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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회일반

“‘유서대필’ 설명하기 어려웠는데, 요즘은 쏙쏙 이해하신다”

등록 :2013-10-18 20:29수정 :2013-10-20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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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북촌 카페에서 만난 강기훈씨는 “최근 조작간첩 피해자들의 모임에 종종 참석한다. 고통을 겪은 사람들 사이에서치유를 받는 경험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간암을 앓고 있는 강씨는 “몸에 병이 생긴 이후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고, 인간관계도 달라졌다”고 털어놨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북촌 카페에서 만난 강기훈씨는 “최근 조작간첩 피해자들의 모임에 종종 참석한다. 고통을 겪은 사람들 사이에서치유를 받는 경험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간암을 앓고 있는 강씨는 “몸에 병이 생긴 이후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고, 인간관계도 달라졌다”고 털어놨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커버스토리] 강기훈씨 인터뷰
▶ 1991년의 봄을 우울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강경대라는 스무살 청년이 대낮에 경찰에게 맞아죽은 이후 분노에 찬 청춘들이 잇따라 제 몸을 불살랐습니다. 하지만 한 달 만에 한 청년만이 남았습니다. 그 이름은 강기훈. 남의 유서를 대신 쓰고, ‘나가 죽어라’며 동료의 등을 떠밀었다는 비난을 한 몸에 받은 사람입니다. 22년간 결백을 주장하며 한 맺힌 삶을 살아온 강씨는 의외로 인터뷰에서 초탈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대학을 2000년대에 다닌 기자가 보기에 1991년 강기훈(49)씨의 유서대필 논란은 좀 이상한 사건이다. 유서대필, 이름부터 어렵다. 유서를 대신 쓴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라는 걸까.

지난 14일 오후 5시께 서울 종로구 북촌의 한 카페에서 만난 강씨도 “낯선 이들에게 늘 당시 사건을 이해시키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어려운 것은 사건에 대한 설명만이 아니었다. 기억을 꺼낼 때마다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오랜 세월 속병을 앓아온 강씨는 지난해 간암 판정을 받았다. 22년간 그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유서대필 사건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주고 있을까. 강씨에게 물어보았다.

▶관련기사

강기훈, 22년의 기다림
새 증거 ‘전대협 노트’ 김기설씨 필체에 집중

언론은 받아쓰기 또는 진실게임 그 자체에 갇혀

-요즘 젊은 세대들에겐 ‘유서대필’이 생소한 용어다. 유서의 대필 여부가 당시에 왜 그리 중요한 사안이었나?

“지난 20여년간 사람들에게 내가 겪은 일을 설명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1991년에 몸을 불사르는 사람들이 왜 많았고, 유서대필 여부가 왜 중요했는지,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요즘은 달라졌다. 최근에 몇몇 분에게 유서대필 사건에 대해 설명했더니, 그분이 ‘그때도 갑자기 전직 대통령 대화록 공개하고, 검찰총장 쫓아내는 부류의 일들이 있었군요’라며 쉽게 이해했다. 요즘은 참 설명하기가 편하다. 다시 말도 안 되는 일들이 하도 벌어져서….”

-그래도 유서대필 사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어떤 사건인가?

“시대적 배경부터 봐야 한다. 1991년 정국이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노태우 정권은 신군부의 과오를 바로잡지 않았다. 5·18 광주학살 등의 책임자를 처벌하지 않았고, 권력형 비리가 잇달아 터졌다. 국민들이 정부에 실망해 총선에서 야당을 찍어줬더니, 1990년 권력자들이 밀실에서 모여 세 개의 당(민정당·민주당·공화당)을 합쳐버렸다. 이미 학생들과 재야단체 사이에선 부글부글한 정서가 있었다. 그러던 중에 명지대에서 학내 분규가 발생했고, 강경대라는 신입생이 백주에 학교 담벼락에서 경찰에게 맞아 죽었다. 학생들이 분노했고 연세대에 1만명이 넘는 학생들이 모였다.”

