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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전국일반

조선 도공 잡아간 ‘도자기 전쟁’…왜성 터엔 한 서린 그릇 파편들

등록 :2015-09-30 17:13수정 :2015-09-30 19:58

기장문화원 1층 로비에 임랑포 왜성을 복원한 모습이 모형으로 전시돼 있다. 부산/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기장문화원 1층 로비에 임랑포 왜성을 복원한 모습이 모형으로 전시돼 있다. 부산/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④ 부산 기장군 죽성리·임랑포 왜성
“멀리 기차소리를 바람결에 들으며, 어쩌다 동해 파도가 돌각담 밑을 찰싹대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난계 오영수(1909~1979)의 단편소설 <갯마을> 첫머리에서 이렇게 묘사된 실제 배경 마을은 부산 기장군 일광면 학리 또는 이을포로 알려져 있다. 이 마을들과 동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이웃한 곳에 각각 기장읍 죽성리와 장안읍 임랑포가 있다. 이 마을들 역시 소설 <갯마을>에 나오는대로 ‘달음산 마루에 초아흐레 달’이 걸리면 ‘달그림자를 따라 멸치 떼가 드는’ 전형적인 멸치잡이 갯마을이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도시문명과는 거리를 둔 한적하고 외진, 그래서 더욱 평화로운 해안 포구다.

하지만 이곳에도 420여년 전 한반도를 휘몰아친 임진왜란의 광풍은 그냥 비켜가지 않았다. 1592년 4월 보름 부산 동래읍성을 함락한 왜군은 세 길로 나눠 북상하면서 이튿날 동쪽으로 이곳 기장(현)을 거쳐 울산 경주 등을 가차없이 짓밟고 올라갔다. 이후 왜군은 이듬해 4월부터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반격, 조선 수군의 해상로 봉쇄, 의병 봉기 등으로 수세에 몰리자 한강 이남으로 물러나 남해안 일대에 성을 쌓고 장기전에 들어갔다. 이즈음 이곳 죽성리와 임랑포 해변에도 왜성을 남겼다.

죽성리 왜성과 임랑포 왜성은 모두 하천과 바다를 함께 끼고 목 좋은 구릉에 자리잡아 선박 출입이 편리한 포구와 방어에 유리한 전망을 동시에 확보한 왜군의 병력 주둔 및 병참기지였다. 울산 서생포 왜성과 부산 증산왜성을 연결하는 중간 요충지로서 이 곳 왜군들은 왜란기간 인근 지역 왜군과의 연합작전은 물론 조선 백성들을 상대로 축성과 식량생산 등 부역징발과 수탈을 일삼았다. 특히 이들 왜성은 왜군이 남쪽으로 후퇴하면서 각 지역에서 붙잡아들인 조선 도공, 사기장, 칠기장 등 장인과 민간인들을 억류하고 강제로 일본에 끌고간 창구 구실을 한 대표적인 곳이기도 하다.

죽성리·임랑포 왜성 위치도.(* 그래픽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청자·분청사기·백자 등 파편들
임랑포 등서 10여년전 수습
도공 수만~수십만명
7년 왜란 기간 중 끌려가

■ 무명 도공의 넋을 기리다

죽성리에 가면 서답골 또는 세답골이라 불리는 골짜기 한켠에 ‘소름요’라는 도자기 공방이 있다. 해안 포구가 내려다보이는 공방 안 가마터 쪽으로 가면 ‘무명도공추모비’라고 새긴 비석이 서있다. 송중환 소름요 대표가 2004년 5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갔던 조선 도공과 사기장들의 넋을 기리고 달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송 대표는 이후 지역의 관심 있는 이들을 모아 조선사기장연구회를 만들고, 회원들과 함께 해마다 이 비석 앞에 차와 꽃을 올리고 있다.

송 대표는 “10여년 전 인근 왜성을 찾아온 일본인 사학자와 고고학자들한테서 이 골짜기가 왜란 때 왜군들에게 붙잡혀온 사기장과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며 지나던 길이라는 얘기를 듣게 됐다. 도공들이 일본에 끌려가기 전 이 곳에 억류돼 머물며 빨래를 했다고 해서 세탁골이라고도 불린다. 30여년 전부터 이곳에 와서 도자기를 만들어 왔는데 이런 기막힌 사연을 간직한 곳이라는 것을 알고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죽성리 왜성의 본성 성벽.  일부 성벽 모서리 부분에선 기존 성벽 밖으로 덧쌓은 흔적이 확인됐다. 부산/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죽성리 왜성의 본성 성벽. 일부 성벽 모서리 부분에선 기존 성벽 밖으로 덧쌓은 흔적이 확인됐다. 부산/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왜란이 일어났던 16세기부터 일본에선 차 마시는 풍습과 다도가 유행했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나고야 진중에서 자주 다회를 열어 즐겼다고 한다. 이에 조선에 파병된 왜군 장수들은 전국에서 수많은 도공과 사기장들을 경쟁적으로 붙잡아 일본으로 끌고갔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부산 기장지역도 일찍이 도자기와 관련 깊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2009년과 2010년 임랑포 왜성과 가까운 장안읍 상장안 도요지와 명례산업단지 터에서 조선시대 가마터가 발굴됐는데, 상장안 도요지에선 밑바닥에 ‘울산 장흥고’라는 글이 새겨진 조선시대 전기 분청사기 접시도 나왔다.

