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보법 장풍에 날아간 무림의 고수
  • ‘그분’ 모독했다며 물고문·전기고문…
  • 맑스가 무서워 막스에 ‘바르르’
  • 출판사 들이닥친 형사, 여자 직원에게 한 말 ‘충격’ ‘경악’
노래
  • 묻지 말아요 내 이름은 묻지 말아요
  • ‘트러블 메이커’들이 피부 트러블은 싫어합니다
  • 심의위도 인정한 억지검열의 상징 ‘방송부적’
  • 일본군 장교 출신 독재자 일본풍 혐오했다?
  • 정의를 질식시킨 시대가 질색한 단 하나의 느낌
영화
  • 순자를 순자라 부르지 못하고
  • “씬 83 광주검찰청등 64개 장면 자진삭제”
  • 공장지대 판자촌은 절대 안 돼
  • 애마부인 알고 보니 삼베를 사랑했네?

순자의 전성시대를 열며

“영자를 부를 거나 ♪ 순자를 부를 거냐 ♬ 얼굴은 못났어도~ 땡가댕! 땡가댕!”
1980년 개봉한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에 나올 뻔 했던 대사다.

청와대에 살던 ‘순자’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인(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씨)에겐 최고의 전성시대였을 그 때, 대중문화에서 ‘순자’는 무서운 금기어였다. 고통 받은 건 순자만이 아니었다.

소설 속에서 각하에게 빈정댄 게 아니냐며 작가를 끌고 가 고문…
물고문을 연상시킨다, 왜 반말이냐 등의 이유로 대중가요 금지…

독재의 칼날은 어이없는 이유를 들어 언론·출판·표현의 자유를 난도질했다.

서른 해가 지났다.
민주주의는 더디게, 때로는 뒷걸음질 치면서도 전진해 왔다.

순자, 순자, 수~운자를 마음껏 외칠 수 있는 오늘의 자유 역시 1987년 6월항쟁으로 일궈낸 소중한 권리다.

서른 돌을 맞아 ‘전두환식 창조검열’이 문화예술인을 옥죄었던 사례를 한데 모았다.

이 ‘웃픈’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문화를 탄압하고, 자유를 질식시키는 권력은 반드시 무너진다고…

순자의 전성시대 : 책

국보법 장풍에 날아간 무림의 고수

사회과학 책인가 싶지만, 무협소설 이야기다. 박영창의 <무림파천황>이 겪은 기구한 일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소설이다. 1978년 연세대 신학과에 입학한 박씨는 1979년 무협지를 번역하기 시작했고, 같은 해 <구마경>을 발표하면서 무협소설 작가로 데뷔했다. <무림파천황>은 그의 두 번째 작품.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만화 가게 대본용으로 썼고 1981년 여름 세상에 나왔다.

<무림파천황>(하) 결말 부분 “무아무상!”
처절한 유룡의 외침이 장내를 울리는 순간 모든 검기가 급격히 사라졌다.

휘익! 이때 바람이 사면을 쓸고 지나갔다. 아! 저게 어찌된 일일까?
지옥천존의 몸은 가루로 변하여 바람을 타고 허공에 떠다녔다.

유룡은 지옥천존이 마지막 남긴 핏자국을 망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지옥천존, 잘 가시오. 당신은 천하의 기재였소.”
그는 나직히 중얼거렸다. 그의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넘쳐흘렀다.

주인공 유룡은 초인간적인 무예를 익혀 정파와 사파가 대립하던 무림을 평정한다. 무협소설하면 흔히 떠오르는 줄거리에 공주들과 벌이는 사랑놀이가 더해졌다.

박영창의 무협소설 <무림파천황> 1993년 재출간본. 현재는 절판돼 온라인 중고 거래(3권에 6000원)로 샀다.

정파와 사파의 대결구도를 변증법적 대립과 모순으로 설명한 두 쪽에서 사달이 났다. 제25장 ‘황해문의 멸망’ 마지막 부분이었다.

<무림파천황>(중) 제25장 ‘황해문의 멸망’ 마지막 부분 “대립물의 모순과 투쟁을 통하여 양적인 변화가 생기고 그것이 일정한 한계를 넘으면 돌연 비약적이고 질적 전환을 하여 새로운 개념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무림 세계에서는 정과 사의 대립이 첨예화되면 어떤 폭발점에 이르고 새로운 정세가 형성되게 되는 것이다. (중략) 변화, 운동, 발전의 원인은 내부의 모순 때문에 일어난다. 인간사회의 내부 모순은 계급 간의 모순이다. (중략) 발전이란 내부 모순이 격화 심화될 때 그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는 현상이다.

정권은 국가보안법으로 물고 늘어졌다. 박씨가 불순한 의도를 가졌다고 의심했다. 거기에 강북무림이 강남무림을 향해 ‘남진’을 주장한 부분도 국가보안법 위반에 해당된다는 것이 박씨에게 7년을 구형한 검찰의 판단이었다. 1981년 9월12일 구속된 박씨는 항소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만기 출소를 한 달 앞둔 1984년 광복절 특사로 감옥을 나왔다.

1993년 7월8일치 <경향신문> . 출처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무림파천황>은 1993년이 돼서야 독자들 곁으로 돌아갔다. 1993년 7월8일치 경향신문을 보면, 당시 출판사는 “완벽하게 압수돼버려 책을 입수하는 데 애를 먹었다.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5공이라는 정권의 실체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경기도 시흥의 작은 만화대본소에 초판본 딱 한질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박씨는 재출간하는 심경을 책머리에서 이렇게 썼다.

