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건창의 운명을 바꾼 세 가지 선택

2007년 제41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한 광주제일고교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시스

 

서건창은 빠른 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2012년 프로야구 개막전이 열린 4월 7일 잠실구장. 마운드에는 두산의 외국인 에이스 더스틴 니퍼트가 로진백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직전 시즌 15승(다승 3위)을 거둔 투수다. 전날까지만 해도 서건창은 ‘백업 2루수’였다. 주전 2루수 김민성이 개막 이틀 전 부상을 당했다. 서건창은 생애 최초로 개막전 전광판에 이름을 새겼다. 생애 두 번째 1군 경기. 예상대로 첫 공은 시속 140㎞ 중반 대 속구. 묵직했다. 빠른 공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서건창은 그러나 배트를 휘두르지 못했다.

첫번째 선택 진학 대신 신고선수로 프로에 입문하다

 

2007년 8월 16일 서울 서초구 양재교육문화회관. 서건창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길 고대했다. 야구 명문 광주일고의 공·수·주를 갖춘 주전 2루수로서 그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서건창 세 글자는 끝내 불리지 않았다. 학창 시절 얻은 팔꿈치 부상과 야구를 하기엔 다소 작은 176㎝의 키는 8개 구단 스카우터들의 눈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함께 대통령배 우승을 이끌었던 투수 정찬헌이 엘지에 2라운드 1순위로 지명됐다. 광주일고 3번 타자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알 만한 서울의 대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야구 인생에 있어 첫 번째 갈림길이었다. 주변에선 대학 진학을 권유했다. 하지만 서건창은 프로행을 택했다. 그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광주에 여러 번 갔었다는 양승호 당시 고려대 감독은 뒷날 “건창이가 어린 나이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대학보다는 프로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었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서건창에게 야구를 알려준 아버지는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적지 않은 뒷바라지가 필요한 야구 선수 아들을 홀로 키운 어머니를 생각하면, 대학 진학으로 ‘여유’를 부릴 틈이 없다 생각했다. 프로무대에서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연봉의 많고 적음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엘지 트윈스에 신고선수로 입단했다. 신고선수란,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정식 등록되지 않은, 쉽게 말하면 ‘연습생’이다. 프로야구 선수 최저 연봉(2400만원)도 보장받지 못하고 대부분 계약금도 없다. 구단 재량에 따라 1군 등록과 출장이 가능하지만, 그 전에 계약이 해지돼 팀에서 방출되는 경우도 잦다.

 

2008년 LG 시절 서건창. LG 트윈스 구단 제공

서건창의 야구 센스는 뛰어났다. 우투좌타 내야수 서건창은 빠른 발로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유격수를 맡을 정도로 수비 능력도 좋았다. 2군 무대에서 활약을 보인 그는 2008년 6월 1일 정식 선수로 등록됐고, 18일 1군에 올라왔다. 7월23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넥센 히어로즈전. 서건창은 대타로 나와 프로야구 데뷔전을 치른다. 1-5로 뒤진 8회 말. 상대는 띠동갑인 베테랑 투수 송신영이었다. 이미 승부는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지만, 서건창은 집중했다. 하지만 볼 하나도 얻어내지 못했다. 3구 삼진.

 

찰나같은 데뷔전 뒤에 더 이상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5년 선배 박경수가 지킨 2루수 자리는 견고했다. 고향인 광주 원정경기에 가서도 벤치만 지켰다. 어머니에게 어엿한 모습을 보여줄 기회는 9회초 세 번째 아웃 카운트 불이 들어올 때까지 서건창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2006년 꼴찌(8위)에서 2007년 5위로 4강 문턱까지 갔다가 2008년 다시 최하위로 추락하며 암흑기를 이어가던 엘지는 조급했다. 신인들에게 기회를 줄 여유가 없었다. 오지환, 정주현 등 유망한 내야수들이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경쟁자로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부상이 다시 도진 서건창에게 엘지는 2009년 초 방출을 통보했다. 신고선수로 시작해 2군에서 활약했다가 1군 무대를 밟고 한 차례 잠실에 서서 3구 삼진을 당한 뒤 부상이 도지고 방출까지. 스무 살 서건창에게 1년 동안 벌어진 일은 꿈처럼 잔혹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건창의 첫 번째 선택은 실수로 보였다.