-공권력의 폭력에 분노한 건가?

“정권의 대응 방식이 더 큰 문제였다. 강경대를 때려죽인 폭력뿐 아니라, 분노하는 학생들에게 더 큰 폭력을 행사했다. 강압적인 진압이 있었고, 끊임없이 배후에 누가 있다며 반전을 꾀했다. 분노한 학생들은 항의의 방식으로 몸을 불살랐다. 전남대 박승희, 안동대 김영균, 경원대 천세용 등이 이틀여 간격으로 분신했다. 성균관대 김귀정은 경찰의 토끼몰이 진압으로 압사당했다. 죽은 사람이 열명을 넘어섰다. 당시 정권은 죽어가는 사람들의 배후에 아주 극악한 세력이 있다고 퍼뜨리기 시작했다. <조선일보>에 시인 김지하가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썼고, 서강대 박홍 전 총장은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떠들었다. 그들의 시각은 1991년 분신정국의 배후엔 죽음을 부추긴 세력이 존재했고, 그 구체적인 행동이 유서대필이라는 것이다. 나 강기훈이 유서를 대신 써주며 학생들, 노동자들에게 ‘나가 죽어라’고 했다는 것이 그들이 내게 부여한 죄목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황당한 공작이지만 그게 실제 통했다.”

나 강기훈이 유서 대신 써주며
“나가 죽어라”고 했다는 것이
그들이 내게 부여한 죄목이다
설명하기가 정말 어려웠는데
요즘은 쏙쏙 이해들을 하신다

당시 김기춘 법무부장관은
지금 청와대 비서실장이고
남기춘, 강신욱 두 주역은
새누리 대선캠프 등서 활약
곽상도는 당시 수사검사

유서대필은 성공한 공작이었다. 사법적인 판결 이전에 운동권 학생들은 생명을 도구로 삼는 비윤리적인 집단으로 낙인이 찍혔고, 공권력은 더욱 강압적인 탄압에 나섰다. 몸을 불살랐던 학생들은 배후 세력의 조종을 받는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자살방조죄가 그 정도의 근거로 성립이 되는 건가. 유서의 필적감정 외에 다른 증거도 없지 않았나?

“필적감정 외에 그 어떤 증거도 없었다. 심지어 대필했다는 유서가 어디서, 어떻게 작성됐는지도 검찰은 제시하지 못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자살방조죄가 형법상 적용된 예도 드물다고 했다. 그럼에도 이전의 판례나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것은 당시 쟁점이 아니었다.”

-언론이 그런 내용을 보도하지 않았나?

“대다수의 언론은 검찰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쓰기 바빴다. <한겨레>가 검찰의 발표에 비판적으로 접근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진실게임에 갇혔다. 유서를 누가 썼냐, 진짜 강기훈이 썼냐. 그것만이 당시 언론의 관심사였다. 사실 지금과 비슷한 양상이다. 최근에도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무슨 맥락과 배경에서 정권의 견제를 받는지는 관심 밖이고, 언론은 ‘진짜 혼외자식이 있는지’만 관심을 갖는다. 대중의 관심을 진실게임으로만 몰아가고, 언론마저 그 프레임(틀)에 갇히면서 중요한 논의들이 다 사라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강기훈씨의 이전 인터뷰를 보면 사법부와 검찰의 반성을 촉구하는 내용들이 꽤 있다. 지난해 12월 첫 재심 공판에 출석한 강씨는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아 달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그가 조금 달라졌다.

-왜 비슷한 상황이 반복된다고 보나?

“어쩌면 인간이 원래 그런 존재가 아닐까. 인간은 전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다. 오랫동안 사회적인 합의를 통해 법률과 민주적 절차를 마련해도, 작은 모티브(동기) 하나를 주면 이런 것들이 깡그리 무시될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은 상상력이 부재하고, 폭력적이고 야만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상상력은 있지 않나. 악용돼서 문제지만, 유서대필 자체가 상당히 창의적인 기획 아닌가?