“이 책을 출판하고 싶다는 제안을 몇 군데 출판사로부터 받았으나 지금까지 모두 거절하여 온 이유는 책이란 것이 역사발전에 공헌하지는 못할지언정 남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되는데 이 책이 학생운동을 하던 동료들에게까지 피해를 끼쳤다는 자책 때문이었다. (중략) 주인공의 무예를 초인간적으로 묘사하기에 이르렀으며, 군사정권의 폭정에 대한 분노가 젊은 시절의 나에게는 이런 어이없는 식으로나마 저항하도록 했고, 그 때문에 악인을 가차없이 응징하는 주인공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무림파천황>은 2006년 서울대학교가 개교 60주년을 맞아 발표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 판금도서’ 20권 중 하나다.

황당한 이유로 고초를 겪은 작품은 또 있다.

안의섭 화백은 40년간 시사만화 <두꺼비>를 연재했다. 한국전쟁을 소재로 삼거나(왼쪽) 대통령을 소재로 삼기도 했다. 오른쪽 만화로 인해 안 화백은 1년7개월간 연재를 중단해야 했다. 원로 만화가 박기준 선생이 수집한 자료다. 한국만화진흥원 제공

1986년 1월18일 한국일보에 실린 안의섭(1924~1994) 화백의 시사만화 <두꺼비>는 이렇게 시작한다. 주인공 두꺼비가 신문을 보는 와중에 “하는 짓도 마음에 쏙 든다. 건강하셔야 합니다”는 목소리가 들린다. 마지막 네 번째 컷에서야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레이건(당시 투병설이 제기됐던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라고 읊조리는 두꺼비 부인이 등장한다. 하필 그날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생일이었다.

1985년 당시 안의섭 화백. <연합뉴스>

안 화백은 40년간 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한국일보, 세계일보, 문화일보 등을 거치며 <두꺼비>를 연재했다. 직선적인 풍자, 통쾌한 해학, 거친 입심이 그가 수십 년간 연재를 이어간 힘이다. 연재 초기인 1960년에도 자유당 정권을 비판하다 1년간 연재를 중단당한 안 화백은,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9년에도 만화를 석달간 그리지 못했다. 1986년 필화로는 무려 1년 7개월간 붓을 들 수 없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전두환과 노태우 전 대통령. <한겨레>자료사진.

“대통령이 큰 병을 얻기를 빌었다.” 안 화백을 연행한 안기부의 만화 해석은 이랬다. 그 창의적인 해석도 해석이지만, 이 정도의 풍자조차 넘기지 못하는 그 졸렬함이 당시 더 큰 반발을 불렀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까지 나섰다. 1986년 5월7일치 동아일보를 보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6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민주화, 인간화의 복음을 선포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사제단은 이 성명서에서 “‘두꺼비’의 연행, 출판사 등록취소, 출판 관계 인사에 대한 연행과 구속은 언론과 출판자유를 질식상태에 놓이게 했다. 깨어있는 언론,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는 언론, 자유 언론을 실천하는 언론”을 촉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두꺼비>는 6월 항쟁 직후인 1987년 8월에야 돌아왔다.

순자의 전성시대 : 책

‘그분’ 모독했다며 물고문·전기고문…

1987년 1월14일 서울대생 언어학과 3학년이던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을 받다 사망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1988년 7월25일 촬영된 사진이다. 연합뉴스

‘한수산 필화사건’ 고문 후유증으로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박정만 시인. 사망하기 반년 전인 1988년 4월 촬영한 사진이다. 연합뉴스

고문 후유증이었다.

수사관들은 무조건 ‘불으라’고 위협과 구타를 했다. 까닭을 묻는 박 시인의 질문에는 ‘알 필요없다’는 대답만 했다. 잠깐 시간이 흘렀다. 위에서 물이 든 바케스가 내려왔고 그의 얼굴은 물에 젖은 수건으로 덮였다. 얼굴에 물이 부어지기 시작했다. (중략) 벽을 등진 철제의자에 앉혀져 전기고문도 당했다. 골수 같은 것이 다섯손가락에 끼워져 갑자기 전류가 흐르자 펄쩍 개구리처럼 발버둥치는 행위를 되풀이해야 했다.”<한국문학필화작품집>(1989)에 수록된 레이디경향 1988년 11월호 이문재 기자(현재 시인) 기사 중에서

1981년 5월 언론계와 문학계를 덮친 이른바 ‘한수산 필화 사건’이다. 1980년 언론사 통폐합 이후 전두환 정권이 사회정화를 하겠다며 나서던 때였다.

한수산 작가와 소설 <욕망의 거리>. 보안사령부는 이 소설 일부 구절을 문제 삼아 한 작가를 포함해 모두 7명을 연행해 며칠에 걸쳐 고문했다.

한수산 작가가 당시 중앙일보에 연재하던 소설 <욕망의 거리>의 두 군데가 문제가 됐다. <욕망의 거리>는 가난을 벗어나려 발버둥치던 주인공 세희의 남자 관계가 중심이 되는 애정소설이었다. 나이 많은 남자의 후처로 들어간 주인공이 자신보다 두 살 많은 딸 난주와 갈등을 겪는 가운데 문제의 구절이 등장한다.

