다. “언어에 담긴 수많은 상황과 감정의 다양한 진폭을 기계적인 인공기술로 정확하게 변환, 전달하는 것이 과연 우리 세대에 가능할까.”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해도 미세한 감정의 전달, 상대방과의 교감까지 해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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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질문 역시 외국어 공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다. 흔히들 외국어는 나이 들수록 배우기 어렵다고 말한다. 아쉽지만 지은이도 이에 동의한다. “많은 나이가 외국어 학습의 걸림돌이라는 건 일단 전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지은이는 두 가지 조언을 내놓는다. 첫째는 성인 학습자의 공부는 자율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해진 과정을 따라갔던 학생 시절과 달리, 스스로 목적을 정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단계적 목표를 세우고 그에 맞게 공부해 나가야 한다. 다소 현실적인 또 하나의 조언은 목표를 낮게 잡으라는 것이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자신 있게 마음 편하게 하는 정도’로 (목표를) 설정한다면 학습 부담은 한결 줄어든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찾으려 애쓰는 외국어 공부의 ‘비법’은 무엇일까. 예상할 수 있듯이 외국어 공부에는 지름길도, 드라마틱한 비법도 없다는 게 지은이의 답이다. 필요한 것은 인내와 끈기, 그리고 자신의 성격과 상황에 맞게 스스로 찾아낸 학습법이다. 그럼에도 지은이가 권유하는 부분이 있다면 ‘다독’이다. 관심 있는 분야를 가벼운 마음으로 자주 읽으라는 것이다. 더구나 요즘은 휴대폰만 있으면 얼마든지 다양한 외국어 텍스트를 읽을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단어 암기다. 단어 암기는 지루한 일이지만, 누군가의 외국어 실력이 뛰어나다는 판단 기준은 그가 사용하는 어휘의 수준이다. “문법이 외국어의 뼈라면 어휘는 외국어의 살이다.” 반면 발음은 다소 한국식이라 해도 소통하는 데 큰 문제가 안 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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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외국어 공부를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굳이 힘들게 배우지 않아도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세상이라며 옆으로 밀어놓을 수도 있다. 특정한 필요에 의해서든, 지적 즐거움을 위해서든 외국어 공부라는 여정에 도전해볼 수도 있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만약 후자를 선택했다면 그 길의 “가장 좋은 동반자는 좋은 교사도, 탁월한 교수법도 아니다. 외국어 공부를 그 자체로 즐기며 힘들지만 앞으로 나아가 보겠다는 마음과 태도다.” 지은이는 시험, 취직, 승진, 업무 등을 위해서만 외국어를 공부하던 시대는 지나갈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즐거운 취미이자 놀이, 지적 자극을 주는 매개체 등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모습으로 외국어 학습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낯선 언어를 깨쳐 나가는 과정, 그것을 점차 익혀 자유롭게 말과 글을 통해 소통하는 걸 매우 즐긴다”고 말하는 지은이는 타고난 외국어 학습자로 보인다. 스스로 인정하고 있듯이 영어가 ‘글로벌 언어’로 통용되고 있는 현재, 외국어 공부에 가장 유리한 위치인 ‘미국인 백인 남성’이기도 하다. 어디에서든 환대를 받았던 덕분에 그곳의 언어를 쉽게 배울 수 있었다고 지은이는 고백한다. 지은이의 주장들이 때때로 이상주의적이고 ‘남 이야기’ 같아 보이는 까닭이다. 하지만 여전히 외국어 공부에 시달리며 ‘기적의 공부법’을 찾고 있다면, 혹은 정반대로 목적으로서의 외국어 공부에 조금씩 눈떠가고 있다면, 먼저 길을 걸어간 ‘외국어 순례자’의 조언들이 유익하게 다가올 수 있다.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