두번째 선택 NC 대신 넥센과 인연을 맺다

 

야구를 계속하고 싶었다. 타 구단 입단 테스트에 도전했지만 떨어졌다. 야구팀이 있는 경찰청에 지원했지만 역시 떨어졌다. 현역 입대를 결정했다. ‘아직 젊으니까 일단 군 문제부터 해결하자’는 생각이었다. 광주에 있는 31사단에 입대했다. 군 생활 초반엔 야구를 보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그럴수록 야구 생각이 더 간절했다. “훈련을 할 수 없으니까…마음속으로 수백 번 타석에 들어서고, 더블플레이를 했다.”

 

시간을 쪼개 몸 관리를 시작했다. 일과 시간 이후엔 웨이트트레이닝을 했고 식이요법에도 신경을 썼다. 2011년 9월 전역한 그는 다시 입단 테스트를 찾아다녔다. 당시 광주일고 코치였던 김선섭 현 광주일고 감독이 발벗고 나섰다. “사실 처음엔 광주일고 코치로 데려오고 싶었죠. 한번 프로에 도전했다가 고생도 했고 워낙에 성실했으니까. 그런데 연습하는 거 보고 있으니 너무 아깝더라고요. 그래서 넥센 쪽 스카우트에게 부탁했죠. 이미 테스트 대상 인원이 다 채워진 상태였는데 거듭 부탁해서 기회를 얻었죠.”

 

서건창이 넥센 히어로즈의 문을 두드린 이때 창단을 선언한 엔씨 다이노스도 서건창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신생팀 엔씨는 2013년에 1군 무대 진입이 예정돼 있었다. 젊은 유망주들을 여러 경로로 물색하던 중이었다. 김 코치는 서건창에게 “엔씨엔 유망주로 꼽히는 2루수 박민우 등 계약금을 많이 받고 온 선수들이 많다. 들어가더라도 출전 기회를 잡는 게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넥센이 낫겠다”고 조언했다. 그래서 넥센의 공개 테스트에 지원했다. 엔씨와 넥센의 갈림길에서 택한 서건창의 야구 인생 두 번째 선택이었다.

 

준비된 야구선수 서건창은 단박에 눈에 띄었다. 테스트 지원자들을 살펴보던 박흥식 당시 넥센 2군 감독(현 1군 타격코치)이 그를 알아봤다. 삼성 이승엽이 홈런에 눈을 뜨는 데 큰 역할을 한 박 코치는 국내 야구판 최고의 타격전문가 중 한 명이다. 박 코치는 “눈빛이 달랐다”고 서건창을 기억한다. 박 코치는 테스트를 한 9명 중 유일하게 서건창의 보고서만 직접 썼다. “딱 2000만(원) 써보자”는 건의였다. 보고서를 읽은 이장석 구단주의 ‘OK 사인’이 떨어졌다. 그렇게 다시 프로야구 선수가 됐다.

 

첫 안타, 첫 타점 2012년 4월7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12 팔도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와 넥센 히어로즈의 개막전 경기에서 5회초 2사 만루 상황 넥센 서건창이 2타점 적시타를 날리고 있다. 뉴시스

눈빛으로 박 코치의 마음을 끌었던 서건창의 진가는 마무리 캠프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지훈련을 거쳐 시범경기까지 꾸준히 나가면서 3년 동안 잃어버렸던 경기 감각도 올라왔다.

 

개막전을 앞둔 서건창의 목표는 ‘충실한 백업 요원’이었다. 신고선수를 거쳐 이제 막 최저 연봉(2400만원)을 받기 시작한 새내기에게 개막전 선발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결정적인 장면’은 느닷없이 닥쳤다. 개막을 이틀 앞둔 4월5일 주전 2루수 김민성이 연습 경기 도중 발목을 다쳤다.