“그런 상상력이 아니다. 어떤 비이성적인 동기로 폭력이 발생해도, 비슷한 일의 발생을 막을 수 있는 사고의 힘이 부재하던 것이다. 전세계에서 학살, 전쟁 등 아무 이유 없이 죽는 사람들이 많다. 과거에도 숱한 정치공작이 있었고, 지금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왜 못 막나. 자기와 생각이 다르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향해서 ‘저 자식들은 빨갱이다’ 정도의 프레임을 하나 던져주면 사람들은 즉각 반응한다. 그땐 이성도, 논리도 없다. 법률적인 절차도 소용없다. 유서대필 의혹을 검찰이 처음 제기했을 때, 첫 느낌은 ‘어떻게 저런 황당한 얘기를 할 수 있을까’였다. 하지만 결국 모든 사법적인 절차를 거쳐 법원에서 확정 판결이 나오더라. 조선시대에도 사화를 통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정치적 반대파를 살해했다. 유서대필 사건과 지금 벌어지는 상황이 과거와 무엇이 다른가.”

-그래도 역사는 진보하지 않을까. 유서대필 사건과 비견되는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도 결국 진실이 밝혀졌다.

“120년 전 프랑스에선 철학자, 정치가들 사이에서 인간 이성에 대한 활발한 논쟁이 있었다. 그런 분위기가 있었기에 잠시 사회가 비이성적으로 가더라도 정상을 찾을 수 있었다. 몇몇 사람들의 용기도 한몫했다. 드레퓌스의 무죄를 처음 군 상부에 보고한 피카르 중령은 진실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신문에 ‘나는 고발한다’는 글을 기고한 작가 에밀 졸라는 지속적으로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 결국 졸라는 명예훼손죄로 기소돼 영국으로 망명하고, 작가 생활도 접어야 했다. 그럼에도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12년이 걸렸고,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유족에게 공식 사과하기까진 102년이 걸렸다. 한국 사회에선 재심이 이뤄진 것만으로도 기적이다.”

불탄 주검사진 보여주다 내장탕 시켜준 검사

강씨는 국가정보원이 정치의 전면에 나선 현 상황을 어떻게 볼까. 그에게 정치공작에 대해 물었다.

-다시 정치공작의 시대가 왔다는 건가?

“그건 잘 모른다. 다만 당시 유서대필 사건을 만든 주역들이 다시 보인다. 분신정국이 이어질 때 관계기관 대책회의에 참석했던 법무부 장관이 지금 청와대 비서실장인 김기춘이다. 최근까지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던 곽상도는 당시 수사검사였다. 당시 수사팀에 있었던 남기춘, 강신욱 그때의 주역들이 지난 새누리당 대선캠프 등에서 다시 보였다.”

-신상규 동덕여대 이사장이 수사 당시 폭력을 행사했던 주임검사가 맞나?

“전두환 정권의 폭압을 경험했기 때문에 당시 감수성으론 전기고문, 물고문이 아니면 고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판사의 질문에 ‘고문이 없었다’고 답했다. 판사가 다시 ‘폭력은 있었나’라고 물을 때, 슬쩍 신상규 검사를 쳐다봤다. 그도 날 쳐다보고 있었다. 신상규는 맥주를 창틀에 깔아놓고 취조를 했다. 취기가 오르면 욕설을 하며 주먹으로 때렸다. 몇대 맞은 것 가지고 치사하게 얘기하기가 그랬다. 그래서 판사의 질문에 ‘없었다’고 답했다. 사실 폭력보다 힘든 것은 잠을 못 자게 한 것이다. 검찰조사를 받은 기간이 20여일이다. 3일 동안 밤샘조사를 받고, 새벽에 잠시 서울구치소에 들어갔다가 4~5시간 만에 다시 검찰청에 오는 일정을 반복했다. 처음 하루이틀 밤샘조사는 버틸 만했다. 당시만 해도 체력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3일이 넘어가면서부터 거의 반실성한 상태가 됐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몰랐다.”