“어쩌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만나게 되는 얼굴, 정부의 고위 관리가 이상스레 촌스런 모자를 쓰고 탄광촌 같은 델 찾아가서 그 지방의 아낙네들과 악수를 하는 경우, 그 관리는 돌아가는 차 속에서면 다 잊을 게 뻔한데도 자기네들의 이런저런 사정을 보고 들어주는 게 황공스럽기만 해서, 그 관리가 내미는 손을 잡고 수줍게 웃는 얼굴, 바로 그 얼굴들은 언제나 그렇게 닮아 있어서 그것이 모내기하는 논둑이든, 산동네 빈민촌이든, 탄광이든 항시 같은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5월14일 연재분)

“하여튼 세상에 남자 놈치고 시원치 않은 게 몇 종류가 있지. 그 첫째가 제복 좋아하는 자들이라니까. 그런 자들 중에는 군대 갔다 온 얘기 빼놓으면 할 얘기가 없는 자들이 또 있게 마련이지.” (5월 22일 연재분)

이러한 내용이 정부 고위 관리인 누군가를, 그리고 군을 모독했다는 것. 한 작가를 비롯해 당시 중앙일보 편집국장 대리 및 문화부장 손기상씨, 중앙일보 문화부 편집위원 정규웅씨, 출판사 고려원 편집장이던 박정만 시인 등 모두 7명이 보안사령부에 끌려갔다. 불법 연행이었고 고문이 뒤따랐다. <욕망의 거리>가 빌미가 됐다는 것은 조사 과정에서 알게됐다. 박 시인은 소설 계약을 위해 한 작가와 만났을 뿐이었다.

<한국문학필화작품집>(1989)을 보면, 박 시인은 보안사에서 풀려날 때까지 ‘자서전’이라는 것을 50여장씩 쓰고 친구들과 나눈 대화를 희곡의 대본처럼 수없이 썼다고 한다. 한 작가 역시 그때 당한 고문의 종류와 방법에 대해 “전화번호부 두께의 책으로 만들 수 있다”면서,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 사건’이 터졌을 때는 한달 동안 신문을 보지 못할 정도였다고 책은 기록하고 있다.

‘한수산 필화 사건’ 고문 피해자 중 한 명인 정규웅 문학평론가는 2011년 중앙선데이에 연재한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대답을 시작하려 하자 곁에 서 있던 30대가 “이 새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악을 쓰며 구둣발로 옆구리를 걷어차는 바람에 나는 철제 의자와 함께 모로 쓰러져 버렸다. 이어지는 발길질을 50대가 제지하면서 결론을 내리듯이 말했다. “둘이 술 마시며 각하와 정부를 씹어대다가 이런 식으로라도 빈정대 보자고 짜 맞춘 거지, 안 그래?”

사망하기 반년 전인 1988년 4월께 박정만 시인. 연합뉴스

“나를 죽인 것은 5월의 그날”이라며 소주 두 병을 마셔야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었다는 박 시인. 1990년 8월17일치 동아일보에 실린 칼럼에서 이근배 시인은 박 시인의 마지막을 이렇게 썼다.

“그 억울한 고문 때문이었을까. 박정만은 시의 신에 들리고 말았다. ‘1980년 8월20일경부터 9월10일까지 나는 물경 3백편 가까운 시를 썼다’고 그가 술회했듯이 참으로 초인적인 시의 불꽃을 지상에 피우고 88년 가을 마흔 두살의 나이로 그는 연기로 돌아갔다.”

순자의 전성시대 : 책

맑스가 무서워 막스에 ‘바르르’

Karl Marx(왼쪽)와 Max Weber(오른쪽).<한겨레>자료사진

1980년대 금서를 둘러싼 웃픈 에피소드 중 하나. 한상범 동국대 명예교수는 책(2004)에서 ‘막스 베버 수난기’에 대해 이렇게 썼다.

“당시에 마르크스에 대해 얼마나 노이로제가 심했으면 막스 베버(Max Weber)를 마르크스(Karl Marx)와 동일시해서 그 저작물에 대해 수입금지 처분을 하는 판국이었다. 막스 베버는 오히려 마르크스를 가장 강력히 비판하는 사람이었는데도 말이다.”

‘설마’ 싶지만 증언이 뒤따른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한겨레21에 연재한 <한홍구의 역사이야기>‘작두로 잘라 불태운 시집’편 일부다.

“교도소의 검열은 더 심했다. 납본필증이 나와서 판매되고 있는 도서라도 교도관이 내키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었다. 막스 베버의 책에 막스가 있어 안 된다기에 ‘Marx’는 좌파이고, ‘Max Weber’는 우파의 대가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없더라는 일화도 있었다.

1993년 2월25일 열린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전두환 전 대통령. <한겨레>자료사진

끝인가 싶지만 또 있다. 매일신문 정경훈 당시 정치부장은 2008년 8월7일 ‘야고부’ 칼럼에서 1980년대 중반 김포공항에서 벌어진 한 ‘사건’에 대해 썼다.

막스 베버의 책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표지. “어쨌든 막스는 안 된다”는 ‘웃픈’ 사연의 주인공.

“외국 학술대회에 참석한 한 교수가 원서 몇 권을 들고 들어왔다. 거기에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쓴 막스 베버의 저서도 있었다. 공항 세관원은 ‘막스’의 책은 ‘금서’므로 압수하겠다고 했다. 그 교수는 이것은 “그 막스가 아니라 다른 막스”라고 설명했으나 세관원은 요지부동이었다. “어쨌든 막스는 안 돼요.”

설마 싶은 ‘전두환 창조 검열’ 사례 하나 더.

1988년 9월17일치 한겨레 기사는 “서울형사지법 항소7부는 9월16일 10·26사건을 소재로 ”번역소설을 펴낸 것과 관련,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즉심에 회부됐다가 정식재판을 청구한 김승균씨와 김자동씨 등 2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고 썼다.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이유로 1984년 시판 금지됐던 번역 소설 (스티브 셰이건 지음, 김자동 옮김). 당시 구류형을 받았던 출판인과 번역가는 6월 항쟁 이후 무죄를 선고받았다. 기사는 1988년 9월17일치 <한겨레> . 출처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기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소설은 허구를 바탕으로 쓰는 창작품이므로 독자들이 이를 사실로 믿을 것이라고 보기 힘들 뿐 아니라 문제된 책의 내용이 사회불안을 조성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무죄 선고 이유를 밝혔다.”

한국출판문화운동사 편집위원회가 펴낸 <한국출판문화운동사>(2007)에 이들이 즉심에 회부됐던 상황이 잘 기록돼 있다.

