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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1.18 18:02 수정 : 2007.01.18 18:02

<어우야담> 유몽인 지음. 신익철 이형대 조융희 노영미 옮김. 돌베개 펴냄. 6만원

신교수 ‘번역과 소통의 맥락(독자기자석)’에 재반론

신익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등 네 분의 학자가 최근 유몽인의 <어우야담>을 번역 출간했다. 나는 이 책에 관한 서평을 <한겨레>에 썼다. 서평이 나간 뒤 신 교수는 서평의 내용이 적절하지 않다는 항의 전화를 걸어왔다. 그래서 신 교수의 주장이 <한겨레>의 독자 페이지인 ‘왜냐면’에 실렸다. 이어 <어우야담>을 펴낸 출판사(돌베개)의 책임자가 나에게 메일을 보내 그 기사가 ‘과도한 기사’였다고 항의했다. 두 분의 태도는 매우 이지적이었고 그 점에 나는 불만이 없다. 그러나 두 분의 주장에 선뜻 동의가 되지는 않는다.

사태가 이쯤 되니 나는 반성했다. 내가 과연 과도한 기사를 썼는가. 반성을 거친 뒤, 나는 나 또한 내가 기사를 어떤 기준으로 썼는지 다시 밝혀두고 싶어졌다. 나는 이 글이 신 교수 등 진지한 학자들과 성실한 출판인들에게 누가되지 않기를 바라며, 대신 우리 학계의 학문적 성실함과 엄밀함에 대한 반성의 작은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우선 신 교수 등이 번역 출간한 <어우야담>을 검토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첫 인상에서 나는 이 번역서가 매우 힘들고 외로운 작업을 거쳐 탄생했다고 생각했다. 이 번역본은 두 권으로 이뤄졌다. 첫 권은 오늘날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어우야담>의 558가지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고 모두 번역한 ‘한글본’이며, 다른 한 권은 원문을 실은 ‘한문본’이다. (앞으로 편의상 두 책을 ‘한글본’ ‘한문본’이라 구별하겠다.) ‘한문본’ 끄트머리엔 <어우야담>에 등장하는 동아시아 인물들에 대한 꼬마 사전을 덧붙였다. 특히 ‘한문본’은 지금까지 전해오는 <어우야담> 27가지의 판본을 일일이 비교하고 이를 정리하여 ‘결정본’을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구체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판본인 만종재본에서 빠진 부분은 보충하였고, 틀린 글자나 빠진 글자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였다. 원문에는 모두 표점을 달아 다른 연구자들이 읽을 때 번역자들이 어떻게 원문을 이해했는지를 알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공이 많이 들어간 책인 까닭에 나는 가벼운 흥분을 느끼며 본문을 단숨에 읽어내려 갔다. 그러나 몇몇 대목에서 오역(誤譯)임에 틀림없어 보이는 대목도 발견되었고, 전공자가 아닌 독자가 읽기엔 부담스러워 보이는 낱말의 선택도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상국(上國)’, ‘방언(方言)’ 등 전통사회의 중국이 자국을 중심으로 만들어낸 황제사관의 산물인 낱말들이 아무런 풀이글도 없이 노출돼 있는 걸 보면서 옛글에 대한 주석 작업으로서 이 책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판단을 했다.

여기서 덧붙여둘 말이 있다. 출판 기자를 몇 년 맡은 적이 있는 까닭에, 한국에서 쏟아져 나오는 책들 가운데 엉터리 책이 적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안다. 한국학 관련 번역서에 국한해 보더라도 엉터리 번역과 원칙 없는 초역(抄譯), 잘 모르겠는 부분은 얼렁뚱땅 넘어가는 식의 번역이 적지 않다는 것 또한 나는 안다. 그러므로 신 교수 등 진지한 학자들이 일생의 업으로 여기며 땀을 쏟아 상재한 번역서를 함부로 평하는 건 상대적으로 공정하지 않은 것이다. ‘상대적으로 공정하지 않다’는 건, 욕먹어 마땅한 책들이 산적해 있는데 굳이 이 책을 심하게 비평하는 건 공정해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엉터리 책들은 아예 비평의 대상이 될 자격조차 없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경우 나는 기사를 작성하면서 책에 들인 공에 대해 최선을 다해 소개하고, 끄트머리에 가서 한두 마디 아쉬운 점에 대해 지적을 해왔다. 그런 지적도 없다면 우리 출판문화와 학술연구에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다.

옮긴이들과 출판사의 책임자가 불만을 가진 기사의 내용은 아래 대목이다.