황구 기장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은 “도자기에 관청 이름이 있다는 것은 이곳에서 만들어진 도자기가 왕실과 조정에 납품될 만큼 공인받았다는 것으로, 도자기 생산에 필요한 장인과 흙, 물, 가마 등 조건을 모두 갖춘 대표적인 생산지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10여년 전 임랑포 바닷가에서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의 깨진 조각을 200여점 수습했다. 왜란 때 왜군들이 도공들을 납치해가면서 도자기들도 함께 약탈해가다 떨어뜨린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사기장과 도공 등 포로들을 일본에 끌고간 왜군 장수들은 이들을 주로 자신의 고향에 강제이주시켜 평생 도자기를 구우며 살도록 했는데, 관련 기록이 주요 영주 집안에서 내려오는 가문서에 단편적으로 남아 있다. 죽성리 왜성과 임랑포 왜성을 쌓고 주둔했던 왜군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와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는 모두 왜란 중 사기장과 도공들을 숱하게 붙잡아 끌고간 것으로 기록됐다.

죽성리 왜성의 본성 성벽.  일부 성벽 모서리 부분에선 기존 성벽 밖으로 덧쌓은 흔적이 확인됐다. 부산/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죽성리 왜성의 본성 성벽. 일부 성벽 모서리 부분에선 기존 성벽 밖으로 덧쌓은 흔적이 확인됐다. 부산/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구로다 나가마사에 의해 죽성리 왜성에서 끌려간 사기장과 도공들은 주로 일본 규슈 지역에 정착해 살았는데, 후쿠오카 다카도리(高取) 가마를 창시한 다카도리 핫산(八山)이 대표적 인물이다. 핫산은 일본에 끌려가 1601~1602년께 후쿠오카의 다카도리산 서쪽에 가마를 열고 일본도자기의 시초가 된 인물로 알려져 있다.

7년 왜란 기간 도공과 사기장 같은 장인 외에도 수많은 조선 민간인이 일본에 끌려갔다. 정확한 집계는 불가능하나 일본 쪽 연구자들은 5만~6만명, 한국 쪽에선 10만~20만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 나가사키를 통해 포르투갈 노예상인들에게 팔려간 민간인까지 치면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조선왕조실록>은 왜란 중인 1595년 12월 장사꾼으로 가장한 밀정을 통해 죽성리 왜성 진영을 정탐해 보고한 내용을 이렇게 기록했다.

“수확한 곡식을 배로 실어다가 진영 안에 쌓아둔 것이 36곳이나 되고 곡초를 남쪽에 쌓아둔 것이 50여곳이나 됐으며,(중략) 양곡과 기계 및 잡물을 일찍이 나눠 운반해 일본으로 실어갔다고 했다. 왜적에 붙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왜의 진영 옆에 사는 자가 거의 200여호나 됐다.”

당시 왜군의 수탈 상황과 함께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왜군에 부역할 수밖에 없었던 일부 조선 백성의 처지가 잘 드러나 있다.

■ 읍성·진성의 돌을 뽑아 왜성을 쌓다

실록은 또 1595년 12월 죽성리 왜성 상황과 관련해 “진중의 왜인들이 바야흐로 축성 공사를 일으켜 나무를 끌어오고 돌을 실어나르는 왜인이 도로를 메웠으며 옛 (기장)현의 성에서 돌을 반수 이상이나 뽑아내고 또 근처의 암석을 채취해 끊임없이 실어날랐다”고도 기록했다. 왜군들이 죽성리 왜성을 증축하면서 조선 읍성과 수군 진성의 돌을 마구 뽑아다 썼다는 것이다.

