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1976년 10월24일 <워싱턴 포스트>는 특종 보도를 한다. “리처드 해나 캘리포니아주 의원, 오토 패스먼 하원 세출위원장, 토머스 오닐 하원 의장 등 90여명의 의원들이 뇌물에 연루되었다.” 이른바 ‘코리아 게이트’가 대서특필된다. “박동선 등 한국인들이 한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50만달러에서 100만달러를 미국 의원들에게 제공해 매수공작을 벌였다.” 또한 “한국인 김한조가 박정희 대통령의 비밀지령을 받아, 미국에서 ‘주한미군 철수’의 위험성을 환기시키는 등 여론을 조성하고, 미 대통령의 한국 방문과 박 대통령의 미국 언론 인터뷰도 주선했다”고 폭로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 내 반한 정서가 고조되며 양국관계는 경색되었으며, 미 언론은 닉슨 대통령이 물러났던 ‘워터게이트 사건’에 빗대어 ‘코리아 게이트’라고 불렀다.

훗날 박동선의 증언을 보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연락이 와서 가 보니까 만나자마자 어디 간다 얘기도 안 하고 데리고 가는데,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이었다”. 박 대통령은 “한국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조를 늘리는 작업을 해달라”며 방법도 제시했다. “미국은 남아도는 쌀의 처치 곤란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미스터 박이 책임지고 미국에서 쌀을 수입하라. 이 쌀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엄청난 중개 수수료를 워싱턴 정가를 움직이는 데 써라. 이 돈은 절대 공화당이나 중앙정보부나 어느 기관에서도 ‘터치’ 못 하도록 해주겠다.”

박동선, 미륭상사의 막내아들로 조지타운대학 최초의 외국인 학생회장이었다. 미국과 남미의 명문 출신들과의 인맥을 발판 삼아 ‘조지타운클럽’을 만들었다. 워싱턴 디시에 있는 캠퍼스 주변에 있는 목조 2층 저택의 아래층 거실이 클럽인데, 크고 작은 소파가 주변에 둘러 있어 20~30명이 옹기종기 앉아 담소를 나누기에 딱 좋은 공간이었다. 한국의 골동품도 즐비한 그곳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작은 파티가 열렸다.

김한조, 미국에서 화장품 회사 ‘존앤비디’를 설립해 크게 성공한 젊은 기업인이다. 그는 19년 만에 귀국, 황재경 목사의 주선으로 1975년 8월14일 박정희를 만난다. “…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문제에 지나치게 내정 간섭을 한다. <뉴욕 타임스>나 <워싱턴 포스트> 같은 언론들이 한국에 대해 너무 가혹하리만큼 비판을 한다. 김 박사는 미국의 신문, 텔레비전에도 자주 글을 쓰거나 출연하는데 그때 기회를 잘 이용하라.” 육영수도 한마디 건넸다. “돈도 없이 경부고속도로 잘 만들어놨지요. 주한미군 철수한다고 하니까 투자를 안 해요. 내일 광복절 오후에 서울시청에서 지하철 개통식 해요. 꼭 오세요. 개통식이 끝난 뒤 청와대에서 다시 만납시다.” 그러나 이튿날 육영수는 불귀의 몸이 되었다.

박정희가 박동선을 통해서 로비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닉슨 독트린’(1969년 7월)의 발표다. 71년 미국이 실제로 주한미군 1개 사단의 철수를 시작하면서, 한국군 현대화(핵개발) 계획을 위한 군사원조는 의회의 예산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태도를 보이자 한국 정부는 미 의회를 설득하기 위해 뇌물을 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다 75년 미 의회에서 ‘박정희 정부가 의회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활동을 했다’는 폭로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해 6월 도널드 엠 프레이저 의원 발의에 의한 하원의 한국에 대한 인권청문회에서, 전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던 이재현이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단지 미국 내에서 반한파에 대한 인권 탄압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내 반박정희 여론과 활동을 무마하기 위해 대규모 회유·매수·협박·공작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김상근이 여기에 가세한다. 박동선은 화살을 피해 한국으로 귀국한 뒤 다시 영국으로 피신한다.

