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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정치일반

“다산, 200년 전에 ‘촛불 탄핵’ 같은 국민저항권 지지했다”

등록 :2018-02-24 09:58수정 :2018-02-24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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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인터뷰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박근혜 대통령 탄핵 같은 국민저항권을 이미 200년 전에 다산 정약용은 인정하고 실천했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이 지난 8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왜 이 시대에 다산 정신이 여전히 유효한지를 설명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박근혜 대통령 탄핵 같은 국민저항권을 이미 200년 전에 다산 정약용은 인정하고 실천했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이 지난 8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왜 이 시대에 다산 정신이 여전히 유효한지를 설명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올해는 조선의 개혁가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이 공직자들의 필독서인 <목민심서>를 쓴 지 200년이 되는 해이다. 또 18년간의 유배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온 지 200년이기도 하다. 그를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예정돼 있다. 다산이 다시 주목받는 것은 이러한 계기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실학사상과 애민정신은 현대의 정치공동체가 잘 돌아가게 하는 데도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산의 삶과 사상을 알리는 데 앞장서온 박석무(75) 전 의원을 지난 8일 오후 서울 순화동 ‘다산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났다.

다산 전도사 박석무 전 의원
‘풀어쓰는 다산 이야기’ 1천회
“다산은 복지사회 꿈꾼 실천가
국민저항권 등 여전히 유효”

대학원 논문 쓰면서 첫 인연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등으로
다산 사상 대중화에 앞장
“정치보다 교육이 더 중요해”

우리나라 역사 인물 가운데 다산 정약용만큼 깊이있고 폭넓게 알려진 사람은 많지 않다. 그가 남긴 편지 글은 40년 가까이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베스트셀러로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그를 그린 소설도 두권이나 나왔다. 다산의 대중화는 박석무 전 의원을 빼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1970년대부터 다산과 관련된 논문과 다수의 책을 냈으며, 2004년부터는 ‘다산연구소’를 만들어 다산 알리기 작업에 전념하고 있다. 연구소 출범 때부터 쓴 인터넷 칼럼인 ‘풀어쓰는 다산 이야기’도 그중 하나다. 우리 사회의 각종 문제를 다산의 시각에서 진단한 이 칼럼은 지난 19일 1000회를 넘겼다.

―‘풀어쓰는 다산 이야기’ 1000회를 쓰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글은 뭔가?

“여러 개 있는데 그중 하나는 박근혜 국정농단 때 쓴 글이다. 그때 ‘주군이 그렇게 잘못하는데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면 여당이나 청와대, 정부 모두 내시나 환관이 모인 집단이지 정치 집단이라고 볼 수가 없다’라고 썼다. 얼마 뒤 대구에서 촛불집회를 하면서 시민들이 새누리당(자유한국당의 전신) 대구·경북도지부 간판을 떼고 `내시와 환관의 정당’이라고 써 붙였더라. 누군가 내 글을 보고 힌트를 얻은 것 같았다. 이런 정치 비판적인 내용 말고도 독서에 관한 다산의 충고나 가족 윤리 등에 대한 글도 반응이 많았다.”

박석무는 전남 무안의 유서 깊은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민재 박임상)는 면암 최익현의 제자로, 면암의 의병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조부(계암 박현풍)와 선친(소천 박학주)도 서당을 열어 후학을 가르쳤다. 박석무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소학>과 <격몽요결>, <사서삼경> 등을 배웠다.

문인에게 자극 준 다산 시집 <애절양>

―다산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전남대 법대 대학원에서 ‘다산 정약용의 법사상’이라는 석사논문을 쓰면서부터였다. 법학을 하면서 어떻게 역사 인물인 다산을 소재로 잡았나?