 

5회초 2사 만루의 역전 기회. 니퍼트의 2구는 볼이었다. “9번 타자에다 신인이라 상대가 정면 승부를 빨리 걸어올 것이라 예상”했다. 3구째 다시 빠른 공을 예상한 서건창의 방망이가 타이밍을 잡고 나갔지만, 공은 시속 130㎞ 체인지업이었다. 방망이를 멈칫하며 타이밍을 고쳤다. 맞히기만 하겠다는 생각으로 휘두른 배트에 힘은 실리지 않았지만, 공은 방망이 한가운데 정확히 맞았다. 타구는 투수 옆을 지나 유격수와 2루수 사이를 꿰뚫고 중견수 앞까지 굴러갔다. 서건창의 프로 데뷔 첫 안타. 생애 첫 번째와 두 번째 타점도 기록됐다. 그날의 결승타점이기도 했다. 4회말엔 상대 4번 타자 김동주의 안타성 타구를 다이빙 캐치로 잡아냈다. 2만 7000명 매진 관중 앞에 서건창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인지되는 순간이었다.

세번째 선택 움츠려져 더 커지다

 

“꿈만 같았던” 서건창의 1군 무대는 2012시즌 동안 127번이나 반복됐다. 붙박이 2루수로 팀의 128경기 중 127경기에 나간 서건창은 타율 0.266에 115안타, 39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2012년 프로야구 신인왕에 올랐다. 2루수 골든글러브도 차지했다. 시즌 중 부상에서 복귀한 김민성은 서건창에게 2루를 내주고 3루수로 ‘전업’해야 했다.

 

2400만원이던 연봉이 7700만원으로 오른 뒤 2013시즌을 맞았다. 시련에 익숙한 그였지만 프로무대는 냉정했다. 상대는 발 빠른 톱타자를 철저히 해부했다. 몸쪽 공을 잡아당기는데 능한 서건창이 나오면 2루수와 1루수 사이 간격을 좁히는 ‘서건창 시프트’를 들고 나왔다. 투수들은 집요하게 바깥쪽 공으로 승부했다. 서건창도 바깥쪽 공에 대비하기 위해 타석 박스 선을 밟을 정도로 바짝 붙었다. 바깥쪽 공을 잘 칠 수 있는 여러 타격방법을 시도하기도 했다.

전설이 전설에게 2012년 12월11일 오후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2012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서건창이 2루수부문 골든글러브를 받고 있다. 시상자는 기존 최다 안타(1994년 196안타, 해태 타이거즈) 기록자 이종범 한화 이글스 코치. 뉴시스

그게 화근이 됐다. 머릿속이 복잡할수록 투수가 던지는 공은 잘 보이지 않았다. 5월말 2할대 초반까지 타율이 떨어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6월초 오른쪽 발가락 골절상을 당했다. 8월24일 복귀까지 6주 가까이 필요했다.

 

데뷔 시즌과 같은 타율 0.266으로 2013년을 마쳤다. 부상 탓에 86경기밖에 나서지 못했다. 고민을 거듭한 서건창의 결론은 ‘더 정확하게, 더 가볍게’였다. 몸을 불리고 힘을 키우는데 한계가 있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이대로 평범한 선수가 될 것인가, 새로운 타격 방법에 도전해볼 것인가. 야구 인생 세 번째 갈림길에서 서건창의 선택은 물론 도전이었다.

 

2013년 투수들의 집중 분석으로 슬럼프에 빠진 서건창은 2014년 특유의 '잔뜩 웅크린 타격 자세'로 테이크 백을 줄이고 공을 맞히는데 집중했다. 공을 오래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힘을 싣기 어려운 자세다. 겨울 동안 흘린 땀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넥센에서 두 시즌 내내 단 한 개의 홈런을 기록한 '전형적인 단타자' 서건창은 장타를 만들기 어렵다는 이 자세로 올 시즌에만 7개의 공을 외야 밖으로 넘겼다. 사진=뉴시스/그래픽=정희영 기자 heeyoung@hani.co.kr

그렇게 탄생한 결과가 ‘엉거주춤 타법’, ‘배꼽 타법’으로 불리는 지금의 타격 자세다. 서건창의 최근 타격 자세를 본 뒤 그의 실제 키(176㎝)를 알게 되면 “보기보다 크네”라는 반응이 나온다. 타석에서 잔뜩 웅크린 그는 실제보다 더 작아 보인다. 두 발을 어깨 넓이만큼 벌린다. 허리를 낮추고 양 허벅지를 붙인다. 웅크린 자세를 만든다. 두 손을 명치 가까이 내린다. 몸통은 고정한 채 고개만 투수 쪽으로 돌린 뒤 어깨에 붙인다. 공을 때리기 직전 방망이를 뒤로 당기는 ‘테이크 백’을 최소화한다. ‘대충’ 보면 방망이를 가만히 들고 있다가 공에 툭 하고 갖다 맞히는 것 같다.