"1984년 12월27일 도서출판 일월서각 대표 김승균 씨가 경찰관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영장도 없이 연행되었으며, 이튿날에는 편집부장 송세경씨와 번역자 김자동 씨도 연행되어 당시 일월서각에서 발간한 <π=10•26 회귀>(스티브 셰이건)라는 소설에 관해 조사를 받았다. 그 조사기간이 김자동•송세경 씨의 경우 90여 시간, 김승균 씨의 경우 110시간에까지 이르러 구속시한인 48시간을 훨씬 지나도록 불법적으로 장기 구금당했으며, <π=10•26 회귀>가 단지 정치관계 추리소설인 <The Circle>이라는 책을 번역한 것일 뿐인데도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김승균 씨는 구류 15일, 김자동•송세경 씨는 구류 10일의 체형을 받았다."

사법부의 판단이 180도로 달라졌는데, 이는 6월 항쟁이 사법부 독립에 긍정적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기도 하다.

순자의 전성시대 : 책

출판사 들이닥친 형사, 여자 직원에게 한 말 ‘충격’ ‘경악’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 평화 시위 현장. <한겨레> 자료사진

1986년 3월 29일 기획출판 거름의 박윤배 발행인이 공개수배됐다. <일과 힘과 삶>이라는 부정기간행물을 발간하려다 경범죄처벌법 상의 ‘유언비어 날조·유포’ 혐의를 받은 탓이다. 출판사 사무실에 불똥이 튀었다. 서울 청량리경찰서 수사과 형사 5명과 서대문경찰서 대공과 2명, 종로경찰서 정보과 형사 3명이 장장 보름간 거의 매일이다시피 찾아와 행패를 부린 것. 정상적인 영업이 불가능했다. 청량리경찰서 소속 형사들은 출판사 여직원을 사장의 정부라고 몰아붙이고, 전화 수화기에 무전기를 꽂고 방문자들의 신분을 검사해 전과를 조회했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의 출판 탄압을 비판하는 팸플릿.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1980년대에는 작가뿐 아니라 출판사도 고난을 겪었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언론 통폐합 조치와 더불어 <창작과 비평>등 잡지 172종을 무기한 정간조치 했다. 한꺼번에 출판사 617개사 등록을 취소하기도 했는데, 이는 전체 출판사의 23% 수준이었다.

1987년 7월 16일 오후 6시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 제 2차 정기총회가 열렸다. 연합뉴스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가 1987년 6월10일 발간한 <출판탄압백서>가 기록한 전두환 정권의 출판 탄압 유형은 다음과 같다.

- 납본필증 미교부를 통한 도서 판매금지
- 정기간행물·출판사 신규 등록 금지 및 폐간·등록 취소
- 출판사·서점·인쇄소 압수수색과 도서 압류
- 출판사 발행인, 편집자, 영업자 구속
- 집필 단계 원고 압수 및 수정 요구
- 세무조사·판매금지 도서에 대한 광고 탄압

1980년대 출판문화운동을 기록한 책 <한국출판문화운동사>에 따르면 제5공화국 하에서 서점 주인들이 불법 연행된 사례는 모두 48건이다. 경범죄처벌법을 적용한 출판사 압수수색은 28개사 40회, 1986년 5월부터 1987년 6월까지 서점 압수수색은 전국 68여 곳 126여회에 이른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어이없는 일도 잇따랐다.

원서는 금지하고 번역본은 허가
<칼 마르크스의 철학과 신화>(로버트 터커 지음, 평민사 펴냄)

다른 잡지나 도서에 여러 번 게재되었던 내용을 단행본으로 묶어 발간했는데 판매금지
<JP와 HR>(이상우 지음, 원음출판사 펴냄)

내용도 안 읽어보고 책 회수 요구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에게)(김진경 외 저, 공동체 펴냄)

“1987년 3월24일 문공부는 도서출판 공동체의 발행인인 나혜원씨에게 책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에게>에 대해 판매중지는 물론 시중서점에 나가 있는 책을 모두 회수하도록 요구하며 각서를 강요했다. 나씨가 “책 내용을 읽어보았느냐, 내용의 어떤 점이 문제가 되는가”라고 항의하자 나중에 내용을 검토 수정을 요구할 테니까 일단 수거하라고 답변했다. 책 내용에 대한 검토도 없이 관계기간 요청으로 시판 중지를 종용한 대표적 사례다.”<한국출판문화운동사> 발췌

전두환이 이 책을 싫어합니다

순자의 전성시대 : 노래

묻지 말아요 내 이름은 묻지 말아요

김민기의 첫 앨범에 수록된 ‘아침이슬’은 세상에 알려지기도 전에 탄압을 받았다. 양희은의 목소리를 타고서야 거리의 노래로 퍼져나갔는데, 당시 사람들이 모여 ‘아침이슬’을 부르기만 해도 시위로 여겨지곤 했었다. 1987년 6·29선언 직후 방송심의위원회는 돌연 ‘방송금지가요 재심의’를 추진한다. 이를 계기로 금지곡들이 풀리기 시작했다. 촛불광장에서 울린 ‘임을 위한 행진곡’(1981, 작사 백기완·작곡 김종률) ‘아침이슬’(1970, 작사·작곡·노래 김민기) ‘사노라면’(1966, 작사 김문응·작곡 길옥윤·노래 쟈니리) 등이 모두 금지곡이었다. 지난해 겨울, 타락한 권력에 분노하고 상처 받은 시민들은 30년 전 ‘6월의 시민들’로부터 위로받은 셈이다.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지난해 11월26일 서울 광화문광장 무대에 오른 가수 양희은과 100만 시민이 ‘아침이슬’을 함께 부르고 있다. 

