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회교육

할머니, 자서전 내 드릴게요…청소년들의 ‘창의적 나눔’

등록 :2016-01-04 20:48수정 :2016-01-05 09:45

1. 경북 구미 오상고 학생들은 어르신들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책으로 펴냈다.
1. 경북 구미 오상고 학생들은 어르신들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책으로 펴냈다.
이색 봉사활동 펼치는 학생들
“내가 고생한 걸 글로 쓰면 책 열권도 넘는다.”

경북 구미 오상고 석미숙 교사의 할머니가 생전에 자주 하신 말씀이었다. 석 교사는 이 말을 떠올려 본인이 담당하는 교육봉사 동아리 ‘위더스’ 학생들과 지역 어르신들의 인생 이야기를 담아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학생들은 장천면 상장리 경로당을 찾았다. 어르신과 묻고 답하는 형식의 책을 엮기 위해서였다. 학생들의 설명을 들은 어르신들은 처음에는 손사래를 쳤다. “할 말이 없다”며 머뭇거리거나 서로 떠밀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진지한 태도에 7명의 할머니가 허락했다. 어르신들은 학생들과 일대일로 짝을 맺어 자신이 살아온 인생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공부하느라 바쁜 학생들 일상
재능 발휘하며 이웃 이야기 듣는
특별한 봉사활동 사례도 있어

마을 어른들 인생 이야기 정리
한권의 책 묶어낸 오상고
북 이탈주민·다문화가정 대상
무료 사진촬영 해준 한강미디어고

■ 마을 어르신 일대기 통해 세대 공감

2. 어르신들 이야기를 듣는 학생들 모습. 오상고 제공
2. 어르신들 이야기를 듣는 학생들 모습. 오상고 제공
흔히 요즘 학생들을 두고 “개인주의적이라 자기밖에 모른다”고 얘기하곤 한다. 외둥이가 많고 바쁜 입시경쟁 교육에 치여 상대를 돌아볼 줄 모른다는 뜻에서다. 하지만 자신의 재능을 나누거나 배운 내용을 베푸는 학생들이 있다. 특히 수능 준비를 이유로 고3한테는 동아리나 봉사활동을 못하게 하는 학교가 대부분이다. 반대로 학생들의 활동을 적극 권장하는 학교도 있다.

입시 공부에 바쁜 고3 생활 속에서도 오상고 학생들은 토요일 오후 자율학습이 끝나면 경로당과 댁으로 어르신들을 찾았다. 할머니들은 사진을 보여주며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학생들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노트북으로 타이핑하거나 스마트폰에 녹음해 풀었다. 어르신들이 보기 편하게 글자 크기를 키우고 이야기와 관련한 사진도 함께 싣기로 했다.

3. 어르신들 이야기를 듣는 학생들 모습. 오상고 제공
3. 어르신들 이야기를 듣는 학생들 모습. 오상고 제공
배지현양은 72살의 박춘남 할머니와 짝을 맺었다. 배양은 “할머니들 대부분 혼자 사셔서 외로워하셨다. 여러 번 찾아가 말동무를 해드리니 손녀처럼 예뻐해 주시고 간식도 챙겨주셨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33살 때 남편을 잃고 혼자 5남매를 키우면서 시부모님까지 모셨다고 했다. 농사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돈 버는 일이라면 똥 푸는 일까지 다 했다고 말씀하셨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너무 짠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학생들은 전해 들은 내용을 정리해 ‘○○할머니가 ○○학생에게 들려주는 인생 이바구(이야기라는 뜻의 경상도 방언)’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박점순(84) 할머니는 “내가 살아온 일들을 기억에 남는 일 위주로 이야기했다”며 “책을 보니 인생이 정리되는 느낌도 들고 학생들이 이야기를 귀담아들어줘서 좋았다”고 했다.

배양은 “할머니들이 처음에는 솔직히 관심 없어 하셨는데 나중에 책이 나온 걸 보고 참여 안 한 분들은 부러워하셨다”며 “책을 받은 분들은 자녀랑 손자한테 자랑했다고 전했다”고 했다.

이 활동으로 학생들은 어르신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통해 인생의 지혜를 배우고 삶에서 ‘들어주는 자세’의 중요성도 깨치게 됐다. 석 교사는 “아이들이 남과 마음을 나누며 다가가는 경험을 하고 세대 간 공감을 통해 교과서에서는 배우기 힘든 생생한 삶의 이야기를 접하는 기회를 가졌다”고 말했다.

4. 어르신들 이야기를 듣는 학생들 모습. 오상고 제공
4. 어르신들 이야기를 듣는 학생들 모습. 오상고 제공
김승환군은 두세달 정도 1~2주일에 한번씩 추옥득(80) 할머니를 만났다. 처음엔 할머니와 친해지기 위해 안마도 해드리고 일상적인 질문 위주로 물었다. 낯선 이에게 자신의 속얘기를 털어놓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첨에 ‘아, 됐다. 고마 남사시럽게’라고 반응하셨던 할머니가 6·25 전쟁 통에 남편을 잃고 대구 시장에서 구미까지 옷을 떼다 장사해 혼자 5남매를 키웠다는 인생 역정을 털어놓으셨다. 나중에 책자를 받으셨을 때 감격해 눈물을 보이는 분도 있었다.”