옮긴이들은 서로 다른 판본 27종을 견주어 <어우야담>의 원문에 표점과 교감 내용을 덧붙여 별책으로 묶었고, 본문 속에 나오는 동아시아 인물들에 대한 꼬마 사전도 덧붙였다. 독자들은 비로소 우리 고전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 번역을 만난 셈이다. 그러나 번역문 가운데 수장(水漿), 상식(上食), 임모(臨摹) 등 이미 죽은 옛말들을 풀이말도 없이 그대로 드러낸 건 아쉽다. 민간에 발을 깊게 담근 유몽인의 민중지향 정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또 중국을 ‘상국(上國)’이라 쓴다거나 ‘우리나라 말’을 ‘방언(方言)’이라고 옛말 그대로 옮긴 건, 연구자가 현대 한국인인지 의심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나는 고전의 번역이란 신 교수 등이 주장하는 대로 “현대 대중들과의 소통”을 위한 것이므로 철저하게 현대어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글의 본디 맛을 해칠 우려가 있을 때는 풀이글이 필요하다고 본다. 신 교수는 “풀이글이 너무 많아지면 책이 두꺼워지고 독자들이 읽기 어려워한다는 출판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풀이글을 많이 줄였다”고도 말했다. 이런 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므로 더 논하지 않겠다.

그러나 옛글을 옮기면서 오늘날의 쓰임과 다르거나 시대정신과 다른 낱말은 독자들에게 충분히 해설하는 게 번역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주장은 양보할 수 없다. 그런 안내 작업을 하지 않을 바에야 번역이 왜 필요한가. 가령 문제가 된 낱말인 ‘상국(上國)’과 ‘방언(方言)’은 아주 대표적인 경우다. ‘상국’이란 중국만이 황제가 있는 나라가 될 수 있고 다른 주변 국가들은 신하국에 지나지 않는다는 중국의 중세기적 세계관이 낳은 이데올로기 용어다. 이번 번역본에는 원문을 옮기는 과정에서 ‘상국’이란 표현이 나온 대목 이외에, 번역자들이 쓴 원고인 주석에도 ‘상국’을 일반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더구나 거기에 아무런 풀이글도 없었다. 나는 이런 식의 언어 사용은 그야말로 독자의 말문이 막히게 만드는 경우라고 읽었다.

‘방언(方言)’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언어인 한문만이 진서(眞書), 참된 글이고 주변 국가의 말들은 ‘변방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기중심적인 의식을 담고 있는 이 낱말 또한 중국 중세기 황실사관의 부스러기다. 원문에 이런 표현이 등장하면 번역자는 그 역사적 쓰임을 충분히 풀이해줄 의무가 있다. 더구나 오늘날 한국어에서 ‘방언’이란 ‘사투리’를 뜻하며, 이는 유몽인의 시대에 조선 선비들이 쓰던 ‘방언’이란 용어와 전혀 뜻과 맥락이 다르다. 이런 대목을 풀이하지 않는다면 번역자가 할 일이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신 교수는 “원작에 담긴 작가의 의식세계”를 드러내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그래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 번역문에서 ‘방언’이란 표현을 그대로 노출시켜두면 전공자가 아닌 독자는 ‘사투리’란 뜻으로 읽을 것이다.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는데 어떻게 “원작에 담긴 작가의 의식세계”를 독자들이 눈치챌 수 있겠는가. 이런 번역이 독자를 오도(誤導)하는 길이라는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나는 나의 이런 관점이 너무도 평범한 상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이번 <어우야담>을 읽으며 ‘상국’, ‘방언’ 등의 표현을 풀이글 없이 쓴 게 너무도 뜻밖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건 ‘충격’을 던져야 할 대목이라고 보아 위와 같이 기사를 쓴 것이다.

다음으로 원고지 10장을 넘지 않는 신문 지면에서 본격적으로 거론하기 힘들어 그냥 넘어간 대목이지만, 내가 신 교수 등이 번역해 출간한 <어우야담>에서 ‘명백한 오역’이라고 확신한 것 몇 가지를 아래에 밝혀두겠다.