1995년 10월 에스비에스(SBS) 정치 드라마 <코리아 게이트>(고석만 연출, 이영신 극본)에서는 통사적 개념에서 사건의 전 과정을 대부분 담았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청와대 도청 사실은 ‘코리아 게이트 사건’의 분기점이 된다. 청와대는 도청 사실을 눈치채고 백방으로 수색하지만 근거를 잡지 못한다. 청와대 집무실과 거실의 가구와 도배를 모두 바꾸는 소동을 벌여도 잡지 못하다가, 우연히 사직공원 언덕에 서 있는 소형 탑차를 발견하고 덮친다. 미 중앙정보국의 도청감지 차량으로 밝혀진다. 직선거리 2㎞, 청와대 거실 유리창에 부착한 진동감지장치를 원격 조정하는 것이다. 이런 경로로 박정희 정권의 비민주적 행태가 백일하에 드러나자 미국은 한국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 비판하고, 결정적으로 박정희가 핵 개발을 하고 있다는 의혹까지 드러나면서 한·미 간의 갈등은 깊어진다. 이때의 핵 개발 의혹은 대동강까지 도달하는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박동선 사건은 철저하게 보도통제하고, 도청 사건에 대한 관제데모를 시켜 반미감정을 조장하기에 이른다. 도덕정치를 표방한 카터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76년 11월. 국내에 ‘코리아 게이트’가 처음 보도된 것은 76년 12월29일이다.

‘인권대통령’ 카터는 ‘코리아 게이트’에 대해 중앙정보국, 연방수사국(FBI), 국가안보국(NSA)과 국무부·법무부 등을 총동원하여 수사를 하게 한다. 미국 하원에서도 국제관계 소위원회 즉 ‘프레이저위원회’가 구성되어 청문회를 열기 시작한다. 그리고 미 연방 대배심원은 박동선을 뇌물 제공과 선거자금 불법 제공 등의 혐의로 기소한다. 5일 뒤에는 김한조도 위증과 매수음모라는 혐의로 기소 후 구속된다. 그리고 카터는 박정희와 협의 없이 ‘주한미군 철수’를 발표해 버린다.

박정희는 77년 2월 연두순시에서 수위를 높여 “국가 존망의 어려운 시국에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항간에서는 한국의 인권을 탓하지만 3500만이 생존해야 하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 최고의 인권 옹호라고 본다. 이러한 사정도 모르면서 외국인들은 함부로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 효과가 있었을까. 카터는 주한미군 철수를 잠시 유보하고, 영국에 숨어 있는 박동선의 송환만 요구한다.

1995년 10월 프리랜서로 첫 작품 연출에스비에스 창사특집 ‘코리아 게이트’친정 엠비시도 ‘제4공화국’ 맞불 작전1976년 10월 ‘워싱턴 포스트’ 폭로 파문‘박동선·김한조 등 미 의원 90명 매수’‘71년 주한미군 철수 시작에 위기의식’박정희 “미 의회 설득하라” 비밀 지령역대 최대 블록버스터급 미국 현지촬영하원 본회의장·프레이저 청문회장 등첫회 ‘79년 10월26일 박정희 하루’ 재연김재규 독백 “야수의 마음으로” 시작시청률 45% 압도했으나 20회 조기종영

그런데 ‘꿩 대신 닭’이라고 중앙정보부장 출신 김형욱이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한다. 박정희에게 버림받은 김형욱은 유신정권을 고발한다. 김형욱은 ‘코리아 게이트’가 터진 뒤 77년 6월2일 <뉴욕 타임스>와의 기자회견을 통해 박정희를 비판하고, 미 의회 청문회에도 나가 자신이 중앙정보부장 시절 했던 일들을 밝히고, 회고록까지 펴내 박정희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김형욱은 “지금 한국 정부에서는 나를 죽이려고 하고 있다. 마치 예전에 일본에 망명했다가 중국에서 살해당한 김옥균이 된 입장이다. 하지만 난 로마를 구원하기 위하여 시저를 죽인 브루투스의 용기로 임하겠다”. 더 중요한 것은 백악관 태스크포스팀이 김형욱의 폭로를 바탕으로 정리한 ‘프레이저 보고서’였다.

카터 대통령은 경색된 한-미 관계를 해결해 보겠다고 정상회담까지 제안했지만 박정희는 카터의 말을 듣지 않았고, 카터는 화가 날 대로 나버렸다. 박정희도 끝까지 버틸 수는 없었다. 유신 개발독재의 한계가 분명해 보일 때였다. 여기에 2차 석유파동이 터지면서 한국경제가 큰 타격을 입던 시기였다. ‘핵 포기’를 강압했다. 결국 박정희는 미국과 타협했다.

