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문재인 대통령이 러시아를 국빈방문했다. 과거 한-러 정상회담에서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러시아 극동 내 남-북-러 삼각협력이 주요 의제로 등장했다. 남-북-러 삼각협력은 북-중-러 삼각협력, 한-러, 중-러, 러-일 양자협력 등과 긴밀히 연동된다. 러시아 극동의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중국과 4000㎞가 넘는 국경을 맞대고, 북한 나진항으로 이어지는 하산 전망대에서 지척인 양 두만강이 내려다보이고, 사할린과 쿠릴을 매개로 일본과 인접한 러시아 극동은 남-북-중-일-러 사이 양자적, 다자적 접촉을 필연으로 만드는 곳이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러시아 극동 연구팀’의 답사(6.14~19)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작했다. 연구팀은 러시아극동역사연구소와 ‘러시아 극동의 작은 동아시아’(Small East Asia in Russian Far East)라는 주제 아래 인문사회분야로는 최초로 한-러 공동연구를 진행 중이다. 러시아 극동에는 6만여명의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 (제재로 본국 송환 위기에 처해 있지만) 약 1만명의 북한 노동자, 조선족을 포함한 수많은 중국 노동자가 살고 있다. 쿠릴 영토분쟁으로 일본도 사활을 건 지역이다. ‘남-북-중-일-러 간 공생/경합의 축소판’이라 할 이 ‘작은 동아시아’의 존재는 초국가적, 초국경적 만남을 지정학의 핵심으로 삼는 러시아 극동의 특성을 생생히 되비춰준다.

사람들 사이 만남은 길에서부터 시작된다. 북핵 위기로 남-북-러 삼각협력의 실낱같은 가능성마저 실종된 사이, 러시아와 중국은 프리모리예 1, 프리모리예 2로 협력의 길을 차근차근 닦고 있었다. 연구팀이 이 길을 답사의 주된 루트로 정한 것은 이 때문이다. 프리모리예는 러시아 동부, 프리모르스키 지구와 하바롭스크 지구의 남부 지역이다.

프리모리예 1과 2는 중국 동북3성과 러시아 연해주를 철도, 자동차도로, 항만 등으로 잇는 해륙복합운송루트를 일컫는 이름이다. 프리모리예 1은 ‘중국 하얼빈~쑤이펀허~러시아 포그라니치니(그로데코보)~블라디보스토크·나홋카·보스토치니항’으로, 프리모리예 2는 ‘중국 창춘~지린~훈춘~러시아 크라스키노~포시예트·자루비노항’으로 구성된다. 아직은 일부 구간만 완성된 상태다.

총 2천억루블, 우리 돈으로 3조5천억원이 필요한 이 메가프로젝트가 1991년의 두만강개발계획, 그 확대판인 2005년의 ‘광역두만강개발계획’(Great Tumen Initiative, GTI)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국, 중국, 몽골, 러시아가 참여하고 일본을 옵서버로 둔 지티아이는 북-중-러가 만나는 두만강 삼각지대를 매개로 몽골과 동중국 대륙을 러시아 연해주 및 남북의 환동해 항만과 잇고자 한다. 러-중 양자협력으로 축소된 프리모리예 1, 2의 콘셉트 역시 이와 같다. 바다로의 출구를 확보하고자 하는 중국 동북3성의 요구와, 이름 그대로 바다에 인접한 연해주의 여러 항만을 제공함으로써 아시아태평양 경제권에 확고히 포함되고자 하는 러시아의 이해가 만나 길을 만드는 중이다.

우리 연구팀은 프리모리예 1과 2를 결합해 ‘중국 쑤이펀허~러시아 포그라니치니~크라스키노~자루비노~슬라뱐카~블라디보스토크’로 답사 길을 짰다. 극동의 중-러 간 두 국경 중 ‘훈춘~크라스키노’에 비해 ‘쑤이펀허~포그라니치니’ 구간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곡물터미널이나 리조트 건설 계획으로 최근 주목을 받은 자루비노항이나 슬라뱐카의 상황이 궁금하기도 했다.

쑤이펀허로 가기 위해 인천에서 출발하는 직항편을 이용해 중국 무단장 공항에 내려 1시간 반쯤 버스로 달렸다.

중국 무단장 공항 전경. 왼쪽 셋째가 이문영 교수.
중국 무단장 공항 전경. 왼쪽 셋째가 이문영 교수.

차창 밖으로 중국어와 러시아어가 함께 쓰인 표지판, 길 양편으로 길게 늘어선 대형트럭의 행렬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러 무역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중국 각지에서 러시아로 가는 관광객이 몰려드는 국경도시 쑤이펀허에 도착한 것이다. 변경도시로는 드물게 4성급 호텔이 존재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실제 이 호텔 ‘홀리데이 인 쑤이펀허’는 중-러 국경 표지석과 300m도 안 되는 거리에 있다.