음악에 대한 법적 규제는 1965년 3월 ‘음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면서 법제화된다. 사실 금지곡이 가장 많이 지정된 때는 70년대다. 80년대는 공식적으로, 또 비공식적(주로 정치적 이유)으로 가요에 가위질을 한 시기. 대표적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있다. 
또 군의 사기를 저하한다는 이유로 ‘늙은 군인의 노래’(1978, 작사·노래 양희은, 작곡 김아영)를, 한-일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로 ‘독도는 우리 땅’(1982, 작사·작곡 박인호, 노래 정광태) 등이 묶였다. 

어이없는 금지사유가 많았다. 1998년까지 존속된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의 ‘대중가요 심의 자료’를 보면, 원제목이 ‘내일은 해가 뜬다’인 ‘사노라면’은 ‘그럼 오늘은 해가 안 떴냐’며, 한대수의 ‘물 좀 주소’(1974)는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며, 송창식이 부른 ‘왜 불러’(1975)는 ‘왜 반말이냐’며,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1985)은 ‘허무주의를 조장한다’며, 배호가 노래한 ‘0시의 이별’(1971)은 ‘통금 시간인 자정에 이별하는 게 말이 되냐’며 금지당했다. 

제목에 대통령의 부인 이름이 사용돼서 금지된 곡도 있다. 심수봉이 노래한 ‘올가을엔 사랑할 거야’가 바로 그 주인공. 원제목이 ‘순자의 가을’(1980)인 이 노래는 전두환씨의 부인 이순자씨의 이름과 겹친다는 이유로 금지됐다가 제목을 바꾼 뒤에야 음반을 발표할 수 있었다. 

 
묻지 말아요 내 나이는 묻지 말아요
올가을엔 사랑할 거야
나 홀로 가는 길은 너무 쓸쓸해 너무 쓸쓸해
창밖엔 눈물짓는 나를 닮은 단풍잎 하나
아, 가을은 소리 없이 본체만체 흘러만 가는데
가지 말아요 오늘만은 떠나지 말아요
나는 당신 사랑하니까
이대로 가면 나는 너무 쓸쓸해 너무 쓸쓸해
달빛은 화사하게 겨울 가로등 불빛을 받아
아, 오늘도 소리 없이 비쳐만 주는데 변함없이…  (심수봉 ‘순자의 가을’ 가사)

가수 심수봉은 2012년 2월 <한국방송>(KBS)에 출연해 ‘순자의 가을’(1980)이 금지곡이 된 이유가 제목에 당시 영부인 이름이 쓰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국방송 제공

 심수봉 3집에 수록된 ‘순자의 가을’은 박호태 감독의 영화  <아낌없이 바쳤는데>(1980)의 음악으로 쓰였다. 심수봉은 이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 오리지널 버전을 보면 순자는 가정부의 이름이다. 순자라는 이름은 노래 제목에선 검열됐지만, 시나리오에선 삭제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창작자인 심수봉은 2012년 2월  <한국방송>(KBS)에 출연해 “그땐 영부인 이름은 가능하면 못 쓰게 했다. 밑에 사람들이 알아서 처리하는 것”이라며 심경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순자의 가을’은 제목을 ‘올가을엔 사랑할 거야’로 변경한 뒤 1983년 가수 방미가 불러 큰 인기를 얻는다. 1984년 방송출연 금지 조치가 해제된 심수봉은 그제야 자신의 목소리로 이 곡을 취입할 수 있었다. 

영화 <순자야>의 주제곡 ‘순자야 문 열어라’를 실은 가수 김철의 1집 음반. maniadb 제공

대중가요 속 ‘순자의 수난’은 이게 처음이 아니었다.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가 일으킨 12·12 사태 나흘 뒤인 1979년 12월16일 개봉된 영화 <순자야>(감독 박호태)의 주제곡 ‘순자야 문 열어라’(작사·작곡 정민섭, 노래 김철)도 발매하자마자 방송금지를 당했다. ‘순자야 문 열어라’는 ‘사랑의 문으로’라는 제목으로 바뀌었지만 이미 설 무대는 사라진 뒤였다. 가수 김철은 이후 김현준으로 활동명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순자야 문 열어라 활짝 웃는 얼굴로
바람 불고 비 온다고 찡그릴 수야 없지
마음을 활짝 열고 하늘을 보자
내일의 푸른 꿈 약속을 하자
눈물일랑 삼키고 행복의 문을 열어라
슬픔일랑 이기고 사랑의 문을 열어라
순자야 문 열어라 활짝 웃어라
바람 불고 비가 와도 곱게 웃어라  (김철 ‘순자야 문 열어라’ 가사)

금지의 이유가 웃길 만큼 황당한 이유는 창작 의도는 무시하고 청자의 반응만 잣대로 삼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청자는 독재 권력에 한정된다. 금지곡을 양산하는 심의나 검열은 권력이 사회와 개인을 통제하는 과정에서 탄생하는데, 그 의도를 숨기려다 보니 어이없는 이유를 갖다 붙일 수밖에 없던 것이다. 

김창완 밴드 ‘금지곡’ 뮤직비디오. 로엔엔터테인먼트 제공 

끝내주는 ‘진짜 금지곡’은 따로 있다. “학대하지 말아요, 훼손하지 마세요, 우리는 곧 떠날 몸이에요, 그렇게 미워해서 뭐할래요, 인생 별거 아니에요, 거기서 거기예요” 이런 노래.
한국 대중음악사에 ‘금지곡’이란 제목을 가진 작품이 딱 하나 있다. 김창완밴드가 2012년 4월 발매한 앨범  <분홍굴착기>의 타이틀곡 이름이 바로 ‘금지곡’이다. 보컬 김창완은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진흙탕 정치판과 만연한 폭력 등 사회문제에 환멸을 느끼면서 만든 곡이 ‘금지곡’”이라며 “이를 도발적이고 반어적인 제목으로 표현했다”고 밝혔다.