 

타격 전 준비 동작을 최소화하는 건 타자들의 숙원이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이를 위해 방망이를 잡은 두 손을 미리 어깨 위쪽으로 빼거나 투수와 가까운 쪽 다리를 들어 ‘발사 자세’를 취한다. 서건창은 이와 정반대다. 장단점이 있다. 방망이가 공을 때리기까지 충분한 거리(테이크백)를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공에 힘을 싣기 어렵다. 반면 방망이를 휘두르기 직전까지 공을 보는 시간이 길어진다. ‘몸에 붙여놓고 쳐라’는 야구 정석에 가장 충실한 타격 자세다.

 

서건창은 올해 초 미국 애리조나 전지훈련에서 이 타격 자세를 몸에 익혔다. 동시에 웨이트트레이닝 강도를 평소보다 높여 부족한 힘을 보완하려 애썼다. 정확성을 높인 결과는 놀라웠다. 안타 수도 늘었지만 그와 비례해 홈런 개수도 늘었다. 2012~2013 두 시즌 동안 단 한 개에 불과했던 홈런이 2014시즌에만 7개나 나왔다.

 

허문회 넥센 타격코치는 “서건창의 타격 자세는 타격 때 회전을 최대한 빠르게 하기 위한 방법을 궁리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웨이트트레이닝 효과도 있겠지만 (타구 비거리가 늘어난 건) 예전보다 타이밍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무게중심을 몸 한가운데로 모아 몸통의 회전력을 높인 덕분에 공을 맞히는 타이밍이 좋아지고 더 많은 힘이 가해진다는 설명이다.

 

바람을 넘어…달려라 서건창 2014년 10월13일 광주 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KIA와의 원정경기 2회초 서건창이 좌전 안타(시즌 197번째)를 치고 전력질주 하고 있다. 이 안타로 서건창은 이종범의 종전 한 시즌 최다 안타 기록을 뛰어넘었다. 사진=뉴시스/그래픽=조승현 기자

 

2014프로야구가 ‘타고투저’를 넘어 ‘타고투병’(병×) 시즌으로 평가받지만 서건창의 한 시즌 200안타는 그의 1군 무대 데뷔처럼 ‘꿈 같은 일’이었다. 1994년(팀당 126경기) 해태 타이거즈 시절 ‘종범신’ 이종범이 196개를 쳐 세운 한 시즌 최다 안타 기록에 가장 가까이 갔던 선수는 1999년(팀당 132경기) 엘지 이병규(192개)였다. 이병규 이후 190안타는 물론이고 180안타를 돌파한 선수도 없었다. 144경기를 치르는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단 여섯 차례뿐이다. 팀당 162경기를 치르는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도 200안타는 귀한 기록이다. 올 시즌엔 두 명이 200안타를 넘은 반면 지난 시즌엔 한 명도 없었다.

 

아마추어 선수들이 ‘안타학 박사’인 서건창의 타격 자세를 따라하겠다고 나서는 건 당연한 반응이다. 프로야구에서도 넥센 동료들은 물론이고, 투수들이 서건창에게 가장 많은 안타를 헌납한 팀인 두산의 외야수 정수빈이 시즌 중에 그의 자세를 모방해 효과를 톡톡히 봤다.

 

KT가 합류하는 내년 시즌엔 10개 구단으로 팀이 늘어나 시즌 경기 수도 팀당 144경기로 불어난다. 향후 10개 구단 체제가 유지되는 한 ‘서교수’의 최다 안타 기록은 팀당 시즌 128경기 상태에서 나온 ‘순도 높은’ 최다안타 기록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예정이다.

 

200안타(서건창은 시즌 최종 201안타를 쳤다)를 만든 것은 결국 세 번의 야구인생 큰 갈림길에서 편안한 길보다는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도전의 길을 택했던 서건창의 의지, 오롯이 그것의 결과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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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박현철 기획・제작 조승현 그래픽 정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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