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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5.27 15:04 수정 : 2008.05.27 17:24

자녀교육 ‘올인’ 물불 안가리는 학부모

고3 딸을 둔 조아무개(47)씨는 올해 회사에서 부서를 옮겼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핵심 부서 팀장을 맡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가 있는 부서로 가려고 윗선에 ‘인사 청탁’까지 했다. 조씨는 “입시설명회에 찾아가 한 번이라도 더 귀동냥을 해 아이에게 도움을 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자리를 옮겼다”며 “월급이 일부 깎였고, 승진에 불이익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아이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외국어고 입시를 준비하는 중3 딸을 둔 김아무개(45)씨는 올 한 해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아내와 합의했다. 김씨는 “지난 1월 초 ‘아이 인생을 판가름 짓는 시점에 제사 준비가 대수냐’는 아내와 부부싸움까지 했다”며 “결국 아내에게 져 제사 없는 한 해를 보내기로 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다녔다는 ‘맹모삼천지교’는 이제 더이상 위인전에서나 볼 수 있는 얘기가 아니다. 요즘 상당수 부모들에게는 아이 교육을 위해 회사 보직을 바꾸고, 제사를 포기하는 등 모든 것을 다 거는 것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부모들의 이런 비이성적인 행동은 경쟁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교육열’이라기보다는 ‘학벌열’에 더 가깝다고 지적한다.

예전에는 아이가 유치원 무렵부터 교육열이 불붙기 시작했다면, 최근 들어서는 갈수록 ‘점화 시기’가 빨라지고 있다. 두살배기와 태어난 지 석 달 된 두 딸을 둔 엄마 유아무개(32)씨는 지난달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 영어회화와 컴퓨터 과외를 받고 있다. 유씨는 “아이가 자랐을 때 예습·복습이라도 시키려면 준비가 돼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영어·컴퓨터가 끝나면 중국어나 일본어도 배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다섯 살짜리 아들을 둔 직장인 김아무개(35)씨는 ‘교육 족보’를 얻으러 엄마들 모임에 쫓아다니느라 주말에도 눈코 뜰 새가 없다. 김씨는 “강남지역 엄마들 사이에서는 아이를 특목고·자사고에 보내기 위한 ‘스케줄표’가 도는데, 교육정책에 따라 민감하게 변한다”며 “6∼7살 때는 ○○영어유치원,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영재학원, 초등학교 고학년 때는 ○○연수원을 통해 어학연수를 보내는 게 좋다”고 전했다.

교육 때문에 온 가족이 세계에 흩어져 살게 된 이산가족도 생긴다. 이아무개(46)씨는 아내가 두 아이의 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떠난 지 1년도 안 돼 필리핀 지사로 발령났다. 이씨는 “결국 부모님만 두고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며 “필리핀도 영어권이지만 아무래도 영어교육에는 미국이 낫겠다 싶어 이산가족 신세를 택했다”고 말했다.

부모들은 자식 교육에 이렇게 ‘올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불안감 때문이라고 하소연한다. 중3 딸과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의 사교육비로 한 달에 각각 150만원, 60만원씩을 쓴다는 김아무개(45)씨는 “다른 집에 견주면 ‘새 발의 피’인데, 이 정도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고 말했다. 고1 아들을 둔 엄마 이아무개(43))씨는 “입시설명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수능 고득점자 수기까지 모으는 등 입시에 대해선 전문가 수준”이라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도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해서 잠이 안 온다”고 털어놨다.

조용환 서울대 교수(교육학과)는 “부모들이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경쟁에서 낙오될 것이라는 불안감에 너도나도 사교육으로 뛰어들고 있다”며 “특목고나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돈을 쏟아붓는 것은 엄밀히 말해 교육열을 가장한 학벌열이며 ‘사회적 지위 쟁탈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전문가들 분석
“교육열이라기보다 학벌열…오락가락 입시정책도 한몫”

교육 전문가들은 갈팡질팡하는 입시정책과 사교육 시장의 급속한 팽창, 경쟁을 조장하는 사회 분위기 등이 맞물려 학부모들의 불안감이 가중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교육환경이 불안정하다 보니 학부모들이 사교육에 기대야만 심리적 안정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인류학)는 “교육 영역을 시장이 완전히 장악하면서 학부모들이 교육의 한 주체가 아니라 사교육 시장의 소비자로 전락했다”며 “입시 정책이 끊임없이 바뀌는 상황에서 학원들이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 금세 도태될 것처럼 허위·과장 광고를 하고 있으니 학부모는 비싼 값을 치르고서라도 교육 상품을 구매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조상식 동국대 교수(교육학)는 “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경쟁 일변도의 교육 정책들은 학부모들의 이런 교육열을 더욱 조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문가들은 학부모들이 자녀를 통해 얻으려는 그릇된 대리만족 심리도 잘못된 교육열을 키우고 있다고 지적한다. 곽금주 서울대 교수(심리학)는 “사회경제적 여건이 전반적으로 상승하면서 아이에 대한 부모의 기대치도 크게 높아졌다”며 “큰돈을 들여서라도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들을 아이를 통해 보상받고자 하는 심리가 팽배해 있다”고 꼬집었다. 곽 교수는 또 “특히 현재 초·중·고생들의 어머니 세대는 고등교육을 받았음에도 사회에서 제 능력을 충분히 평가받지 못한 데 대한 열패감도 크다” 며 “이런 부분들이 아이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조용환 서울대 교수(교육학)는 “무엇이 교육적일지 생각하지 않고 사교육 시장에 돈을 쏟아부은 것으로 부모 노릇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의 자기 위안 심리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학부모들의 과도한 교육열이 학생 개인의 인성에 끼칠 부정적인 영향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가져올 악영향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조상식 교수는 “어릴 때부터 줄세우기 경쟁 속에 있었던 아이들은 성장해서도 열등감과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며 “이는 개인이 뚜렷한 자기 주관을 갖는 데 심각한 방해 요소가 된다”고 말했다.

정민영 기자 min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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