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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회일반

보도 통제·방청 제한…법정 안팎 공권력 장벽

등록 :2010-01-03 19:08

김근태 전 민청련 의장(왼쪽)이 1988년 김천교도소를 나서며 부인 인재근씨와 함께 “양심수를 전원 석방하라”고 외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근태 전 민청련 의장(왼쪽)이 1988년 김천교도소를 나서며 부인 인재근씨와 함께 “양심수를 전원 석방하라”고 외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임산부까지 실신시킨 ‘살벌한 방청방해’
적나라한 고문 진술에 법정은 눈물바다
‘방학중 선고 완결’ 위해 초고속 1심 진행




한홍구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
34. 김근태 고문사건과 사법부 (3)

각본에 따른 방청제한

1985년 12월19일 오전 10시 서울형사지방법원 118호 법정에서는 마침내 김근태 전 민청련 의장의 1차 공판이 서울형사지법 합의 11부(재판장 서성, 배석 김희근, 여상훈) 심리로 열렸다. 재판은 처음부터 난장판이었다. 재판부는 법정이 협소하다는 이유로 방청권을 발행하여 가족과 민주인사들의 재판방청을 사실상 방해했다. 방청권을 가족에 1장, 일반 방청객에게 20장 내외로 한정한 것은 안기부의 공판대책을 충실하게 따른 것이었다. 그나마 방청권을 받고 법정에 들어온 사람 중 절반은 안기부나 치안본부에서 나온 기관원들이었다. 안기부에는 이들이 올린 공판상황보고가 남아 있다. 이 보고서 중 ‘관련 동향’ 항목을 보면 “08:00 소란책동 예상자 문익환(민민련 의장), 계훈제(민민련 부의장), 김정남(민민련 회원), 김현숙(민청련 회원), 임채영(명동성당 청년회원) 등 6명 법정 주변 차단” “08:00 공판정 내 외곽에 경찰병력 3개 중대 (12/450) 배치, 검문검색” 등이 적혀 있어 앞의 단계별 처리계획대로 ‘법정 소란’을 방지하기 위해 경찰병력이 배치되고, ‘소란책동 예상자’의 방청을 제한하는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공판은 재판부의 인정심문에 이어 변호인들이 방청제한에 항의하면서 여러 차례 중단되었다. 방청석에서는 누군가가 “김근태씨 부인도 방청제한으로 이 자리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고 거세게 항의했다. 공안검사 김원치가 5분가량 공소사실 요지를 낭독하는 동안 방청권을 얻지 못해 법정에 들어오지 못한 가족과 친지, 민청련 회원 30여명은 법정 입구에서 손으로 문을 치며 “김근태, 재판받지 말라!”고 외치기도 했다. 변호인이 재차 강력히 항의하여 부인 인재근 등 7~8명이 출입문을 열고 겨우 들어올 수 있었다.

통곡의 법정

재판절차를 둘러싸고 검사와 변호인의 공방이 있자, 서성 재판장은 뜻밖에도 피고인에게 “재판에 들어가기 전에 재판진행에 대하여 피고인의 의견을 진술”하라고 말했다. 김근태는 재판절차보다 더 급박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있다며 “본인은 지난 9월 한 달 동안 남영동에 있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참혹한 고문을 당했습니다”라고 입을 열었다. 검사석의 김원치가 벌떡 일어나 황급히 제지했지만 김근태는 말을 이어갔다. 김근태는 어지러운 듯 난간을 붙들고 숨을 몰아쉬면서 변호인 접견제한과 딱지 탈취 사건에 대해 차근차근 얘기했다. 법정은 숙연해졌다. 그가 남영동에서 당한 고문 내용에 대해 본격적으로 진술하려 하자 검사는 다시 제지했고 방청석에서는 “놔둬!” “도둑놈들”이라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김근태가 전기고문을 당하면서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왔다고 말할 때 방청석에서는 울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고문을 당하면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노래를 속으로 불렀다고 말할 때는 교도관들조차 눈시울을 붉혔고 방청석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김근태가 고문자들이 시집간 딸 걱정하는 소리에 인간적인 절망에 몸서리쳤다고 했을 때, 방청석의 울음은 통곡으로 변했다.


김근태의 모두진술이 끝난 후, 검사는 사실심리를 진행하자고 했다. 재판장도 공소내용의 첫 번째 항목이라도 오늘 진행하자고 했지만, 김근태는 변호사와 공소내용에 대해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을 정도로 방어권이 침해당했다고 주장했다. 변호인도 고문에 의해 공소가 제기된 이 사건의 공소사실은 당연히 무효라며 사실심리의 연기를 주장했다.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여 1986년 1월9일로 재판기일을 정하면서 1차 공판을 마쳤다.

공판대책의 강화

1차 공판에서 김근태가 행한 고문폭로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자 안기부와 검찰은 공판대책을 강화하였다. 1986년 1월6일자의 <민청련 김근태 인권문제 관련 관계기관대책회의 자료>라는 보고서는 ‘개황’ 항목에서 “지난 12.19 1심 1회 공판 시 법정진술에서 경찰 조사기간 중 고문 및 가혹행위를 받았다고 주장, 이를 계기로 재야, 종교, 구속자 가족 등 문제권이 연합, 고문 빙자 대정부 투쟁을 전개하는 일방, 공판정에서 의도적으로 소란 등 시비, 공판을 방해함은 물론 공판정을 정치선전장화하기 위해 획책하고 있고 해외 문제 교포, 국외 인권단체 및 조야 등에 왜곡전파하여 인권문제 위요, 국익을 저해하고 있다”고 서술했다. 보고서는 이에 따른 예상 문제점으로 “구속자 가족, 문제권과 연계, 김근태 구명운동 전개”와 “고문수사 시비, 의도적 공판 방해 자행”을 들었다. 안기부는 이에 대해 “재야 문제권의 김근태 등 고문시비 관련 불순행사 철저 와해” “구속자 가족 관리 철저, 구명운동 등 저지” “문제권 대정부 투쟁 강력 대처로 초동단계 와해” “철저한 공판대책 수립 대처” “해외 문제인물의 국익저해 등 불순활동 철저 봉쇄” “국내 인권문제 관련 해외홍보 철저”라는 대책을 세웠다.