왜란 당시 죽성리는 ‘두모포’로 불렸고, 경상좌수영 관할의 수군 만호가 주둔한 두모포 진성이 있었다. 지금의 죽성리 749 일대에 터가 남아 있는 이 진성은 1510년(중종 5년)에 마을 북쪽에서 동해로 흐르는 청강천 주변 평지와 남쪽 구릉을 아우르는 둘레 400m, 높이 3m 규모의 오각형 모양으로 축성됐다. 고려초 왜구의 침략을 막으려 흙으로 쌓았던 것을 돌로 다시 쌓아 보강했는데, 왜란 때 파괴돼, 왜성에 편입된 남쪽 구릉 성벽 등 일부만 남아 있다. 왜란이 끝난 뒤 1629년(인조 7년) 이 성의 수군은 부산 동구 수정동으로 옮겨갔고, 두모포라는 지명은 ‘두호’로 바뀌어 지금 마을 이름으로 남아 있다.

죽성리 왜성 근처 소름요에 있는 ‘무명도공추모비’. 부산/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죽성리 왜성 근처 소름요에 있는 ‘무명도공추모비’. 부산/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죽성리 산 52-1 일대 죽성리 왜성은 죽성(두모포)만 서쪽의 서답골을 끼고 있는 두 개의 구릉을 중심으로 남쪽 높은 구릉(해발 64m)에 본성을 쌓고, 북쪽 낮은 구릉(해발 45m)에 본성 방어를 위한 외성을 두른 형태였다. 여기에 다시 본성과 외성의 서쪽 성벽 밖에 너비 7m 이상 구덩이(해자)를 길게 파 방어망을 강화했다.

성벽은 주로 화강암을 써서 70도 정도 경사지게 비스듬히 쌓았는데, 외성 일부 구간에서 수직으로 축조된 성벽이 드러나 이곳이 애초 조선 수군의 두모포 진성 남쪽 구간인 것으로 확인됐다. 왜군들이 조선의 진성 일부 구간을 편입시켜 왜성을 축조한 사례다. 왜성과 우리 고유성의 차이를 비교해볼 수 있는 곳이다.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은 “죽성리 왜성은 청강천의 자연지형과 해자를 통해 북서쪽의 외곽 방어망을 철통같이 하면서 동쪽으로 죽성만 포구를 감싸안은 해안 요새로 보인다. 또 기존 조선 수군의 거점을 십분 활용하면서도 그 거점을 파괴하는 이중효과까지 노렸다”라고 평가했다.

부산 복천박물관은 2002년 도로개설 구간에 포함된 본성 북쪽의 외성 일부분을 발굴조사했다. 여기서 띠 모양의 성곽터(4개)에 ‘스리바치’라는 일본 전국시대 조리기구와 상감청자·백자·도자 파편 등이 출토됐다.

죽성리 왜성의 외성에 편입돼 남은 조선시대 두모포진성의 성벽 일부 . 부산/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죽성리 왜성의 외성에 편입돼 남은 조선시대 두모포진성의 성벽 일부 . 부산/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본성에서 가장 높은 제1곽에 전투지휘소가 있던 천수대가 있고, 그 아랫쪽으로 3단에 걸쳐 6개의 평평한 성곽을 둘러 출입구를 통해 서로 연결시켰다. 석축둘레는 960m, 잔존 성벽 높이는 4~5m 가량 된다. 천수대가 있는 제1곽의 서북·서남쪽과 동북쪽 모서리 부분엔 기존 성벽 밖에 다시 성벽을 덧쌓은 흔적이 남아있다.

이 왜성은 왜란 초기 제3군을 지휘했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와 그의 아버지 구로다 요시타카(黑田孝高)가 3만3000명을 동원해 쌓은 성이다. 1593년 6월 이미 기본시설이 완성됐고, 명과의 강화교섭에 따라 1595년 6월 인근 임랑포와 서생포 왜성의 병력이 철수하게 되면서 서생포왜성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곳으로 옮겨 왔다. 이즈음 동해 연안 최전선으로 남게 된 왜성으로서 대규모 증개축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나 팀장은 “성벽을 덧쌓은 이유가 기존 성곽을 증축하려는 것이었는지 성벽을 보수·보강하려는 것이었는지와 정확한 시기 등에 대해선 보다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죽성리 왜성은 본성 일대가 1963년 1월 국가문화재인 사적(52호)으로 지정됐다가 99년 3월 지방문화재인 부산시 기념물(48호)로 격하됐다. 근처 봉대산 꼭대기에 고려시대(985년)에 세워져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남산봉수대(부산시 문화재자료 2호)가 있다. 죽성리 두호마을은 조선 후기 고산 윤선도가 6년간 유배생활을 한 곳이기도 하다.