“70년에 대학 졸업하고 대학원에 들어갔는데 조병갑 교수께서 ‘자네는 한문을 잘하니 우리나라 법제사를 공부하라’고 권했다. 그러면서 일제 때 아사미 린타로가 쓴 <조선법제사고>를 건네줬다. 그 책에 다산의 <흠흠신서> 등에 관한 내용이 나와서 다산 저서부터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공부하게 됐다. 논문(‘다산 정약용의 법사상’)을 쓴 뒤 전남대 교수로 가기로 얘기가 다 됐는데 <함성>지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다 무산됐다.” (※박석무와 교분이 두터웠던 전남대생 후배인 이강(법대 1년), 김남주(영문과 4년)가 박정희 정권의 유신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의 지하 유인물(<함성>)을 만들어 1972년 12월9일 밤 전남대 교정과 광주일고, 광주고 등 시내 고교에 뿌렸다. 이 사건으로 박석무도 이들과 함께 구속됐다.)

1995년 박석무, 노무현 등 민주당의 소장파 의원들은 김대중 전 총재가 분당해 만든 새정치국민회의에 따라가지 않고 민주당에 남은 뒤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만들어 활동했다. 이들 대부분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했다. 사진은 그해 11월10일 통추 의원 환영 만찬에서 건배를 나누는 모습. 왼쪽부터 유인태, 노무현, 김대중, 김정길, 박석무, 원혜영. <한겨레> 자료사진
1995년 박석무, 노무현 등 민주당의 소장파 의원들은 김대중 전 총재가 분당해 만든 새정치국민회의에 따라가지 않고 민주당에 남은 뒤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만들어 활동했다. 이들 대부분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했다. 사진은 그해 11월10일 통추 의원 환영 만찬에서 건배를 나누는 모습. 왼쪽부터 유인태, 노무현, 김대중, 김정길, 박석무, 원혜영. <한겨레> 자료사진
―감옥에 있을 때도 다산 공부를 많이 했다고?

“그때 사회과학 책은 대부분 감옥 반입이 안 됐지만 다산의 저작물인 <여유당전서>는 무사 통과였다. 논문 쓸 때 다 못 읽었던 다산의 시와 산문을 그때 많이 읽었다.”

―그 덕택에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가 탄생한 건가?

“그렇게 볼 수도 있다. 당시 감옥은 일체의 필기구를 주지 않으니까 쓰지는 못하고 읽기만 했지만, 다산이 아들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문집에서 찾아 읽으면서 혼자 보기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감옥을 나온 뒤 다시 고등학교(고창종고, 광주 대동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돼 책 쓸 엄두를 못 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1978년에 출판사(시인사)를 만든 광주고 친구인 조태일이 ‘다산에 대한 책 쓸 것 없느냐’고 하더라. 다산의 편지 얘기를 했더니 ‘너무 좋다’면서 번역하라고 했다. 그러고는 바로 선금 10만원을 부쳤더라. 당시 나의 두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큰돈이었다. 그 뒤 그가 매일 아침 전화해서 ‘몇 페이지나 번역했냐’고 재촉을 했다. 할 수 없어서 주말에 집에 틀어박혀 번역을 했고, 그것만으로는 시간이 모자라 여름방학 때는 아예 절에 들어가서 작업했다. 1979년 11월에 책이 세상에 나왔는데 시인 조태일 덕분이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는 39년 전에 나온 책이지만 지금도 연간 2만부 안팎이 팔릴 정도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다산을 일반에 알리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 같다.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 때 엄청 많이 팔렸다. 이 책을 계기로 <만남>(한무숙)과 <소설 목민심서>(황인경) 등 다산에 대한 소설도 두권이나 나왔다. 1983년에는 내가 다산의 시만 따로 추려내 <애절양>이란 이름으로 책을 묶었고, <다산 산문선>(1985년)도 냈다. 책을 통해 다산의 시를 접한 문인들과 젊은이들이 ‘다산 시가 나를 깨치게 만들었다’는 말을 하더라. 그런 얘기를 들을 때는 정말 감동적이다.”