안기부 보고서에 따르면 2차 공판이 있는 1월9일에는 미국 교회협의회와 국제인권위 변호사협회의 지원을 받는 피카트 변호사, 1월23일에는 국제인권변호사협회 총무 에미 영이 3차 공판을 방청하기 위해 내한할 예정으로 되어있었다. 김근태는 <남영동>에서 자신의 공판을 방청하러 온 미국인 변호사 중 한 명은 자칭 미국 대사관 직원이라 하는 건장한 사내들에 의해 사실상 끌려갔다고 회고했다. “해외 문제인물의 국익저해 등 불순활동 철저 봉쇄”라는 방침의 확실한 집행이었다. 그가 끌려간 곳은 공안연구소장 김경한 검사(이명박 정부의 첫 법무부 장관) 앞이었다고 한다. 김경한은 김근태가 “남영동에 있을 때 변호인 접견이나 조력을 요청하지 않았다. 고문받지 않았다. 만일 고문받은 사실이 판사에 의해 인정되면 석방될 것이다.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물론 자기의 외래의사의 진료와 치료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아프지 않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근태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 뻔뻔한 거짓말 중에 그래도 꼭 하나 사실과 맞는 이야기가 있다”며, 자신이 “변호인의 접견이나 조력을 요청”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만약 남영동에서 고문을 당하면서 변호사를 불러달라고 했더라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한심한 작자라고 구박받으면서 한 차례 더 전기, 물고문”을 당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방청객 연행과 인재근의 졸도

안기부가 한층 더 철저한 공판대책을 세운 2차 공판에서는 더 큰 소동이 벌어졌다. 재판부는 35장의 방청권을 발부했는데, 방청권을 소지한 사람들도 20명만이 시경기동대 형사들의 이중삼중의 경비하에 몸수색을 당하고서야 재판정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사람들은 “무엇이 무서워서 방청을 방해하느냐” “방청권이 있는데 왜 못 들어가게 하느냐” “당신들은 법원 정리도 아니고 도대체 누구냐”며 거칠게 항의했다. 항의가 거세지자 형사들은 힘으로 방청객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좁은 복도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김근태의 부인 인재근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가족 친지들이 인재근을 둘러싸고 보호하고 있는 동안에도 형사들은 출구 쪽으로 방청객들을 밀어붙였다. 그 바람에 사람이 깔리고 격투가 벌어져 “악” “사람 살려”등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갑자기 형사들이 길을 터주며 방청권 소지자만 한 사람씩 들여보냈지만, 연행대기조는 차례로 이들을 닭장차에 실었다. 30여분의 실랑이 끝에 문익환, 곽태영, 인재근, 이해찬 등 16명이 연행되었다. 연행도중 사건 관련 수배자 이범영의 부인으로 임신 8개월이던 김설희가 실신하여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연행자들은 그날 늦게 재판이 끝나고서야 석방될 수 있었다.

초고속 재판

재판은 매주 목요일 꼬박꼬박 진행되다가 8차 공판부터는 주 2회씩 열렸다. 안기부의 <관계기관대책회의 자료>에 나타난 대로 “2월 중 1심 선고 완결”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공판에는 많은 기자들이 참석하여 열심히 메모하였지만, 안기부의 공판대책에는 “언론 축소보도로 자극배제”라는 항목이 들어 있었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들춰본 옛 신문을 보면 정말 우표딱지만하게 공판이 열렸다는 사실만 보도했을 뿐이다. 고문사실이 사회적 쟁점이 되자 정부는 어용보도기관인 <한국방송>과 <연합통신>을 동원하여 사실을 왜곡하고 날조함으로써 사전에 관제여론재판을 강행하려 시도했다. 이런 용공조작사건에서 공통된 점은 방송 뉴스나 신문 기사에 주요 혐의사실이라고 나와 있는 것들 중에는 공소장에서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것이 자주 있다는 것이다. 재판장인 서성 부장판사조차 공판정에서 이 사건이 신문, 방송에 보도된 것과는 다르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2월27일에 열린 11차 공판에서 김근태는 최후진술을 했다. 그는 “이제 본인은 징역을 삽니다”라는 말로 자신에게 유죄판결이 내릴 것이라는 점을 당연시했다. 그 징역은 개인적으로는 “쇠창살 너머 하늘의 별에서 윤동주 시인의 눈물을 만나며” “고문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달래며 회복하는 과정”인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광주의 통곡을 들으며 민주화를 꿈꾸는 과정이었다. 징역을 살러 가며 김근태는 자신은 “본 사건을 시대의 불행 중 하나라고 봅니다”라며 “이 공판에 참여하여 고충과 어려움을 겪어온 재판부, 변호인들, 검찰관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인의 불행일 뿐 아니라 이 시대 우리 사회의 비극으로서 우리가 같은 공감대를 갖고 통곡해야 마땅하다고 봅니다”라고 말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재판부와 검찰과는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어떤 ‘공감대’를 가져본 적이 없다. 통곡은 계속되고 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 매주 화요일 실리던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 - 회한과 오욕의 역사’가 이번주부터 매주 월요일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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