(1) ‘한유의 교묘한 글 솜씨’(#177)에 나오는 <장자> 인용문 관련 오역

“내가 <장자>를 읽다가 ‘마제’ 편에 이르러 보니 말(馬)과 나무 심는 것(植木)으로 서두를 시작하고, 그 끝맺음에는 단지 말을 언급하면서 그 편을 마무리하고 있었다.”(308쪽)

이 대목은 오역이다. <장자> ‘마제’편을 펴 보면 간단히 알 수 있다. ‘마제’편은 그 첫머리에서 통치자들이 천하를 다스린다고 하는 일이란, 백락(伯樂, 말을 잘 다스리는 것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 말(馬)을 다스리고 도공(陶工)이 진흙(埴)을 다스리며 목공(木工)이 나무(木)를 다스리는 일과 같다고 논하고 있다. 백락, 도공, 목공이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이들은 결국 말, 진흙, 나무의 본성을 해치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장자> 주석서 가운데 가장 광범위한 주석을 집대성한 청나라 때 곽경번(郭慶藩)이 엮은 <장자집석>(莊子集釋)에는 <장자>에 관한 가장 오래된 주석인 곽상(郭象)의 주(注)와 성현영(成玄英)의 소(疏), 육덕명(陸德明)의 음의(音義)의 전문이 수록돼 있을 뿐 아니라, 청나라 때의 왕념손(王念孫), 유월(兪木+越), 노문초(盧文弓+召), 곽숭도(郭嵩燾) 등 쟁쟁한 고증학자들의 견해까지 망라하고 있다. 나는 혹시 몰라서 명말청초의 대학자 왕부지(王夫之)의 <장자해>(莊子解)와, 현대 학자의 해석서인 차오추지(曹礎基)의 <장자천주>(莊子淺注), 천구잉(陳鼓應)의 <장자금주금역>(莊子今注今譯) 등 내 서재가 확보하고 있는 모든 장자 주석서를 빠짐없이 뒤져보았지만, 어디에도 이 대목의 원문이 ‘植木’으로 된 판본은 없었다.

나는 <어우야담>의 원본은 연구해본 바 없으므로 어느 판본부터 오류가 시작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신 교수 등의 교감에 따르면 만종본, 청패본, 도남본, 고대본 등이 모두 ‘植木’으로 적고 있는 셈이다. 만약 그렇다면 매우 실망스런 일이다. 유몽인이 본문에서 <장자> ‘마제’편에 나오는 글이라고 밝히고 있음에도, <어우야담>의 필사본을 생산한 이들 가운데 아무도 <장자>를 펴서 확인해보지 않았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대목의 원문은 마땅히 <장자>에 따라서 ‘植’(심을 식)을 ‘埴’(찰흙 식)으로 고치고 다음과 같이 표점을 해야 마땅하다.

余讀<莊子>至‘馬蹄’篇, 以‘馬及植木’起頭, 末段只言馬, 以卒其篇.

→余讀<莊子>至‘馬蹄’篇, 以‘馬’及‘埴’、‘木’起頭, 末段只言馬, 以卒其篇.

또, 위의 번역문은 아래와 같이 수정해야 한다.

“내가 <장자>를 읽다가 ‘마제’ 편에 이르러 보니 말(馬)과 ‘진흙(埴)’과 ‘나무(木)’로 이야기를 시작한 뒤 마지막 부분에서는 다만 ‘말’에 대해서만 말하면서 그 대목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2) ‘정호음과 어숙권의 박식함’(#231)에 나오는 <장자> 인용문 관련 오역

“고서에 ‘밤에 닭이 울면 세상이 반드시 어지러워진다’라고 했으니, 이 때문에 <장자>에도 ‘싸움에 나가려는 새 무리들은 모두 밤에 운다’라고 한 것입니다.”(384쪽)

이 대목도 오역이다. 이 구절에 대해 번역본은 아래와 같은 각주를 달아놓았다.

싸움에 나가려는 새 무리들은 모두 밤에 운다 <장자> ‘재유’편에 나오는 말로, “鴻蒙曰: 亂天下之經, 逆物之情, 玄天弗成. 解獸之群, 而鳥皆夜鳴. 災及草木, 禍及止蟲. 噫, 治人之過也”라 하였다.

그런데 번역자들이 정리한 ‘한문본’에는 <어우야담>의 원문이 아래와 같다고 돼 있다.

故<莊子>曰: ‘解戰[獸]之群鳥, 皆夜鳴.’

<어우야담>에 인용된 <장자>에 나오는 원문은, 통치자들의 다스림이 천지만물의 본디 성질을 거스르게 되어 짐승의 무리는 흩어지고 새들은 밤에 난다는 내용이다. 일반적으로 야행성 조류가 아니라면 새들은 밤에 날지 않기 때문이다. 이 대목의 전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하늘의 큰 줄기를 어지럽히고 사물의 참모습을 거스르면 하늘의 그윽함을 이룰 수 없다. 짐승의 무리는 흩어지고 새들은 모두 밤중에 울어 그 재앙이 나무와 풀과 벌레에까지 미치게 된다. 아, (이 모든 게) 사람을 다스리려 들어서 생기는 허물이다. (亂天之經, 逆物之情, 玄天弗成. 解獸之群, 而鳥皆夜鳴. 災及草木, 禍及止蟲. 噫, 治人之過也.)