-신상규 동덕여대 이사장은 올 7월 정부에서 임명하는 사건평정위원회의 위원장이 됐다. 대검찰청 산하 사건평정위원회는 무죄로 확정된 중요한 사건 중에서 검사의 과오가 있는지 살피는 기관이다.

“자신의 잘못을 조사받아야 할 사람이 무슨 남의 과오를 조사하나. 참 황당한 일이다. 그런데 얘기를 듣고 보니 좀 수긍이 간다. 그 사람은 무죄를 유죄로 만드는 기술이 있는 사람이다. 왜 무죄로 끝났냐, 유죄로 만들어야지. 이런 것을 잘 따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아주 적절한 인사다.”

남기춘은 입이 아주 거칠었다
신상규는 창틀에 맥주 깔아놓고
취조하다가 취기가 오르면
욕설을 하며 주먹으로 때렸다
곽상도는 잠을 못 자게 했다

“살아보니 인생 별거 없더라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라”
어머니 그 말씀처럼 살려고 한다
고문피해자 모임 ‘진실의 힘’에
종종 나가 위로를 받고 있다

-최근까지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던 곽상도 검사는 어떤 역할을 했나?

“곽상도는 당시 수사검사들 가운데 가장 신참이었다. 취조를 하기보단, 주로 잠을 못 자게 하는 역할을 했다. 입이 아주 거친 사람은 전 서부지검장인 남기춘이었다. 남기춘은 ‘이 빨갱이 새끼야. 너 같은 건 내가 거꾸로 매달아 취조하면 3시간이면 끝난다’고 협박했다. 서울구치소에 들어가면 감옥 동료 8명 중의 하나가 남기춘에게 수사를 받은 마약사범이었다. 그 사람은 ‘마약 초범인데 제조자로 자백해 15년을 구형받았다. 남기춘이 매달아놓고 얼마나 패던지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신은 담당 검사가 누구냐’고 물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사람이 왜 까닭 없이 자기 얘기를 꺼내고 내 수사 검사가 누구냐고 물었는지 의심이 가지만, 그땐 두려운 마음뿐이었다.”

-취조는 어떤 식으로 이뤄졌나?

“제대로 된 질의응답이 없었다. ‘유서를 왜 썼냐’, ‘어디서 썼냐’는 등의 질문을 할 것 같지만, 그런 질문은 일체 없었다. 그냥 욕과 협박만 있었다. 검사들은 ‘여기서 자백하지 않으면 조사를 부모와 동생, 친구들로 확대할 수밖에 없다’고 협박했고, ‘안기부에서 널 국가보안법 사건으로 조사하고 있다. 여기서 안 불면 그리로 보낸다’고 말했다. 당시 대표적으로 악용되던 국가보안법을 들먹인 것이다. 어느 날엔 취조실 책상에 불탄 시체 사진을 쫙 깔아놓고서 내게 ‘이게 뭔지 아냐’고 검사가 물었다. ‘모르겠다’고 답하니 검사가 ‘니가 죽인 김기설이 사진이야’라며 욕을 했다. ‘아니다’고 부정하면 ‘니가 한 짓이야. 똑바로 봐. 인마’라고 다그쳤다. 그러고선 검사는 ‘배고프지? 밥 시켜줄게’라며 내장탕을 시켜주더라. 20여일간 내내 내장탕을 시켜줬다. 난 그 뒤론 내장탕을 먹지 않는다.”

당시 수사를 맡은 신상규 동덕여대 이사장, 남기춘 김앤장 변호사(전 새누리당 클린정치위원장)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강씨의 증언에 대해 “사실무근”이라고 밝혀왔다.