순자의 전성시대 : 노래

‘트러블 메이커’들이 피부 트러블은 싫어합니다

1987년 방송위원회 사무처 평가심의국 심의운영부가 낸 ‘방송금지가요 가사철’엔 금지사유와 방송금지 해제일이 나와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금지사유인 ‘저속’은 ‘가사 저속’ ‘곡 저속’ ‘창법 저속’으로 나눠 검열됐는데, 대부분이 ‘가사 저속’에 속했다. 주로 ‘세레나데’가 대상이었다. 대중가요의 단골 소재인 사랑의 표현들이 저속하다는 이유였다. 흥미롭게도 피부 트러블을 묘사한 ‘생활밀착형 가사’도 금지곡 목록에 올라 있었다. 

‘여드름 타령’  (작자 미상, 김상국 노래)  왔구료 나왔구료 그리운 그대
왔구료 나왔구료 그리운 여드름
멀고도 긴 세월을 용케도 자랐다
쓸쓸한 검은 얼굴 볼수록 기괴해
꽃바람 스쳤다고 오! 돋아났구료
드름 드름 여드름 알찬 여드름

아가씨들 보구료
날 좀 보구료
어른이 되느라고 요모양 요꼴이요
이 심정 참다 못해 움터 났구료
꽃바람 꿈을 타고 아! 드름이 났구료
드름 드름 여드름 알찬 여드름 
‘노처녀의 첫사랑’ (작사·작곡 황우루, 노래 김상희)  올드미스 노처녀가 바람났다 웃지 마소
임 생각에 잠 못 이뤄 설레이는 이 내 가슴
다 떨어진 헌 신발도 임자 있고 짝 있는데
못생기고 무식하고 부모 형제조차 없는 몸
그러나 나에게도 순정은 있어요
올드미스 노처녀의 부끄러운 첫사랑을
누구에게 드릴까요 신용있게 받으세요 (⇒ ‘귀여웁게 봐주세요’로 심의)

올드미스 노처녀가 날 때부터 따로 있나
시집 못 가 나이 들면 별 수 없는 노처녀지
나도 한땐 눈이 높아 많은 남성 울렸지만
가슴 두근 얼굴 화끈 내 마음을 나도 몰라
그러나 나에게도 드라마는 있어요
고목에서 꽃이 피듯 노처녀의 첫사랑을
누구에게 드릴까요 눈 딱 감고 받으세요 (⇒ ‘봐주세요’로 심의) 

순자의 전성시대 : 노래

심의위도 인정한 억지검열의 상징 ‘방송부적’

1987년 8월 방송심의위원회의 국내가요 금지사유는 ‘표절’ ‘왜색’ ‘저속’ ‘퇴폐’ ‘방송 부적’ ‘월북’ ‘애상·허무·비탄’ ‘불건전’ ‘품위 없음’ ‘기타(주체성 저해, 불신 조장, 비참·잔인, 기타)’ 등이다. 국내가요 금지곡 839곡 중 ‘방송 부적’인 곡은 36곡. 당시 방송금지가요 해제 심의기준(안)을 보면 ‘방송 부적’을 “시의에 부적, 금지사유가 애매모호”로 정의하고 있다. 다시 말해 ‘방송 부적’은 저속도 아니고, 왜색도 아니고, 표절도 아니고, 작가가 월북한 것도 아닌, ‘어쨌든 안 된다’는 억지의 다른 표현이었다. 

‘방송금지가요 해제 심의기준(안)’(1987)

고래사냥 (작사 최인호, 작곡·노래 송창식)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불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삼등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긴밤에 꾸었던 꿈에서 깨어 아침에 일어나면 잊혀지지만
그래도 생각나는 내 꿈 하나는 조그만 예쁜 고래 한마리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소리치며 고래 잡으러

우리의 사랑이 깨진다 해도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는다 해도
모두들 가슴에 뚜렷이 남은 한 마리 예쁜 고래 하나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소리치며 고래 잡으러
아침이슬 (작사·작곡 김민기, 노래 양희은)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낱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순자의 전성시대 : 노래

일본군 장교 출신 독재자 일본풍 혐오했다?

두 번째로 많은 금지사유가 바로 ‘일본풍’이었다. 대표적인 왜색 금지곡은 ‘동백 아가씨’. 이 곡은 20년 넘게 전파를 타지 못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잊혀지긴커녕 불후의 명곡으로 남았지만.

1987년 8월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해금 소식을 전하는 한국방송(KBS) 뉴스. 한국방송 제공  

‘동백 아가씨’는 박정희 정권의 희생양이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1965년 사회 일각의 강한 반대 속에 ‘한·일 기본조약’(한·일 국교 정상화) 체결을 밀어붙인 박정희 정권이 인기 가요인 ‘동백 아가씨’를 일본 가요 엔카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금지시켰다. 이미자는 지난해 2월  <와이티엔>(YTN)에 출연해, 정작 이 노래를 금지시킨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신을 청와대로 초대해 ‘동백 아가씨’를 불러달라고 할 만큼 이 노래를 즐겼다고 말했다.

최근 누리꾼들 사이에서 수능 금지곡으로 떠오른 트로트 ‘아모르 파티’. 이 노래를 부른 김연자도 ‘금지곡 가수’였다. ‘아모르 파티’는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중독성 때문에 에스엔에스(SNS)를 중심으로 크게 히트했다. 흥이 폭발하는 비트와 “나이는 숫자, 마음은 진짜~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같은 가사가 젊은 귀를 사로잡았다. 왜색으로 금지된 ‘나는 바보야’(1976)가 1987년 해금되면서 김연자도 ‘금지곡 가수’ 목록에서 이름을 지웠다. 

