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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5.25 18:05 수정 : 2007.05.26 23:55

1990년대 중반에 아버지(은상기·74·가운데)가 합세했고, 90년대 말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때 실직한 형(은영수·45·왼편)도 들어왔다. 오른쪽이 은정복씨.

대학로 마지막 서점 ‘풀무질’ 지키는 은종복씨


대학로에 남은 마지막 인문사회과학 서점 풀무질이 월세 내기 힘들어 지하로 이사간다. 그런데 실은 풀무질 서점은 그 일대 마지막 인문사회과학 서점이 아니라 마지막 서점이다.

지하철 4호선 혜화동역에서 내려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쪽으로 가려면 인파 홍수를 헤집고 가야 한다. 화려하게 꾸민 쇼윈도들이 즐비한 길을 지나 성대 정문에 다다르기 전 오른편 길가에 풀무질 서점이 있다. 허름하다. 4.5평 안에는 비집고 다니기도 힘들만큼 책들로 꽉 차 있다. 벽은 미닫이식 2중서가로 돼 있고 좁디좁은 중앙공간도 사람 허리만큼 책들로 차 있다. 꼭같은 크기의 2층 공간도 서점이 쓰는데,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 계단으로 연결된다.

앉을 자리도 마땅찮아 하루종일 거의 서 있는 주인 은종복(42)씨. 그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회·인권운동가, 환경운동가이고, 월간 <작은책>이나 성대 교지 등에 등장하는 뜻있는 글쟁이다. “근처 1층 가게들을 알아봤는데, 보통 권리금만 5천만~1억원, 거기에 보증금 5천만~7천만원, 그리고 월세 150만원 이상이었다.” 하는 수 없이 지금 가게 맞은 편 약간 위쪽 가게 지하공간을 빌렸다. “권리금은 아예 없고 보증금 1천만원에 월세 80만원. 지금 가게는 월세만해도 100만원 정도니 한결 살만하다.”

1980년대엔 근처에 논장이니 동명이니 하는 인문사회과학 서점들이 여럿 있었다. 지금 다 없어졌다. “인문사회과학 서점만 없어진 게 아니라 대학로에서 여기까지 아예 책방이 하나도 없다. 대학로쪽 지하에 작은 책방 하나 생겼다는 얘긴 들었지만, 오죽하면 서울대병원쪽에서 입원환자에게 선물할 책을 사러 여기까지 오겠는가.” 혜화동길에서 성대 정문까지 2백 미터나 될까. 거기에 빽빽히 들어찬 것은 복덕방 30여개, 그리고 미용실, 음식점들이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24일 낮 어느 가게 앞에서는 반라의 손님끌이 여자 둘이 뻑적한 음악을 틀어놓고 요란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인문사회과학 전문 22년째
임대료 부담스러워 지하로
“손님이 주인 나는 심부름꾼”

“그날그날 먹고 살아가는 하루살이다. 저축이 안 되니 재투자를 위한 축적이 안 된다.” 책 한 권 팔면 남는 마진이 소설은 30%, 인문사회과학 서적이나 잡지 20~25% 정도인데 수험서는 15%다. 그런데 지금 팔려나가는 책의 70~80%가 학교교재와 수험서들이다. 할인 8% 빼고 나면 7% 정도 남는데, 3만원어치 팔아봤자 2100원 남는 셈이다. 얘기를 하고 있는 중에도 <민법판례 정리>를 사러온 학생이 있었고 <형법 기출문제 정리>를 찾는 사람이 왔다. 하루 50명 안팎이 찾아오는데, 이런 식이라면 그들중 대다수가 판검사나 공인회계사 지망 수험생들인 셈이다. 풀무질은 한때 인근 지역에서 이들 수험서 판매의 50%를 장악한 적도 있다.