김군은 “바쁜 시간 속에서 입시 공부도 중요하지만 책자를 만드는 것이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라 여겼다”고 했다. “평소 시험 결과가 안 좋으면 환경 탓할 때가 많았다. 할머니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는 기회도 많고 누리는 것도 많은데 환경을 탓하기 전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스스로 좀 더 노력하자고 마음먹었다.”

■ 지역기관과 연계해 재능기부 봉사 펼쳐

5. 서울 한강미디어고 학생들은 북 이탈주민과 다문화가정 주민들을 초청해 가족사진을 찍어 줬다.    한강미디어고 제공
5. 서울 한강미디어고 학생들은 북 이탈주민과 다문화가정 주민들을 초청해 가족사진을 찍어 줬다. 한강미디어고 제공
본인들이 배운 전문 교과 실습과 연계해 다양한 재능기부 봉사를 펼치는 학생들도 있다. 서울 영등포구 한강미디어고 학생들은 지난해부터 북 이탈주민의 웨딩·가족사진과 다문화가정의 가족사진 촬영을 무료로 하고 있다. 이 활동은 영등포경찰서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북 이탈주민이 조기에 정착하도록 돕고 다문화 가족들에게 추억을 만들어주는 사업이었다.

영등포경찰서 주변에 북 이탈주민이 100가족 정도 살고 있었다. 그들은 웨딩사진은 물론 변변한 가족사진이나 자녀 사진 한장 없었다. 경찰서는 학교와 제휴를 맺은 뒤 이들을 대상으로 신청을 받았다.

2학년 정명환군은 “내가 가진 재능을 살려 봉사할 기회가 많지 않아서 신청했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촬영할 때 쭈뼛거리고 칭얼거려 내가 먼저 친근하게 다가가려 애썼다. 학생이 사진 찍는다고 하면 전문성을 의심하는 사람도 일부 있다. 이럴 때는 자연스레 학교를 소개하면서 실습하는 모습이나 그동안 찍은 사진도 보여주고 우리를 믿어도 된다고 설명했다.”

학생들은 사전에 먼저 촬영을 해왔던 3학년 선배들에게 촬영기법이나 조명설치 방법, 사람들과의 소통에 대한 노하우를 배웠다.

정군은 “상대방과 눈빛으로 통하며 촬영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의사소통이 안 되니까 바디랭귀지를 쓰기도 하고 나중에는 내가 쳐다보면 그들이 알아서 포즈를 잡기도 했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솔직히 이전에는 북 이탈주민이나 다문화가정에 대해 관심이 없었거나 선입견이 있었다”며 “이 활동을 통해 그들도 우리랑 똑같다는 걸 느끼고 다들 너무 착하고 계속 고맙다고 말해주니 우리도 뿌듯했다”고 말했다.

이경수 교사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재능 기부나 봉사를 하는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인 동시에 현장 경험을 통해 실무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현장 실습을 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고 촬영 대상이 되는 주민들은 무료로 기념사진을 받을 수 있어서 ‘일석이조’가 된 셈이다. 한강미디어고는 이런 활동을 바탕으로 최근 교육부가 발표한 ‘전국 100대 교육과정’ 우수학교에 선정되기도 했다.

6. 지난달 29일 한강미디어고 광고사진촬영실습실에서 정명환군(왼쪽)과 이수호군이 재능기부 봉사활동을 통해 찍은 북 이탈주민 사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  최화진 기자
6. 지난달 29일 한강미디어고 광고사진촬영실습실에서 정명환군(왼쪽)과 이수호군이 재능기부 봉사활동을 통해 찍은 북 이탈주민 사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 최화진 기자
학교는 학교 안에서의 교육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지역기관과 적극적으로 연계했다. 이 교사는 “학생들이 사진을 찍는 데 학교라는 공간은 제한적”이라며 “학생들이 좀 더 폭넓은 촬영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노인복지관 행사 촬영을 해주거나 근처 어린이집과 제휴를 맺어 어린이들에게 프로필 사진을 무료로 찍어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2학년 이수호군은 “봉사활동을 통해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어색하지 않게 대화할 수 있게 됐다”며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남을 기쁘게 해줄 수 있어서 기쁘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어르신들의 오래된 사진을 보정해 ‘사진회고집’을 만들어주는 활동도 벌였다. 영등포노인복지관에 요청해 어르신을 모집한 뒤 일주일에 두번 방과후수업 시간에 학교를 방문한 어른신과 만나 사진을 받고 이야기를 나눴다.

사진영상과 학생들이 포토샵으로 오래된 사진을 보정하고 산업디자인과 학생들은 책자를 디자인하는 일을 맡았다. 사진 옆에 설명이나 소회를 덧붙여 어르신 한명당 50쪽에서 80쪽 정도의 사진집을 만들었다.

신현숙(68)씨는 “여태까지 앞만 보고 살았는데 이제 시간적 여유가 생기니까 삶을 돌아보고 싶었다”며 “사진을 정리하며 지난 인생을 정리하고 손녀 또래의 학생과 공감하며 좋은 추억을 쌓았다”고 말했다.

이동준 교사는 “특성화고라 사실 학생들이 입시보다는 취업에 관심이 많다”며 “대입에 중요한 봉사활동 점수에 크게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꾸준히 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더 의미 있었다고 본다”고 했다.

최화진 <함께하는 교육>기자 lotus57@hanedu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