나는 바보야 (작사·작곡 김학송, 노래 김연자)  울기가 싫어서 사랑을 말자고 입술을 깨물면서 다짐했는데 다짐했는데 아~ 당신이 얄미운 당신이 왜 나를 버렸나요울리시나요 이럴 줄 알면서도 너무나 사랑한 나는 바보 나는 바보야

순자의 전성시대 : 노래

정의를 질식시킨 시대가 질색한 단 하나의 느낌 

금지사유 중 ‘애상, 비탄, 허무, 체념’ 항목은 주목할 만하다. 전체 금지곡 가운데 3.2%로 비교적 적은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개인의 감정을 표현한 가사를 금지사유로 삼은 점은 대중가요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문화적 횡포로 읽힌다. 87년 재심의에서 ‘애상, 비탄, 허무, 체념’이 금지사유인 곡은 모조리 해제됐다. 

사의 찬미 (작곡 Iosif Ivanovich, 노래 윤심덕)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하느냐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기러기 아빠 (작사 김희중, 작곡 박춘석, 노래 나훈아) 산에는 진달래 들엔 개나리
산 새도 슬피우는 노을진 산골에
엄마구름 애기구름 정답게 가는데
아빠는 어디갔나 어디서 살고있나
아아~~~~아아아~~~~아아
우리는 외로운 형제 길잃은 기러기
하늘엔 조각달 강엔 찬바람
제 너머 기적소리 한가로운 밤중에
마을마다 창문마다 등불은 밝은데
엄마는 어이갔나 어디서 살고있나
아아아~~~~~아아아~~~~~~아아
우리는 외로운형제 길 잃은 기러기

엑스(x)가 그이고 '금지'라고 적힌 60~80년대 악보와 노랫말들. 국가기록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순자의 전성시대 : 영화

순자를 순자라 부르지 못하고

길남은 군 입대를 앞두고 친구들과 술에 취해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런데 하필이면 노랫말 속에 전두환씨의 부인을 연상시키는 ‘순자’가 등장한다.

<바람 불어 좋은 날> 검열 전 시나리오

10시간이 넘는 검열이 이어졌다. 안기부, 보안사, 문공부의 검열관들은 영화<바람 불어 좋은 날>에 등장하는 순자에 꽂혔다. 영화는 소설가 박완서의 완고한 주장으로 결국 ‘순자’만 잘린 채 개봉관에 걸렸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직후였던 탓에 당시 영화 검열은 더욱 엄격했다.

<바람 불어 좋은 날> 장면

제작후일담을 보면 어이없는 사회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다.

“최일남의 소설<바람 불어 좋은 날>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의 각색은 실제로 시인이자 소설가인 송기원이 완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수사기관을 피해 다니던 송기원은 자신의 이름을 넣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해 크레딧에서 이름을 뺐다고 한다. 그는 결국 국가보안사범으로 수감되었다”

당시 12·12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은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는 국민의 불만을 스포츠와 대중문화 쪽으로 돌리려고 애썼다. 이른바 ‘전두환의 3S 정책(섹스·스포츠·스크린)’이다.

영화 검열 승인 처리 절차 및 신청 기재 방법

특히 사회 문제를 다룬 한국영화에 대한 검열이 혹독했다. 이중검열 혹은 삼중검열을 당하는 영화도 수두룩했다. 그때의 영화 검열 승인과정을 살펴보면, 장르와 관람 나이 등과는 별도로 반공영화와 계도영화 여부를 기재하도록 했다. 영화가 만들어진 배경이 이렇다.

“이장호 감독은 대마초 사건으로 활동이 정지된 4년간 농촌문학에 심취했으며, 사회현실을 반영하는 본격적인 리얼리즘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갖게 되었다” - 영화<바람 불어 좋은 날>제작노트

1987년 3월 26일자 동아일보

정부의 의도대로 ‘개봉하는 한국영화 대부분이 에로물’이었을 당시 영화계에서<바람 불어 좋은 날>이 가지는 의미는 적지 않았다.

<바람 불어 좋은 날> 관객 혹평 1차분

이 감독은 영화 홍보를 위해<바람 불어 좋은 날>의 관객 혹평을 공개모집하기도 했다.

<바람 불어 좋은 날> 포스터(왼쪽)와 영화 장면

감독의 노이즈 마케팅 덕분이었을까. 이 감독은 공백을 뚫고 재기에 성공했다. 아역으로 데뷔한 배우 안성기는 학업과 군복무로 활동을 중단했다가 이 작품으로 복귀, 1959년 이후 21년만에 대종상 신인상을 받았다.

1980년대 영화 검열을 맡았던 기관은 문공부. ‘전두환의 3S 정책’으로 인해 검열은 다소 관대했다. 여느 때보다 선정적인 영화가 성행한 까닭이다.

<무릎과 무릎사이> 영화 검열 대본

순자의 전성시대 : 영화

씬 83 광주검찰청등 64개 장면 자진삭제

영화<최후의 증인>은 운명적으로 얽힌 비운의 주인공을 통해 한국전쟁이라는 시기에 수난당해 온 힘없는 개인의 상처를 다뤘다.


