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훈과 이야기하기’ 1편이 나가자, 몇 통의 전자우편을 받았다. 대부분 항의였고, 그 내용은 “왜 김훈이냐”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였다.
김훈과의 인터뷰는 주주독자매거진 <하니바람>(hanibaram.hani.co.kr)에 들어갈 기사를 위해 준비됐다. 인터뷰 뒤 뒤풀이에서도 많은 얘기가 나왔는데, 그냥 흘리기 아쉬워 인터넷이란 공간에서 쓰게 된 것이다.
“왜 김훈이냐”의 질문은, “김훈 같은 보수주의자를 쓴 저의가 무엇이냐”를 따져 묻는 것 같다. 어떤 이의 생각과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 사람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본다. ‘나와 생각이 틀린 그’가 아니라, ‘나와 생각이 다른 그’로 봐주었으면 좋겠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에 대한 답은, 김훈의 이런 저런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밥벌이에 대한 지겨움 정도가 아닐까.
몽롱한 김지하밥집 사람들 사이에 김지하 시인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김훈 선배가 이야기를 받았다. “지하형은 요즘,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더라. 몽롱하니…”
“근데 말이야. 지하형은 유신시대에 9년 동안이나 감방에 있었어. 홀로, 다들 독재에 투항했는데 혼자 감방에서 반독재했어. 무슨 짓을 해도 인정해야지. 홀로 감방에서 반독재 촛불 켜고 있었던 거야.”
“근데, 한겨레가 지하형에게 너무 나쁘게 했어. 지하형이 죽은 굿판을 때려치우라고 어디 신문에 썼는데, 한겨레가 너무 비판했어. 지하형은 그저 얘들 죽지 말라고 썼는데… 그 글이 반독재 투쟁하지 말라는 얘기도 아니었거든.”
김훈과 80년대김훈 선배는 사회부 기동팀 기자였을 때 종로 경찰서를 출입했다. 종로경찰서에는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국가인권위원회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도 그 쪽에 있었다.
그는 “처음 기동팀에 배치 받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가기가 무서워 오갔다”고 했다. 80년대 전두환씨가 삼청교육대를 만들 때 그를 치켜세웠는데, 20년 뒤 전두환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터뷰에 앞서 어떤 이들은 나에게 “왜 그때 펜을 놓지 않았냐”고 김 선배에게 물어보라고 말했다. 질문하기 전 김 선배는 솔직하게 말했다. “전두환을 찬양하는 용비어천가를 직접 썼다. 내 손으로 연필로 꾹꾹 눌어 썼어. 그래야 내 동료들이 안 다치니까. 안기부 직원들이 신문사에도 상주했는데, 제발 동료들을 때리지만 말아달라고 했어.”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난 변명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권력에 아부해 정치권력에 빌붙거나 재물을 탐하는 기자들을 주위에서 적지 않게 봤기 때문이다. 김훈 선배가 그런 길을 걸었다면, 나 역시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 선배를 잘 아는 한겨레의 한 선배 기자의 말. “김훈 선배의 80년대 행적이 언론에 나오면서, 김훈 선배 딸이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냐’며 펑펑 울었어. 김훈 선배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고 얘기하더군.”
김 선배는 지사형 기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인간미 넘치는 휴머니스트고, 자신의 잘못을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다. 80년대 독재에 저항하다, 그 뒤 변절하거나 또는 엉뚱한 길을 들어선 정치인들 보다는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인다.
김훈 선배는 왜 밥에 천착하나?김 선배는 2남3년 가운데 셋째 아들이다. 그의 유년시절은 가난했다. 아버지 김광주씨는 김구 선생 밑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해방 뒤 무협소설 작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가정적이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셨고, 오랜 시간 병마에 시달렸다. 누워있는 아버지의 말을 받아 그는 아버지의 무협지를 대필했다. 무협지를 대필하면서 글에 눈을 떴지만, 가정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아버지였기에 그는 가장의 일도 떠맡아야 했다.
김 선배에게 아버지는 존경의 대상이자 극복의 대상이었다.
“소년인 나는 내 아버지의 쓰라린 위장을 위하여 남비를 들고 시장거리로 가서 해장국을 사 오곤 했다. 어느 겨울 새벽에 나는 해장국집 문지방에 낀 얼음 위에 자빠져서 끊는 국물을 뒤집어쓰고 허벅지에 화상을 입었다. 나는 선지와 콩나물을 바지 위에 뒤집어 쓰고, 빈 남비를 들고 춥고 어두운 새벽거리에서 울었다. 나는 이 세월들과 내 아버지의 생애를 뛰어 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이를 갈면서 울었다.”(김훈 <주여, 망자를 당신 품 안에>)“아버지는 자상하지 않았고 가정적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난했고 거칠었으며 늘 울분에 차 있었다. 아버지에게 광야란 없었다. 아버지는 그 불모한 시대의 황무지에 인간의 울분과 열정을 뿌리고 갔다. 나는 언제나 그런 아버지의 편이었다. 내가 너무 아버지 편을 들어서 늙은 어머니는 지금도 내가 못마땅하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김훈 <광야를 달리는 말>)
지겹게 가난했고, 그 가난으로 그는 대학(고려대 영문학과)을 4학년 때 중퇴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여동생들과 가족을 뒷바라지 하기 위해 거리로 나서야 했다. 밥벌이를 위해 막노동판도 전전했다. 그러다 입사자격이 고졸이상이었던 <한국일보>에 원서를 냈고, 반항기 넘쳤던 그를 눈여겨본 장기영 회장이 그를 뽑았다. “젊은 날의 김훈은 ‘제임스 딘’이라고도 불렸을 만큼 반항기가 다분했다”고 그를 잘 아는 한 선배는 말한다.
남자가 여자를 보살펴야 한다는 가부장적인 생각과 민중에 대한 편견, 역사와 통일에 대한 닫힌 의식 등은 유년 시절 그의 경험의 산물인 것 같다. 거대담론에 대한 거의 병적인 거부나 일부러 악한 체 하는 `위악' 역시 처절하게 생활인으로 살아야 했던, 그의 경험이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물론 그의 경험은 기자와 소설가로 글을 쓸 때 생생한 현장감을 불러 오는 원천이 되기도 했다.
밥집에서 1차를 마치고 한겨레 기자들과 김훈선배는 택시를 타고, 안국동까지 가서 포도주를 마셨다. 난 그 곳에서 포도주를 맥주처럼 들이 부은 것 같은데…. 포도주집에서 나눈 얘기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음날. 골은 깨어지고 속은 뒤집히는데, 밥을 꾸역꾸역 집어넣고 회사에 출근했더니, 한 선배가 “너, 포도주집에서 김훈 선배 옆에서 잘 자더만...”이라는 말을 툭 던졌다. 그날 하루 종일 쓰린 배를 움켜지면 ‘밥벌이의 지겨움’을 생각했다.
정혁준 <한겨레> 편집기획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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