이 대목 역시, 나의 서재에 있는 <장자> 주석서 10여종을 모두 뒤져봤지만, ‘解獸之群’의 ‘解’를 ‘戰’으로 고쳐 읽는 판본이나 주석서는 발견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신 교수 등 번역자들이 그런 판본을 본 적이 있거나 가지고 계시다면 어떤 판본인지 소개해주시길 바라며 필자도 열람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길 바란다.

신 교수 등의 <어우야담> ‘한문본’을 보면, 만종재본은 이 대목이 “解戰之群鳥, 皆夜鳴.”이라 돼 있으나, 청구패설본, 고대본, 국립중앙도서관본 등은 <장자>의 원문에서 ‘而’자만 빠진 채 “解獸之群鳥皆夜鳴”이라고 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에 ‘解’를 ‘戰’으로 고쳐 읽는 <장자> 판본이나 주석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번역자들은 이 대목을 매우 불성실하게 옮겼다고 볼 수밖에 없다. 나의 주장이 옳다면, 이 구절은 번역자들이 어떤 <장자> 주석서든 아무 것이나 하나만 뒤적여봤더라도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었음에도 그런 수고조차 게을리 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자의 입맛을 씁쓸해지게 만드는 것은, 1996년 한국문화사에서 펴낸 시귀선·이월령 역주 <어우야담>도 이 구절을 “장자도 싸움에 나가려는 새 무리들은 모두 밤에 운다라고 말하였으며…”(451쪽)라고 옮기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연유에서 그런 건지는 모르지만, 10년 전에 나온 해석서의 잘못이 신 교수 등의 번역서에서도 바로잡혀지지 않고 그대로 답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한두 글자의 해석 잘못이 ‘대세에 지장이 있느냐’고 할 이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대목에서 한국학계의 고전 주석의 수준이 드러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미 전거(典據)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대목조차 주석서를 찾아보는 수고를 게을리 해 잘못을 10년째 되풀이하고 있다면, 전거도 없는 대목에선 도대체 어떤 억측과 예단이 벌어질지 마음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어우야담>의 지은이 유몽인은 <장자>에 해박했으며 <장자>를 매우 즐겨 읽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번역서에서 <장자>를 인용한 구절이 먼저 필자의 눈에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고해두고 싶은 것은, 위의 오역이 포함됐다고 해서 이번 번역서가 ‘엉터리 투성이’라고 주장할 수는 결코 없다. 필자 또한 그런 주장을 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 고전 텍스트의 서로 다른 판본을 확인하고 견주어 완정본을 만들려고 노력한 이 연구자들의 피와 땀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비록 고투 끝에 나온 노작이라 하더라도, 진정 ‘노작(勞作)’이라는 이름에 값하려면 위와 같은 초보적인 오류를 포함하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점은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학자라고 해서 자기 분야의 지식을 모두 다 알 수는 없다. 중국의 유수한 고대 문헌학자들조차 5만여 자에 이르는 한자의 쓰임을 모두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주석서를 글로 펴낼 때는 글자 하나라도 철저하게 그 의미를 추적하는 철저함이 요구되며, 아는 것은 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모르는 것은 의미가 통하지 않는 대목 그대로 남겨두는 학자적 양심이 무엇보다 요구된다.

중국은 한국에 비해볼 때 1인당 지디피(GDP)가 1/5이나 1/10 수준이다. (물론 경제 지표가 다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중국에서 출간되는 주석서의 노작(勞作)들은 정말 ‘노작’이라는 이름값을 한다. 이런 노작들은 찾아보아야 마땅한 문헌은 빠짐없이 찾아보고 이를 해석과 평가의 레퍼런스(reference)로 삼고 있다. 이에 비해보면 이번 <어우야담>의 주석 작업은 아무래도 아쉬움이 남는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지금 중국 출장 중에 이 글을 쓴다. 내 수중에 이번에 나온 <어유야담>이 없기 때문에 답이 좀 늦어질 수는 있겠지만, 번역자들과 출판사 관계자들의 어떤 반박이나 비판에도 나는 응할 것이다. 내가 이국의 고단한 여정에서 새벽까지 이 글을 쓰는 건, 이런 논의가 우리 학계의 학문적 엄밀함과 성실함에 관한 반성에 작은 거름이라도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상이 신 교수와 출판사 관계자의 항의에 대한 나의 답이다.

이상수 기자 le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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