서답골·세답골 도공들 끌려간 길
일본 사학자들이 들려줘 알게돼
바다 보이는 죽성리 가마터 쪽에
‘무명도공추모비’ 세워 매년 헌화

■고리원전 이주단지에서 확인된 왜성 유적

2001년 중앙문화재연구원은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 일대 고리원전 주민 이주단지 예정터에서 발굴조사를 벌여 왜성 성곽터(3개)와 건물을 세우고 구덩이를 파냈던 흔적 등을 기와·도자기 파편 등의 유물과 함께 확인했다. 이 곳은 인근에 있는 고리원전의 추가 건설에 따라 장안읍 효암리 주민 50여가구가 집단 이주한 곳인데, 이주단지 터 조성 전 사전 지표조사에서 왜성 터 유구가 확인돼 발굴조사가 이뤄졌고, 임랑포 왜성 외곽부의 성터가 드러난 것이다.

임랑포 왜성은 장안읍 임랑리 산51, 방모산 동남쪽 끝자락의 비교적 높은 구릉(해발 70m)에 본성을 쌓고, 남쪽 동해남부선 철길 건너 좌광천 쪽으로 돌출한 낮은 구릉(해발 24m)과 평지에 외성을 두른 형태였다. 하천과 바다를 끼고 산지 공간과 아랫쪽 평지 공간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구축한 왜군의 해안 기지였다.

본성에서 가장 높은 제1곽 북동쪽엔 전투지휘소 터인 천수대가 남아있고, ㄴ자 모양으로 북쪽과 북동쪽에 각각 사다리꼴 평면 성곽이 돌출해 있다. 이들 성곽 끝엔 깊게 판 구덩이로 방모산 줄기를 끊어 배후 방어력을 높였다.

임랑포 왜성의 본성 외곽터. 부산/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임랑포 왜성의 본성 외곽터. 부산/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이주단지에 있던 외곽부 성은 고도가 높지 않고 임랑포 앞바다와 접해 있으나 해안 쪽으로 전망이 좋고 비교적 급경사를 이뤄 방어에도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지금은 철도와 도로 건설, 이주단지 조성 등으로 인해 대부분 파괴되고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임랑포 왜성은 왜란 초기 제4군을 지휘해 울산 방면을 거쳐 강원도 쪽을 공격하며 악명을 떨친 모리 요시나리, 시마즈 타다토요(島津忠豊), 이토 스게타카(伊東祐兵), 다카하시 모토타네(高橋元種), 아키쓰키 다네나가(秋月種長) 등 5명의 장수가 쌓아 주둔한 곳으로 알려졌다. 특히 모리 요시나리는 정유재란 때 경남 사천 선진리 왜성에서도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등과 함께 주둔하면서 숱한 사기장과 장인들을 일본에 끌고갔다.

실록은 1594년 4월14일치에 비변사 보고를 통해 “서생포·임랑포에 있는 적병들이 번번이 수로로 울산과 태화 사이를 침범해 우리 군사가 그곳으로 달려가게 한 뒤에 적들은 몰래 육로를 이용해 경주로 나오곤 하니 술수가 대단하다”고 기록했다. 왜군들이 이 왜성을 요충지로 삼아 어떤 구실을 했는지 알 수 있다.

현재 이 왜성은 본성 일대조차 문화재나 공원구역 지정 등 어떤 보호장치도 없이 방치돼, 대부분이 잡목과 수풀 더미에 묻히고 주변의 무분별한 개발로 훼손되고 있어 전문가가 아니면 알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임랑포 왜성 본성에서 바라본 임랑포 바다 전경. 왼쪽으로 고리원전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부산/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임랑포 왜성 본성에서 바라본 임랑포 바다 전경. 왼쪽으로 고리원전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부산/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나 팀장은 “성의 규모가 비교적 작지만 성곽과 해자, 왜성의 본 모습을 알 수 있는 여러 시설물의 기초가 아직 잘 남아 있는 편이다. 더 이상 훼손을 막아 왜성 축성사를 이해하는 학술자료로서는 물론 아픈 민족사의 현장이라는 가치로 볼 때도 보존할 필요성은 충분하다”고 지적했다.

죽성리 왜성 주소 : 부산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산 52-1 일대. 근처 관광명소: 황학대(학바위), 어사암(매바위), 죽성성당(드라마 ‘드림’ 촬영지), 죽성리해송과 국수당, 윤선도 거처, 횟집촌 등

임랑포 왜성 주소 : 부산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 산51 일대. 근처 관광명소 : 임랑해수욕장, 임랑봉수대, 장안사 계곡, 달음산 등

글·사진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도움말 :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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