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수원시 팔달산에 있는 경양식집 ‘케냐’에서 주문한 정식(왼쪽)과 돈가스. 곁들인 깍두기와 단무지가 정겨움을 더한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산에 있는 경양식집 ‘케냐’에서 주문한 정식(왼쪽)과 돈가스. 곁들인 깍두기와 단무지가 정겨움을 더한다.

‘단무지와 깍두기, 그리고 나이프와 포크….’

요즘 엠제트(MZ) 세대나 서양인들이 들으면 정말 알쏭달쏭한 상차림 조합이다. 하지만,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를 졸업한 이른바 586세대는 바로 떠오르는 단어가 있을 게다. 그렇다. 바로 ‘경양식’이다. 경양식의 사전적 의미는 ‘간단한 서양식 요리를 파는 집’이라지만 이들 대부분은 곧 ‘돈가스’와 ‘함박(햄버그)스테이크’란 단어로 연결하고, 이런 음식은 다시 첫 데이트의 수줍은 추억과 낭만 속으로 그들을 밀어 넣을 수밖에 없다.

50대 남성 직장인의 점심은 늘 그렇듯 뜨끈한 해장국이 대부분이지만, 30도를 넘나드는 가마솥 더위에 그런 선택은 그저 ‘만용’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40대 후배를 불러내 해장국이나 국물 요리가 아닌 ‘점심 맛집’ 섭외를, 아니 추천을 강요했다. 사업 때문에 외국을 자주 다녀 ‘케빈’이란 영어 이름도 가진 그는, 의외로 별다른 고민 없이 “형님을 추억 속으로 한 번 빠져들게 하겠다”며 망설임 없이 차에 올랐다.

팔달산 정상 부근에 자리한 케냐에서 바라본 수원시 옛 시가지의 풍경.
팔달산 정상 부근에 자리한 케냐에서 바라본 수원시 옛 시가지의 풍경.
경양식 케냐 안에 있는 커피 볶는 기계.
경양식 케냐 안에 있는 커피 볶는 기계.

광교 새 도시에 있는 경기도청에서 케빈이 내비게이션에 찍은 이름은 ‘케냐’였다. ‘형제나 사촌 집 가게 이름이 아니냐’며 못 이기는 척하고 따라간 곳은 승용차로 20분 거리의 수원 팔달산 꼭대기 부근 경양식 집이었다. 해발 140여m의 야트막한 팔달산은 수원의 중심부이자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을 품고 있고, 사시사철 둘레길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팔달산에 케냐란 이름의 경양식집이 있는 것도 어색했지만, 아직도 이런 식당이 있다는 게 더 신기했다.

주차장이 넓지는 않았는데, 오전 11시30분 영업 시작 시각에 맞춰 도착한 덕분인지 주차를 하느라 애먹지는 않았다. ‘마지막 주문 오후 1시30분, 문 닫는 시간 오후 3시’라는 다소 냉정한(?) 간판을 뒤로 한 채 유리문을 느긋하게 밀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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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지도 좁지도 않은 식당 안에는 4인용 소파가 갖춰진 테이블 대여섯개가 오래된 자리를 지켰다. 널찍하게 간격을 띄운 소파 테이블 옆에는 2~3인용 나무 테이블도 정겹게 반겼다. 식당 안에 놓인 대부분의 소품은 정말 아프리카 케냐에서 가져온 나뭇조각들로 채워져 있었다.

여기에 팔달산 꼭대기나 다름없는 언덕 위 식당에서 유리 통창으로 내려다보이는 수원 옛 시가지의 풍경은 추억의 아련함을 더했다. 스피커에서는 1970~80년대 유행했던 팝송과 가요가 뒤섞여 흘러나오고, 식당 어귀에 있는 커피 볶는 기계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퍼져 나왔다. 경양식집이 유행했던 1980년대로 빨려드는 듯했다.

경양식집 케냐를 다녀간 손님들의 손글씨가 가득한 노트가 책장에 나란히 꽂혀 있다.
경양식집 케냐를 다녀간 손님들의 손글씨가 가득한 노트가 책장에 나란히 꽂혀 있다.
1997년부터 케냐를 운영하는 장상일씨와 유성미씨가 가게 안에서 기자를 위해 포즈를 취해줬다.
1997년부터 케냐를 운영하는 장상일씨와 유성미씨가 가게 안에서 기자를 위해 포즈를 취해줬다.

1997년 케냐에서 사업을 하는 형님을 따라나섰다가 그곳에 살다 돌아와 식당을 차렸다는 장상일(54)씨는 “그저 케냐가 좋아 식당 이름을 붙였다”고 빙그레 웃었다. 식당의 유일한 종업원은 장씨의 부인 유성미(52)씨 딱 한 명. 영업시간도 짧고 재료가 소진되면 더는 팔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메뉴도 간단했다. 정식과 돈가스, 생선가스, 그리고 함박스테이크가 전부다. 정식은 이 집에서 만드는 모든 요리에 새우튀김 하나만 섞여 나온다. 물론 후추를 뿌린 수프는 식전에 먼저 나온다. 여기에 하얀 소스를 맛깔나게 입힌 마카로니와 양배추, 아기 주먹만 한 하얀 쌀밥도 곁들여 준다.

특히 경양식집의 ‘필수 아이템’으로 꼽히는 깍두기는 장씨 부부가 직접 담가 맵거나 짜지 않으면서, 다소 느끼할 수 있는 튀김 요리의 뒷맛을 개운하게 처리해 준다. 맑은 기름으로 튀겨낸 바삭한 돈가스를 한 움큼 씹은 뒤, 어른 가운뎃손가락 크기로 잘라 나오는 단무지를 한입 베어 물면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싶다.

부인 유씨는 “새우만 빼고 모두 다 남편과 직접 만든다”며 “커피도 직접 생두를 볶아 낸다”고 귀띔했다. 이 집에서는 후식으로 케냐, 콜롬비아, 과테말라, 브라질 등에서 나오는 원두 4가지를 로스팅한 커피를 내놓는다. 메뉴판 표지에 ‘커피 볶는 레스토랑’이란 글귀가 선명하게 박혀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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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그리며 ‘케냐’에 가면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추억을 진짜 만날 수 있다. 식당 어귀 책장을 빼곡하게 메운 스프링 노트가 그것이다. 20년 넘도록 다녀간 수천 명의 손님이 일기처럼 펜을 눌러 쓰고 간 노트를 살짝 들춰봤다.

사연도 일상도 가지가지였다. ‘꽃 비가 내리는 날 ◇◇와 △△가 다녀감~♡’, ‘△△야 미안하다, 오늘은 아빠와 살짝 데이트하느라 둘만 왔단다. 다음에 꼭 같이 오자’, ‘몇 번째 방문인지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너와 함께 왔다는 게 중요해’ 등등…. 오래되고 낡았지만, 그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오랜만에 해장국 대신 우아하게 나이프와 포크를 써보니 어땠냐”고 묻는 케빈에게 답했다. “오늘은 점심을 먹은 게 아니라 시곗바늘을 돌려 아련한 첫사랑을 만나고 온 느낌”이라고.

김기성 기자 player00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