1976년 터진 ‘코리아 게이트’는 한·미 타협에 따라 재미 로비스트 박동선(맨오른쪽)이 1978년 2월 영국 도피 10개월 만에 미국 상·하원 윤리위원회에 출석해 로
1976년 터진 ‘코리아 게이트’는 한·미 타협에 따라 재미 로비스트 박동선(맨오른쪽)이 1978년 2월 영국 도피 10개월 만에 미국 상·하원 윤리위원회에 출석해 로

1995년 10월 드라마 <코리아 게이트>는 78년 박동선이 출석해 증언하는 장면을 실제로 미 의회 청문회장에서 현지 촬영했다. ‘에스비에스 매거진’ 제공
1995년 10월 드라마 <코리아 게이트>는 78년 박동선이 출석해 증언하는 장면을 실제로 미 의회 청문회장에서 현지 촬영했다. ‘에스비에스 매거진’ 제공

타협 조건으로는, ‘박동선은 한국 정부와 아무런 공식관계가 없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하는 것, 정부의 위신을 보호하는 것, 한국민의 한 사람인 박동선을 보호하는 것’ 등을 내걸고 한·미 양국은 외교 경로를 통해 문제 해결을 도모한다. 박동선이 자유의사에 따라 미 의회 조사위원회에서 증언하도록 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돌파구가 되었다. 거듭 미국이 식량차관 삭감과 미군 철수로 압박하자 77년말 박동선은 미 정부로부터 ‘전면사면권’을 받는 조건으로 송환에 응한다. 박동선은 78년 2월 미 상하원 윤리위원회에서 ‘32명의 의원에게 85만달러라는 거액의 자금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하지만 박동선은 검사가 제시하는 증거들을 모르쇠로 일관한다. 이 사건은 미 하원에서는 78년 9월29일, 상원에서는 78년 10월16일 각각 완전 종결되었으며, 프레이저조사위원회도 78년 10월31일 활동을 끝냈다. 그리고 78년 12월31일 양국은 합의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미 연방지방법원은 79년 8월16일 법무성의 요청에 따라 박동선에 대한 기소를 철회한다. 이로써 박동선 사건은 공식 종결되었다.

‘코리아 게이트’의 재점화를 알린 1977년 6월 2일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뉴욕 타임스> 기자회견 장면.
‘코리아 게이트’의 재점화를 알린 1977년 6월 2일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뉴욕 타임스> 기자회견 장면.

드라마 <코리아 게이트>에서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으로 탤런트 조경환이 등장했다. ‘에스비에스 매거진’ 제공
드라마 <코리아 게이트>에서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으로 탤런트 조경환이 등장했다. ‘에스비에스 매거진’ 제공

그러나 79년 10월초 ‘김형욱 파리 증발 사건’이 터지면서 ‘코리아 게이트’는 국내에서 다시 점화되었다. 김형욱 증발에 대한 의혹과 추측이 난무했다.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설’은 파리 살해 뒤 주검을 외교행랑에 담아 와 박정희에게 확인시켰다는 ‘설’과, 양계장 파쇄기 속에 넣었다는 ‘설’이다. 김형욱 살해를 명령한 중앙정보부장은 김재규다. 김형욱 증발 뒤 한달도 못 되어 김재규는 ‘10·26’을 일으켰다.

드라마 <코리아 게이트>는 ‘10·26’부터 재연한 뒤 유신시대부터 신군부 쿠데타와 5공 독재, 이에 항거한 6월항쟁까지를 ‘코리아 게이트’로 분해한 작품이다. 95년 10월21일 첫 방송이 되었다. 김재규의 독백 “야수의 마음으로” 시작한 드라마는 10·26부터 12·12와 5·18을 관통하여 95년의 한-미 관계를 묘사하고, 전두환과 노태우가 법정에 서는 것을 보게 하였다.

에스비에스 드라마 <코리아 게이트>에서 1979년 10.26 직후 보안사령관으로 등장하는 전두환. 애초 캐스팅 후보였던 박용식이 엠비시 <제4공화국>에 출연하면서 정종준이 새로 발탁되기도 했다. ‘에스비에스 매거진’ 제공
에스비에스 드라마 <코리아 게이트>에서 1979년 10.26 직후 보안사령관으로 등장하는 전두환. 애초 캐스팅 후보였던 박용식이 엠비시 <제4공화국>에 출연하면서 정종준이 새로 발탁되기도 했다. ‘에스비에스 매거진’ 제공

95년 7월 에스비에스는 창사 5돌 특별기획으로 <코리아 게이트> 제작을 전격 발표한다. 그해 4월6일자로 문화방송(엠비시)에서 사퇴한 뒤 나의 프리랜서 첫 작품이다. 문화방송은 뒤늦게 대응 기획으로 <제4공화국>(연출 최종수)을 서두른다. 양사는 치열한 경쟁에 돌입하였고, 언론은 제철 만난 듯 두 작품을 비교하는 기사로 날마다 문화면을 장식했다.