‘슬프도다, 생식기를 잘랐구나’라는 뜻의 애절양(哀絶陽)은 1803년 다산이 유배 중이던 전남 강진의 한 농가에서 목격한 비극적 현실을 노래한 시다. 태어난 지 사흘 만에 군적에 사내아이를 올리도록 하고, 그에 대한 세금인 군포를 내지 못하자 관아에서는 유일한 재산인 소를 빼앗아 갔다. 분노한 아버지는 아이를 낳은 것을 자책하면서 칼을 뽑아 자신의 성기(양물)를 자르고, 그 부인은 통곡하는 내용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백성은 보편적 국민 아닌 사회적 약자”

―이 시대에 다산이 던지는 의미는 뭔가?

“다산은 행정가, 학자로서 이론을 세웠을 뿐 아니라 그 이론을 실천한 사람이다. <목민심서>에 보면 목민관, 즉 요즘 말로 하면 공직자는 부당한 명령을 따르면 안 된다고 했는데 다산은 실제로 이를 실천했다. 황해도 곡산부사로 일할 때였는데 당시 조세를 현물로 받을지 금전으로 받을지를 놓고 상부(선혜청)와 다툼이 있었다. 상부에서는 금전으로 바꿔 올리라고 공문을 내렸지만, 다산은 현물 가격이 너무 낮아서 그렇게 하면 농민들만 죽을 지경이 된다면서 현물로 수납했다. 황해 감사와 선혜청은 다산을 명령 불복종죄로 처벌하라고 임금에게 장계를 올렸다. 정조가 양쪽 주장을 살펴본 뒤에 다산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끝났다. 국민의 편에 서서 부당한 명령은 거부할 수 있는 공직자의 자세야말로 지금 가장 필요한 것 아니냐.

다산은 또 국민 저항권도 설파했다. 곡산부사로 취임하면서 첫번째로 다룬 게 이계심 사건이었다. 직전 부사 시절 이계심이 1000여명의 백성을 데리고 관아로 가서 부당한 세금 징수에 항의한 뒤 체포를 피해 도망친 상태였다. 중앙에서는 이를 민란으로 보고 주모자 몇명을 처벌해야 한다는 분위기였지만, 다산은 자수한 이계심한테서 얘기를 듣고 난 뒤 그를 무죄 석방했다. 도리어 ‘백성의 억울함을 드러내어 항의했으니, 너 같은 사람은 관청에서 천금을 들여서라도 사들여야 할 것’이라며 이계심을 칭찬했다. 촛불집회를 통한 박근혜 대통령 탄핵 같은 국민저항권을 이미 200년 전에 다산은 인정하고 실천했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연구소를 만든 2004년부터 지금까지 14년 동안 인터넷 칼럼 ‘풀어쓰는 다산 이야기’에서 다산의 시각으로 우리 시대의 문제를 짚었다. 칼럼은 1000회째를 기록했다. 지금도 원고지에 글을 쓰고 있는 박 이사장이 지난 8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제1회 칼럼을 펼쳐 보이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연구소를 만든 2004년부터 지금까지 14년 동안 인터넷 칼럼 ‘풀어쓰는 다산 이야기’에서 다산의 시각으로 우리 시대의 문제를 짚었다. 칼럼은 1000회째를 기록했다. 지금도 원고지에 글을 쓰고 있는 박 이사장이 지난 8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제1회 칼럼을 펼쳐 보이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공정성도 다산이 강조한 내용 아닌가?

“그렇다. 다산이 가장 바라고 희망한 것은 공정하고 청렴한 세상, 즉 공렴(公廉)이었다. 다산의 이 공렴이야말로 지금의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세상의 나침반이 될 수 있다. 다산은 특히 부자의 것을 덜어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손부익빈’(損富益貧)을 말했다. 요즘 말하는 경제 정의 또는 경제 민주화다. 또 복지국가에 대한 생각도 확고했다. <목민심서> 애민(愛民) 편이 그것이다. 여기서 애민의 민은 불특정 다수의 국민이 아니다. <목민심서>에 나오는 백성은 노인, 유아, 4대 궁인(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 초상을 당한 사람, 질병을 앓은 이, 재난 피해자 등 6종류의 국민이다. 한마디로 사회적 약자들이다. 다산은 국가와 사회는 바로 이들 사회적 약자들을 돌봐야 한다고 했다. <목민심서>가 12편으로 구성됐는데 한편이 애민 편이고 나머지는 모두 애민을 어떻게 할 것인지 방법론을 적은 것이다. 200년 전에 벌써 완벽한 복지국가를 꿈꿨던 것이다.”