중-러 국경 표지석.
중-러 국경 표지석.

바로 옆에 러시아 상품이 도소매로 거래되는 ‘중-러 호시무역 상품교역센터’와 ‘쑤이펀허 세관’이 있다. 또 ‘러시아 시장’이란 별명이 붙은 중국 재래시장, 중-러 무역 발전을 겨냥해 2009년 만들어진 ‘쑤이펀허 종합보세구’도 인근에 위치한다.

쑤이펀허 세관.
쑤이펀허 세관.

중-러 호시무역 상품교역센터.
중-러 호시무역 상품교역센터.

중국 쑤이펀허와 러시아 포그라니치니 사이 사람과 물자의 이동은 국제열차와 버스가 담당한다. 쑤이펀허 기차역과 그로데코보역, 쑤이펀허 도로여객터미널과 포그라니치니 버스터미널이 짝을 이룬다. 이 열차와 버스를 통해 중국에서 러시아로는 생필품과 경공업 제품이, 러시아에서 중국으로는 목재·석탄·철광석 등의 원자재와 식품류가 수출된다. 관광객과 덩치 큰 원자재는 주로 열차로, 보따리상은 주로 버스를 이용하며, 컨테이너가 탑재된 대형트럭도 한몫을 한다.

쑤이펀허역 전경.
쑤이펀허역 전경.

연구팀은 국제열차를 타고 중-러 국경을 넘었다. 쑤이펀허발은 ‘402’, 포그라니치니발은 ‘401’ 번호를 달고 국경을 넘는다.

쑤이펀허역 포그라니치니행 열차 표시.
쑤이펀허역 포그라니치니행 열차 표시.

열차 한 대에는 6량의 객차가 달려 있고, 한 객차에는 약 100명의 승객이 탈 수 있다. 열차가 출발하는 쑤이펀허 기차역은 무단장 공항보다도 큰 최신식 건물이다. 입구부터 중국 전역에서 온 단체관광객들로 떠들썩하고 혼잡했다. 기다리는 곳은 대리석과 대형 전광판, 뜬금없는 야자수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쑤이펀허역 내부 중국인 단체관광객.
쑤이펀허역 내부 중국인 단체관광객.

쑤이펀허역 내부.
쑤이펀허역 내부.

하지만 현대적 외관과 달리 통관절차는 원시 그 자체였다. 수백명을 헤아리는 승객의 기차표 검사는 오직 하나의 창구에서만 이루어졌고, 사나운 말과 거친 몸싸움으로 적자생존에 성공한 이들만 이 창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가까스로 창구에 이른 우리 연구팀은 외국인 요금이 얼마인지 모른다는 이유로 통과가 거부됐다. 역에서 팔지 않는 기차표를 표에 적힌 것과 다른 금액에 가이드가 대리 구매한지라 알 도리가 없었다. 결국 역 밖의 가이드를 황급히 소환하고서야 간신히 통과할 수 있었다. 이후 여권 심사와 손짐 검색 과정에서도 정글의 법칙은 여전히 적용됐다.

중-러 국경 열차에 가득 탄 중국인들.
중-러 국경 열차에 가득 탄 중국인들.
통관절차처럼 열차도 낡고 좁았다. 하지만 활기가 넘쳤다. 열차는 중국인 관광객들로 가득했고, 러시아인은 몇명뿐이었다. 창밖으로는 거대한 목재를 실은 화물열차가 쉴새없이 지나갔다.

러시아 목재가 중국으로 운송되는 모습.
러시아 목재가 중국으로 운송되는 모습.
쑤이펀허~포그라니치니 구간에서는 열차 바퀴 교체작업도 필요없다. 러시아는 레일 간격이 1520㎜인 광궤. 중국은 1435㎜인 표준궤를 사용하지만, 이 구간에 한해 러시아에도 표준궤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표준궤를 따라 하나의 중국 열차가 출발지마다 402, 401 번호를 번갈아 달고 중-러 사이를 왕복하는 것이다.

쑤이펀허발 포그라니치니행 402호 기차.
쑤이펀허발 포그라니치니행 402호 기차.
울창한 산림을 따라 2시간 남짓 달린 끝에 러시아 포그라니치니 마을의 그로데코보역에 도착했다. 쑤이펀허역과 비교할 수 없이 작고 소박한 외관이다.

