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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잇값하며 살자, 밥값하며 살자

등록 :2021-02-14 17:22수정 :2021-02-14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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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새해 신축년, 1월 초순에 볼일이 있어 이른 아침 종무소에 들렀다. 일하시는 재가자 법우님들과 차를 마시면서 가벼운 정담을 나누었다. 새해이니 만큼 한 살 더한 나이를 말하게 된다. “어, 그러고 보니 나도 어느덧 이순(耳順)을 맞았네” “아니, 스님은 그리 안 보이는데 진짜 60이에요?” 이 순간, 짐짓 하는 덕담에 은근 기분 좋은 표정을 지어야 하나. 그저 다만 들을 뿐이다. 같이 자리한 법우가 자기는 지천명(知天命)이라고 들이댄다. 그러자 좌중의 막내가 끼어든다. “어머, 그럼 나도 이제 불혹(不惑)이네요.” 서로들 가볍고 크게 웃었다. 의도하지 않게 덕담의 자리가 세대 간의 담합의 자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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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 두 귀가 순해져야 하는 시간

이순이라니, 이렇게 적지 않은 세월을 건너왔구나. 이제는 두 귀가 순해져야 하는 시간이다. 그렇다. 나는 살만큼 살아오면서 숱한 허물과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러니 부디 정신 바짝 차리고 죽는 순간까지 잘 살아야 한다. 이런 마음이어서 그런가. “눈보라여, 오류 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황지우 시인의 시 <눈보라>의 이 구절이 귀에 솔깃하고 마음을 찌른다.

그렇다. 나는 지금 분명 후회하고 자책하고 있다. 아울러 지금의 후회가 좌절과 절망이 아님도 분명하다. 하여, 지금의 후회는 지금의 희망이다. 지난 시간에 내가 저지른 일들은 첫 번째 맞은 화살이다.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으려면, 오류를 마주하면서 작은 깨달음을 일으키는 일이다. 나이를 충분히 먹었으니 이제야 철이 드는 모양이다.

해가 바뀌면 사람들은 덕담을 나눈다. 나이에 따라 건네는 덕담도 다르다. 어린 학생들이 세배하면서 나에게 “오래 사세요,”라고 인사한다. 어느덧 오래 살아야 할 나이가 되었나 보다. 요새 몇 년간 새해에는 언론들이 철학자인 김형석 교수의 말씀을 전한다. 올해 102세이니 만큼 오랜 연륜 속에서 삶의 지혜를 구하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의 진정한 전성기는 60세에서 75세라는 노학자의 말씀이 가슴에 닿는다. 공감하기 때문이다. 이런 말씀에 내 귀가 솔깃하는 것을 보면 나도 나이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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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순간에 어떤 마음이 들까’

이순에 들어서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수명에 관심이 들었다. 그래서 검색을 해 보았다. 지금 내 나이를 기준으로 분류해 본다. 먼저, 지금의 나보다 적은 수명으로 생을 마감한 분들은 다음과 같다. <월든>의 주인공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1817~1862)는 45세를 살았다. <1984>와 <동물농장>의 작가 조지 오웰(1903~1950)은 47세, <신곡>의 단테(1265~1321)는 56년을 살았다. 이 사람들의 수명을 생각하면서 지금의 나를 생각한다. “나는 뭘 이루었지?‘라는 지극히 단순한 물음이 든다. 인생이 무얼 이루고 못 이루고의 기준과 평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참 쓸쓸한 기분이 든다. 생의 온갖 치욕을 딛고 살아온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60세에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럼 지금 그와 같은 나이에 들어선 내가 올해 죽는다면 죽음의 순간에 어떤 마음이 들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님의 침묵>의 만해(1879~1944)는 65세, 한국의 위대한 사상가 원효(617~686)는 69세, 세계적인 명필이자 금석학자인 추사(1786~1856)와 성리학의 집성자 주희(1130~1200)는 70년을 살았다. 이들을 떠올리면서 내가 살아갈 햇수가 10년 정도 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헤아림은 좀 긴장되면서 기분이 묘하다. 은근 조바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나의 스승 석가모니 부처님은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셨다. 스승을 생각하면서 나의 삶이 대략 20년 정도 남았다고 헤아리니 좀 안심이다. 이러고 보니 참 내 모습이 궁색해진다.

명색이 늙음과 죽음의 끈에서 자유로워야 할 수행자의 마음 꼴이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김형석 선생의 연세와 120세까지 살았다는 중국의 조주 선사를 떠올리면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지난날의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고, 크게 후회하지 않는 삶을 경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역시 속물적 중생심이다. 알 수 없구나, 사람의 마음이여!

‘인생의 전성기는 60세에서 75세’라는 예언을 나는 공감한다. 지난날의 견해와 행위의 오류를 인정하고, 다시는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고,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내고, 의미 있는 일들에 전념하면, 좌절도 부끄러움도 실패도 디딤돌이 되어 빛나는 결실을 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나는 단언한다. 1977년 가출은 첫 번째 출가였고, 2021년 지금은 제2의 출가라고, 그리고 이 생을 마감하는 그때가 제3의 출가라고. 그리고 나는 날마다, 매 순간순간 출가할 것이다. 낡은 생각과 습관을 바로 보고 벗어나는 걸음걸음이 바로 출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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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묻힐 곳을 정하다 

잠시 말의 발길을 돌려보기로 한다. 나는 작년에 내가 죽을 자리를 미리 마련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묻힐 곳을 정했다. 석가모니 부처님 이래 불교 수행자들은 생을 마감하면 다비를 한다. 태운다는 의미의 범어 자피타(jha- pita)을 음역한 다비(茶毘)를 마치면 돌로 만든 부도(浮屠)에 안치한다. 고찰 주변에 가면 부도를 많이 볼 수 있다. 지금은 세속의 풍습에 따라 스님들도 더러 수목장을 하기도 한다. 재작년에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실상사의 한 스님도 절 주변의 소나무 아래 유골을 모셨다.