<최후의 증인> 영화 검열 합격증(위)와 <최후의 증인> 시나리오 검열 합격증(아래)

올해 2월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돼 눈길을 끌었다. 개봉 37년만의 일이다. 이미 해외에서 먼저 알아본 수작이지만, 개봉 당시에는 무참한 가위질을 당했다. 제작노트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검열 시사실에는 중앙정보부 요원, 내무부 치안 담당자, 문공부 직원 등이 함께 들어갔다. 합동 검열이었다. 합동 검열자들의 일관성 없는 잣대에 많은 영화인들이 분노했다. 1980년대 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1987년 9월 2일자 동아일보(위)와 1987년 3월 25일자 동아일보(아래)

<최후의 증인> 포스터(왼쪽)와 영화 장면

순자의 전성시대 : 영화

공장지대 판자촌은 절대 안 돼

영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동명 소설가인 조세희가 직접 각색한 시나리오에, 당시 금지조치를 당한 김민기가 음악을 맡아서 공장지대의 삶을 담을 예정이었다. 신군부는 가난한 공장지대가 내키지 않자 어김없는 검열에 들어갔다. 다른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었다. 시골마을 대신 고층 건물이 들어선 도시로,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 도로 대신 쭉 뻗은 고속도로로 바꾸라고 강요했다. 시나리오와 거리가 먼 장면은 조잡한 편집을 불러왔고, 감독의 의도와 무관하게 전체 스토리를 크게 해칠 수밖에 없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개작 줄거리 대비표

김민기의 음악도 검열 대상이었다. 김민기의 곡은 일체 ‘사용불가’ 판정이 내려졌다. 1차 시나리오, 2차 영화 등 이중검열에 걸려 각본은 공중 분해됐다. 결국 공장지대는 개작을 거듭, 염전지대로 바뀌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사유서

끝이 아니었다. 제작이 끝난 영화는 장면마다 가위질을 당한 탓에 너덜너덜해졌다. 배우들의 대사조차 후시녹음 과정에서 다시 고쳐지는 수모를 당했다. 서슬 퍼런 검열은 ‘아~ 대한민국’의 인위적인 모습으로 바뀌어 영화 군데군데 느닷없이 등장했다. 서민의 삶은 철저히 외면됐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포스터(왼쪽)와 영화 장면

순자의 전성시대 : 영화

애마부인 알고 보니 삼베를 사랑했네?

<애마부인> 극영화 제명 변경 승인서

영화<애마부인>은 제목을 ‘愛馬夫人’에서 ‘愛麻夫人’로 교체한 뒤 개봉할 수 있었다. 검열 당국은 승인 과정에서 제명을 반드시 한자로 표기해야 한다고 단서를 달았다. 말을 타고 내달리던 애마부인이 갑자기 삼베를 사랑하는 부인으로 변신하고서야 허가가 떨어졌다. 19금 에로영화가 블랙코미디로 바뀌는 웃지 못할 순간이었다. 자, 이제 제목을 바꿨으니 삼베를 사랑한 애마부인은 관객을 만날 수 있었을까?

영화 검열 문서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애마부인> 극영화 제작 신고에 대한 회신​

에로티시즘을 권장하던 시절이었지만, 도덕과 윤리는 지켜야 한다는 나름의 잣대가 작동했다. 자신들은 정치권력을 찬탈하는 과정에서 어떤 도덕과 윤리도 없었으면서 말이다. 문화예술계에는 ‘기준 없는’ 엄격함을 들이댔다.

1982년 1월 16일자 경향신문(왼쪽), 1982년 3월 29일자 동아일보(오른쪽)​

서른 여섯 군데가 찢기고 제목까지 바뀐<애마부인>은 첫 심야극장에 등장, 통금 해제까지 맞물려 흥행돌풍을 일으킨다.


1982년 2월 1일자 동아일보 광고(위)와 <애마부인>포스터와 영화 장면(아래)

만든 사람들

  • 기획 취재 : 이유진, 석진희, 강민진, 이화섭
  • 그래픽 디자인 : 강민진
  • 제작 : 디지털기술부

참고문헌

<6월 항쟁을 기록하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2007)
<한국출판문화운동사>(한국출판문화운동사 편집위원회·2007)
<국가보안법 적용상에서 나타난 인권 실태>(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2004)
<한국문학필화작품집>(김지하·한수산 외 13명·1989)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사진으로 보는 만화야사22_안의섭, 박현석, 서봉재’(박기준)
중앙선데이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4>-한수산 필화사건’(정규웅)
1980년대 금서 관련 문서사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노래 <한국 금지곡의 사회사>(문옥배·2004)
<한국가요사2>(박찬호·2009)
<낭만광대 전성시대>(오광수·2013)
<나의 문화편력기>(김창남·2015)
국가기록원 웹진 ‘기록인’ 32호 ‘광복 70주년 기록으로 본 금지곡들’
영화 <한국영화역사 속 검열제도>(한국영상자료원·2016)
영화 스틸컷·제작노트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영화 검열 자료 영상도서관·영화박물관 제공
영화 검열 자료 영상도서관·영화박물관 제공

사진 <한겨레>자료사진, 연합뉴스, 네이버 영화·뉴스 라이브러리

만든 사람들

  • 기획 취재 : 이유진, 석진희, 강민진, 이화섭
  • 그래픽 디자인 : 강민진
  • 제작 : 디지털기술부

참고문헌

<6월 항쟁을 기록하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2007)
<한국출판문화운동사>(한국출판문화운동사 편집위원회·2007)
<국가보안법 적용상에서 나타난 인권 실태>(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2004)
<한국문학필화작품집>(김지하·한수산 외 13명·1989)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사진으로 보는 만화야사22_안의섭, 박현석, 서봉재’(박기준)
중앙선데이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4>-한수산 필화사건’(정규웅)
1980년대 금서 관련 문서사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노래 <한국 금지곡의 사회사>(문옥배·2004)
<한국가요사2>(박찬호·2009)
<낭만광대 전성시대>(오광수·2013)
<나의 문화편력기>(김창남·2015)
국가기록원 웹진 ‘기록인’ 32호 ‘광복 70주년 기록으로 본 금지곡들’

영화 <한국영화역사 속 검열제도>(한국영상자료원·2016)
영화 스틸컷·제작노트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영화 검열 자료 영상도서관·영화박물관 제공

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연합뉴스, 네이버 영화·뉴스 라이브러리

Table of Contents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