-(강기훈씨가 대필의 의혹을 받은 유서의 주인공인) 김기설씨가 서강대 옥상에서 분신했을 때 어떤 심경이었나?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나와 김씨는 같은 단체에 있었지만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은 여러 운동단체의 활동가들이 파견 나와 함께 일하는 곳이다. 서로 잘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이 정국을 잘 끝내고, 살아서 싸워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죽으면 정말 감당이 안 된다. 장례식을 치르다 일을 다 할 정도였다. 민심의 흐름도 불안했다. 운동권 밖에 있던 사람들도 ‘너네들 자꾸 이러면 큰일난다’고 조언을 해줬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직접 ‘살아서 싸우자’고 설득했다. 이렇게 사람들이 자꾸 죽어나면….”

갑자기 강씨는 5초 넘게 말을 잇지 못했고, 고개를 떨구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김기설씨는 아마 ‘나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죽지 마세요’라는 심정으로 분신을 하지 않았을까. 김씨도 나중에 상황이 이렇게 전개될 것이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죽음이 이런 식으로 결론이 나면서 우리에게 공격이 들어올지는 꿈에도 몰랐다. 쉽게 얘기하면 그들은 나를 살인자로 몰아붙였다. 죽음을 막으려 한 사람에게 오히려 ‘너가 죽였다’며 거꾸로 죄를 뒤집어씌웠다. 형법상 내 죄는 자살방조죄지만 여론재판에선 ‘살인죄’를 받은 셈이다.”

※ 그래프를 누르시면 확대됩니다.

어느 순간 딸이 사건에 관해 꿰고 있더라

-3년의 징역을 마치고 출소하자마자 두달 만에 지금의 부인과 결혼했다.

“지금 생각하면 좀 후회가 된다. 그때 잘 선택할걸. 그때 잘 선택했으면 옆에 있는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하진 않았을 텐데. 내가 받은 고통은 나눠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참 몹쓸 짓을 했다. 결혼할 땐 서로 고통을 나누며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 되돌아보니 그 모진 세월을 같이 살게 하고 아프게 해서 참 미안하다.”

-3년 전 작고한 어머니 권태평씨가 일흔살이 넘은 2005년 성공회대에 입학했다. 어머니가 강기훈씨를 이해하고 싶다며 사회과학부 늦깎이 신입생이 됐다고 들었다.

“어머니는 원래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고 부지런한 사람이다. 일제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세대로 집안 사정으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학업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한편으론 내 방에 꽂혀 있는 책들을 보고 싶고, 내가 왜 사회운동을 했는지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2005년 성공회대에서 교양과목을 수강하던 중 담당교수이자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에 있던 한홍구 교수를 찾아가 ‘유서대필 사건 좀 조사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평생 내 사건을 가슴에 안고 사셨다. 아마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부탁하는 일은 수도 없이 많았을 거다. 모욕도 많이 당했을 거다. 2007년에 재심권고 결정이 나오자 어머니는 ‘이젠 니가 해라. 난 이제 힘도 없고, 그만할란다’고 말했다. 그만큼 어머니는 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어머니는 2010년에 암으로 돌아가셨다. 10년 넘게 투병생활을 한 아버지를 간호하고, 아들 때문에 평생 마음고생하다가 가셨다. 건강검진만 제대로 했어도 암을 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죄스럽고 마음이 아프다.”

-두 자녀는 아버지의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나?

“큰아들이 고3이고, 작은딸이 고1이다. 집에선 사회 이슈에 대해서 별로 얘기하지 않고 내 사건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그래도 어느 순간부터 ‘얘들이 꿰고 있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아마 책읽기를 좋아하는 둘째가 먼저 알아차린 것 같다. 어머니가 옥바라지를 하면서 나의 결백을 밝힌 수기 <너를 위한 촛불이 되어>가 집 서재에 있다. 일부러 뒤집어 놓은 이 책이 어느날 제대로 꽂혀 있더라. 초등학생이었던 둘째가 그 책을 읽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일부러 티를 내진 않았다. 아빠에게 틱틱대고 친구들 먼저 찾는 그냥 평범한 애들이다.”