나는 돌로 만든 부도와 수목장을 보면서 내가 묻힐 곳을 좀 기특하게 해 보자, 하는 호기심과 장난기가 발동했다. 한국불교사에서, 일반사회에서 한 번도 시도한 적이 없는 새로운 무덤 찾기에 틈틈 골몰했다. 그런 발상은 곧 발견으로 이어졌다. 매우 멋지고, 자연친화적이고, 돈이 그리 들지 않는 죽을 자리를 발견했다.

실상사는 매주 수요일 승속의 모든 대중이 모여 농장 공동 울력을 한다. 작년 가을이었던가. 매우 넓은 밭에서 고구마를 캐다가 문득 밭 가운데 놓인 듬직한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아! 바로 이거다,라고 조용히 소리를 질렀다. 이 바위를 내 부도(무덤)로 하면 좋겠구나. 내 유골을 이 바위 아래 묻고 생몰연대와 출가연도만을 새긴 작은 표식만 하면 멋진 부도가 된다.

이름도 정했다. 이른바 ‘고인돌 부도’라고. 실로 멋지고 기막힌 발상 아닌가. 이후 여러 스님들에게 고인돌 부도에 대해 말하니 매우 좋은 제안이라고 동의한다.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여기에 묻히면 밭일을 하다가 새참에 시원한 막걸리 한 잔 건네라고 부탁했다. 가끔 이곳을 산책하면서 나의 고인돌 부도를 보면 마음이 그리 편할 수 없다.

멋진 죽을 자리를 마련하고 나니 이제는 호흡이 멈추는 마지막 순간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했다. 답은 이렇게 정했다. “나이 값 하고 살자. 밥값하고 살자.” 나이란 숫자만을 의미하지는 않겠다. 살아온 그만큼의 시간에서 우러나오는 견해와 처신을 뜻한다. 치우침 없는 견해, 생각과 행위가 절제되고 균형 있고 조화롭게 사는 일이 나잇값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식과 수려한 언설보다는 일상의 삶으로 말해야 할 것이다. 여기저기에 쓸 데 없이 나서고 간섭하는 것도 멀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겸손하고 묵묵하게 살아야 한다. 덕스러워야 한다는 뜻이다. 내 견해와 방식을 대중에게 주입시키는 것이 바로 ‘가르치려는’ 수작이다. 그러니 말하기보다 열린 귀와 따듯한 마음으로 듣는 일, 지시보다는 먼저 묵묵하게 행하는 것이 바로 나이에 걸맞은 값이 아니겠는가. 나서야 할 때와 나서지 않을 때를 잘 가려야 할 것이다. 이른바 품행이 방정하고 타의 모범이 되어야 나잇값 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밥값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대중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하는 것이다. 밥값은 세간 벗들에게 받은 최소한의 보답이다. 밥값은 최소한의 부끄럽지 않은 염치이다.

스님들은 열반 할때 대중에게 한 생을 마감하는 소감을 남긴다. 이를 흔히 열반송(涅槃頌)이라 한다. 대개 열반송은 생사가 둘이 아님을, 흔적 없이 후련하게 생을 마감하는 기쁨을, 기꺼이 이승의 옷을 벗는 자유로움을 전하고 있다. 죽음에 대한 남다른 관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열반송 중에서 나는 청화 스님(1923~2003)의 말씀이 가장 가슴에 남는다.

이 세상 저 세상

오고 감을 상관치 않으나

은혜 입은 것이 대천세계만큼 큰데

은혜를 갚는 것은 작은 시내 같음을 한스러워할 뿐이네

거창한 생사 초탈의 경지를 보여주는 여느 열반송과는 달리 시주의 은혜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 내 마음을 울린다. 이 게송을 대할 때 평화로운 죽음은, 멋진 죽음은, 후회하지 않는 죽음은, 늘 은혜를 생각하면서 참되게 사는 일임도 깨닫는다.

올해 실상사에서 새로 만든 <21세기 약사경>에는 ‘삶도 빛나고 죽음도 빛나라’라는 말이 있다. 이 문장을 되새김하면서 빛나는 죽음이란 무엇일까,를 자문한다. 나날의 삶이 진실하고 의미 있고 성실하게 살면 한 생도, 죽음의 순간도, 빛날 것이다. 죽음의 순간은 나날의 매 순간의 삶과 별다른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에 나는 어떤 심정일까,를 미리 짐작해 본다. 아니 이렇게 말하고 싶다.

“분에 넘치게 산천초목과 이웃 사람들에게 많은 신세를 지고 살았습니다. 모든 분들의 도움으로 한 세상 그런대로 잘 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늘 안녕하시기를...”

법인 스님 ㅣ 실상사 한주 &실상사작은학교 철학선생님 &전 조계종 교육부장 &전 참여연대 공동대표.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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