국내의 신경전을 뒤로하고 <코리아 게이트>는 미국 현지 촬영에 나섰다. 촬영 규모부터 대상, 지역, 내용 등이 실로 블록버스터급이었다. 최초로 미 의회 본회의장을 비롯해 프레이저 청문회장, 미 연방법원 재판정, 여러명의 상·하원 의원 사무실, 박동선의 클럽, 김한조의 화장품 공장, 김형욱의 집 등 실제 장소에서 촬영을 했고 로비스트들의 행적을 찾아 찍었다. 현지 코디네이터와 에스비에스 직원들의 눈부신 활약이 돋보였다. 그들을 칭찬하자 “미국은 지역별 원칙에만 맞추면 무슨 일이든 잘된다”고들 했다. 의미 있다. 뉴욕은 스태프 구성에 현지 노조원 채용이 의무화되어 있다. 로비스트들도 미 상공부에 허가를 받으면 공공연하게 활동한다. 다만 허가조건이 까다롭다. 미국 정치계의 이면, 로비스트들의 활동 등의 사실적 묘사에 최선을 다했다. 에피소드도 넘쳤다. 미국에 있는 김형욱 가족도 추적했다. 뒷날 곡기를 끊어 숨진 김한조의 항변도, 흑석동 독거 시절도 인터뷰로 담았다. 박동선과 김한조가 후원했던 언론 장학생, 지금은 고위층 저명인사가 된 사람들도 만났다.

드라마 <코리아 게이트>는 조경환, 심양홍, 김미숙, 황신혜, 전양자, 독고영재, 고두심, 김흥기 그 외에도 수많은 톱스타들의 경연장이었다.

드라마 <코리아 게이트>는 첫회에서  대통령 박정희의 마지막 공식 행사인 삽교호 방조제 준공식(사진) 장면 등 1979년 10월26일 하루를 사실대로 재연했다. ‘에스비에스 매거진’ 제공
드라마 <코리아 게이트>는 첫회에서 대통령 박정희의 마지막 공식 행사인 삽교호 방조제 준공식(사진) 장면 등 1979년 10월26일 하루를 사실대로 재연했다. ‘에스비에스 매거진’ 제공

드라마 <코리아 게이트> 첫회 ‘10·26’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김흥기)가 박정희를 향해 총격을 하고 있다. ‘에스비에스 매거진’ 제공
드라마 <코리아 게이트> 첫회 ‘10·26’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김흥기)가 박정희를 향해 총격을 하고 있다. ‘에스비에스 매거진’ 제공

첫회가 나갔다. 시청률 45%로 경쟁작을 압도했다. 독일 축구의 패배에 행복해하는 네덜란드인을 일컬어 ‘샤덴프로이데 현상’이라 한다. 타인의 고통을 보고 즐기는 사악한 쾌락. 완승을 하고도 씁쓸했다. <코리아 게이트>는 36회 예정이었지만 20회로 중단되었다. 배경엔 여러 가지 정치적 함수가 읽힌다. <제4공화국>도 비슷한 시기에 종영했다. 에스비에스의 간부는 정중하게 중단을 통보했고, 우리 제작진은 그대로 받아들였다. 에스비에스로선 소기의 목적을 다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간의 편년체 정치 드라마에서 탈피한 ‘통사적 개념’의 구성이 <코리아 게이트>의 성공 요인이었다고 본다. 한-미 교류사는 신미양요에서부터 미-소 정상회담, 통역정치의 ‘하지 시대’와 피를 부른 ‘한국전쟁’, 그리고 ‘코리아 게이트’를 거쳐 오늘의 ‘북핵 시대’에 이르렀다.

<코리아 게이트>는 말한다. ‘그때 무엇이 옳았는가 증명하는 실험은 계속될 것이다.’ 뒷날 미국 피디협회의 초청을 받아 로스앤젤레스의 한 무대에 올랐다. “한국에서 드라마를 통해 2명의 대통령을 감옥에 보낸 피디를 소개합니다.”

집필 고석만/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