간암 얻고서 인생에 대한 시각이 바뀌었다

-재심 결정이 나기까지 21년이 걸렸다. 이리 오래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나?

“사실 영원히 재심으로 가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출소하자마자 변호사들을 찾으러 다녔다. 그들에게 ‘검찰이 사건을 조작했다. 난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형사법에 정통한 변호사들 모두 ‘그 사건은 뒤집힐 수 없다. 그냥 잊고 지내라’고 했다. 그래서 취직해서 평범하게 살려 했다. 10년 넘게 기업에서 컴퓨터 소프트웨어 관련 일을 했고, 요즘은 작은 무역회사에 다닌다. 하지만 잊을 만하면 기자들이 찾아왔다. 어떤 기자는 ‘이번에 검찰 인사에서 당시 수사한 검사가 검사장이 됐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고, 다른 기자는 ‘좀 지난 일이지만 관심이 많다. 얘기 좀 들을 수 있겠느냐’고 요청했다. 기자들이 찾아오면 난 다시 처음부터 얘기해야 했다. 그렇게 찾아온 기자들이 하나같이 ‘지금 심경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건성으로 ‘별생각 없다’고 답했지만 사실은 그때의 감정, 느낌들이 되살아나 몇달 동안 괴로웠다.”

-간암으로 투병중이라고 들었다. 요즘 건강은 어떤가?

“몇년간 건강검진을 못 받던 중에 간암이 발견됐다. 간암 판정을 받은 시기가 지난해 5월이다. 다행히 수술이 잘됐는데 올해 5월 재발했다. 검진을 한 병원에서 종양이 스물몇군데 정도 있다고 했다. 지금은 한달에 한번 정도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나?

“계획 안 세우기로 했다. 이전엔 너무 계획을 많이 세웠고 90% 이상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이젠 마음 편하게 계획 없이 살기로 했다.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살기로 했다. 나랑 비슷한 성격이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하신 말씀이 있다. 돌이켜보니 그게 유언이었다. 어머니가 ‘살아보니 인생 별거 없더라.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라. 그거 3개만 잘되면 인생은 그럭저럭 굴러간다. 그러니 너도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면서 살아라’고 하셨다. 그래서 이젠 그렇게 살려고 한다.”

-이전에 한 인터뷰를 보고 좀 고지식하고 날카로운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만나보니 잘못 봤다는 생각이 든다.

“까칠했다. 지금도 까칠하단 말 듣는다. 그래도 병이 생기고서 인생에 대한 시각이 바뀌었다. 또 만나는 사람도 바뀌었다. 요즘 조작간첩 피해자들이 모인 ‘진실의 힘’이라는 단체의 모임에 종종 참석한다. 무죄 판결을 받고 국가로부터 받은 배상금을 추렴해서 만든 단체다. 그곳에 가면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특히 과거에 힘들었던 경험을 얘기하는 ‘만풀이’라는 행사가 있다. 거기에 갔더니 나보다 훨씬 끔찍하고 잔인한 경험을 한 분들이 많았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60일 넘게 잔인한 고문을 받은 분이 생생하게 자신의 체험을 얘기하는데 ‘인간은 정말 야만적이구나’,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고문을 받고 나오면 주변에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다 ‘빨갱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자식과 아내들도 주변의 싸늘한 시선 때문에 힘든 삶을 산다. 부인과 이혼하고 자녀는 우울증으로 자살하기도 했다. 그분들에게 위로를 받는 게 좀 비겁하단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자연스레 거기로 발길이 간다. 나도 때로는 그냥 위로를 받고 싶다. 생판 모르는 사람 앞에선 이야기를 꺼내기가 어렵다. 진실의 힘에선 이런저런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된다. 정신분석학에 운디드 힐러(wounded healer)라는 개념이 있다고 한다. ‘상처받은 치유자’란 의미인데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딱 그렇다. 그분들을 만나고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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