러시아 포그라니치니 그로데코보역.
러시아 포그라니치니 그로데코보역.
하지만 무자비한 통관절차는 같았다. 철로에서 역사로 들어가는 문은 역시 단 하나. 그 문으로 한꺼번에 밀려든 수백명의 승객 앞을 우람한 덩치의 러시아 역무원들이 거칠게 막아섰다. 그렇게 사납던 중국인들도 그들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었다. 역무원이 정하는 대로 6~7명 단위로 입장이 허락됐다. 나머지는 부름을 받을 때까지 속수무책으로 철로변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당연히 러시아인 승객이 제일 먼저 부름을 받았다. 적자생존의 무질서를 강요하는 중국식 관료주의와, 적자를 친히 간택해 부조리한 질서를 강요하는 러시아식 관료주의. 다른 듯 닮은 둘이다.

중 동북3성과 러 연해주를 잇는
양국 합작 해륙복합 운송루트
중국은 바다로의 출구 확보 목적
러, 아태 경제권 참여 이익 노려

국경도시 쑤이펀허 중-러 무역 활발
러시아 가는 중국 관광객들 붐벼
거대한 목재 실은 화물열차 왕래

중-러, 기술·경제 타당성 조사 끝내
9월 동방경제포럼서 개발협정 예정
남북관계 개선땐 환동해 항만 이어져
유라시아로 뻗을 평화 플랫폼 기대

필시 사회주의의 산물일 통관절차의 유사성을 제외하면 쑤이펀허와 포그라니치니는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쑤이펀허가 현대적인 역 건물과 세관, 넓은 도로, 호텔이나 보세구, 무역센터 등 중-러 무역에 필요한 인프라를 상당부분 갖추었다면, 포그라니치니는 그렇지 못하다. 그로데코보역 주변에서 포그라니치니 버스터미널 외에 제대로 된 물류기반을 발견할 수 없다. 이 차이는 프리모리예 프로젝트에 대한 중-러의 각기 다른 입장을 대변한다.

동북3성의 물류를 가장 가까운 중국 내 항구인 다롄항을 이용해 중국 내륙이나 인접국가로 운송할 경우, 다롄항까지의 거리만도 1300㎞에 이른다. 하지만 프리모리예 1을 이용할 경우 거리는 절반 이하로 줄어든다. 프리모리예 1의 양 끝점인 쑤이펀허와 보스토치니항 사이가 500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프리모리예 2가 뚫리면 훈춘에서 슬라뱐카항까지는 200㎞밖에 안 된다. 따라서 프리모리예 프로젝트는 중국에 훨씬 절실하다.

반면 러시아는 서두를 것도, 무리할 것도 없다. 더구나 1억명이 넘는 동북3성에 200만명이 채 안 되는 연해주 국경이 활짝 열리는 것에 대한 위험부담도 만만찮다. 프리모리예 1, 2가 최초의 구상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대부분 계획으로만 남은 이유다. 매년 러-중 간 관련 부서나 기업 사이 각종 협약 체결 소식이 들려오지만, 극적인 진척은 아직 없다. 자루비노항이나 슬라뱐카 리조트 건설 현장도 막상 가보니 “이런 변경에 이런 인프라가…”라는 점에선 기대 이상이었지만, 소문만큼 활발한 모습은 아니었다.

슬라뱐카 중-러 우정 해상공원 기념물.
슬라뱐카 중-러 우정 해상공원 기념물.
러시아 자루비노항 전경.
러시아 자루비노항 전경.
[%%IMAGE16%%] 하지만 러-중은 대륙의 보폭으로 느리지만 가야 할 길을 가는 중이다. 2017년 11월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양국 정상은 ‘프리모리예 1, 2에 대한 기술적·경제적 타당성 조사’를 하기로 약속했다. 조사는 중국 기업이 맡았고, 올해 4월19일 이 조사 결과가 러시아 쪽에 제출됐다. 이 결과에 기반해 오는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릴 제4차 동방경제포럼에서 ‘프리모리예 1, 2 공동개발’에 대한 러-중 협정이 체결될 것이라 한다. 양국 정상 간 이루어질 이 약속이 프리모리예 1, 2를 마침내 현실로 바꾸어놓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더불어 국경 통과를 지옥체험으로 만드는 현재의 관료주의 청산, 시민의식 개선에 대해 양국이 좀 더 고민할 필요가 있다.

[%%IMAGE17%%] 프리모리예 프로젝트가 성사되고 남북관계도 기대처럼 개선된다면, 한반도의 환동해 항만이 프리모리예 길에 접속하게 된다. 이는 남-북-러 삼각협력의 중요한 동력일 뿐 아니라, 너른 유라시아 대륙으로 뻗어갈 평화와 번영의 플랫폼이 될 것이다. 우리가 프리모리예 길에 무심할 수 없는 이유, 나아가 이에 적극 참여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이문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교수

[%%IMAGE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