풀무질 서점은 85년 여름에 문을 열었다. 그때만 해도 서울 웬만한 대학 앞에는 인문사회과학 서점들이 하나 또는 복수로 있었고 한참 뒤에도 모두 열댓개는 됐다. 노동운동을 꿈꾸던 은씨가 <한겨레> 지국 일을 하다 집안돈 끌어들여 풀무질을 인수해 문을 연 것이 93년 4월1일. 그가 4대째 주인이었다. “그 무렵엔 <창비>를 30부 들여놓으면 바로 다 나갔다. 한달에 100부 이상씩 나갔다. <이론>도 100부 이상 나갔다. 91년 소련 등 사회주의체제 붕괴 뒤 좀 줄어들긴 했으나 그땐 그래도 성대 진보 동아리 수만 100개도 넘었다. 책도 인문사회과학 서적쪽이 훨씬 더 많이 나가 전체 판매량의 70~80%나 됐다. 그땐 빚 안지고 살았다.”


지금은 학교교재가 50%, 수험서가 30%를 차지하고 인문사회과학 서적은 10% 정도밖에 안된다. “그러니 이젠 인문사회과학 서점이라 할 수도 없다.” 한때 수험서류 판매로 사정이 좀 나아졌으나 지지난해부터 다시 어려워져 3월, 9월 새 학기 때 반짝경기를 타도 한해 5백만~1천만원씩 빚을 지고 있다. 그래도 계속하는 이유가 있다. “이 일이 그래도 돈에 눈먼 어른들이 망쳐놓은 세상을 맑고 밝게 바꾸도록 사람을 키우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인권·사회·환경 진보단체들을 돕는다.” 그는 인권운동사랑방 등 단체 수십 곳에 각각 몇만원씩 다달이 수십만원씩 돈을 내고 있다. “이런 일 않는다면 책방 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는 열성적인 환경운동가이기도 하다. 끝없는 자본주의 개발·이윤추구가 지구 생태계를 절딴내 이대로 가다간 조만간 모든 생명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위기감을 갖고 있다. 비닐봉투도 쓰지 않는다. 아이들 대안학교도 만들었다. 쉽고 예쁜 한글로 그런 올곧은 생각들을 펼쳐낸 그의 글들은 힘이 있다. 대학 다닐 때 문학동아리를 했는데, 10여년간 손을 놨다가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때부터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다. 유일한 저항수단이라 생각했다. 책 사러 오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글들을 인쇄해 일일이 나눠주고 있다. 그것도 운동이다. 지율 스님께 책을 보냈고, 지난 17일엔 동화작가 권정생이 세상을 떠나 간만에 술을 마시고 쓰러졌다. 팔다리 여기저기 까졌으나 안동 빈소까지 다녀왔다.

2년마다 성대 구내서점 공개입찰을 한다기에 찾아가봤지만, 희한한 이유로 아예 자격미달이라며 받아주지 않았는데, 결과를 보니 기가 막혔다. 교보와 세종, 그리고 시공사쪽이 응찰했고 시공사에 낙찰됐다. 시공사라니! 세상 참 요지경이다.

이사 갈 곳은 지하 35평이니 간판걸긴 어렵겠지만, 지금처럼 너무 좁아 몇명만 한꺼번에 찾아와도 받아줄 수 없는 처지는 면하게 될 것 같다. 학생들 20~30명이 이사 도와주겠다고 이름 전화번호 적어놓고 갔다. 이번 일요일과 월요일(27~28일) 이사 끝내고 화요일(29일)부터 새 가게 문을 연다. 유월항쟁 기념일 다음날인 11일 새 가게 여는 잔치를 벌인다.

90년대 중반에 아버지(은상기·74)가 합세했고, 90년대 말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때 실직한 형(은영수·45)도 들어왔다. 아내는 빈민 가사, 산모돕기 일을 하고 있다. 힘드냐고 묻자, “아니, 그래도 기쁨이 더 크다”고 했다. 세상 좋아지면 농사지으러 갈 생각이다. “아직은 이 일이 다른 사람 버티기 힘든,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긴다. 손님이 책방 주인이고 나는 심부름꾼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