박석무는 4·19 때(광주고 2학년) 고교생들의 거리시위에 앞장서는 등 1980년대까지 학생운동과 재야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1964년 6·3시위와 관련해 구속된 것을 시작으로 1980년 광주항쟁으로 갇히는 등 모두 4차례나 옥살이를 했다. 그 후 1988년 재야 영입 케이스로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에 입당해 두 차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 뒤 학술진흥재단 이사장, 5·18기념재단 이사장, 한국고전번역원 원장 등을 역임했다.

―격변하는 현대사의 한복판에서 여러 활동을 많이 했는데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뭔가?

“저술을 통해 일반인에게 다산을 알린 것도 보람있지만, 2004년부터 2016년까지 12년간 성균관대(석좌교수) 등에서 다산의 삶과 사상을 가르친 일이 가장 가치 있다. 가끔 연락해오는 학생도 있고, 다산처럼 살아보겠다는 젊은이도 있다. 그들의 가슴에 상당한 여운이 남았던 것 같다. 대학원 졸업 후 1980년까지 5년 동안 고교에서 가르쳤던 것도 정말 보람있었다. 과목은 영어였지만, 학생들에게 어떻게 사는 게 바른 인생인지를 많이 얘기해 줬다. 김지하의 시나 <전환시대의 논리>(리영희), <농무>(신경림) 등 많은 책을 읽도록 권했다. 살아보니 정치보다 교육이 더 중요하더라.”

김남주의 옥중 편지 “형님의 큰 영향 느껴”

박석무를 많이 따랐던 김남주는 1987년 전주교도소에서 보낸 편지에서 “내가 그동안 징역살이하면서 수많은 학생들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중에 형님이 고등학교 재직 때의 제자들이 참으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광주옥에서 전주옥에서 제가 확인한 수만 해도 열 손가락은 넘을 것입니다. (…) 학교에서 스승이 제자들에게 미친 영향의 넓이와 깊이가 어느 정도이냐를 알게 하는 좋은 예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라고 적었다. 민주당 국회의원 송영길과 전 의원 강기정, 1987년 3월 서울 광화문 미 대사관 앞에서 “광주사태 책임지라”고 외치며 분신 사망한 표정두, 5·18 당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진 전영진 등이 박석무의 광주 대동고 제자들이다.

―정치권에 들어가면 보통 나올 줄을 모르는데 왜 국회의원 두번만 하고 그만뒀나?

“2004년 총선을 앞두고 한번 더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으로 당이 갈라져서 어느 당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됐고, 나온다고 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또 요즘은 많이 달라진 거 같은데 그때만 해도 돈이 없으면 정치하기 힘들었다. 학문을 하고픈 평생의 열망도 여의도를 떠나 ‘다시 다산으로’ 돌아오도록 나를 부추겼다.”

정치인 박석무는 계보정치보다는 의원 개인의 자율성을 중시했으며, 실리와 명분 중에서는 명분을 택했다. 1995년 정계복귀한 김대중이 동교동계를 이끌고 당시 제1야당인 민주당을 깨고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들 때 그는 ‘쉽고 편한 길’ 대신 민주당 잔류라는 험한 길을 선택했다. 노무현, 김정길, 유인태, 원혜영, 김원기 등이 그때 동지였다. 그는 “영호남 민주화 세력이 합쳐서 민주당을 하는데 디제이가 당을 따로 만들면 또 지역당이 된다는 고민에서 정치를 안 하면 안 했지 따라가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따라갔으면 의원을 또 했을 것이지만, 지금 봐도 옳은 결단이었다”며 “앞으로 힘닿는 데까지 다산을 알리고 그의 길을 따라서 걷고 싶다”고 말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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