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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우수상] 어느 멋진 날 (상) / 리우진

등록 :2021-01-13 18:53수정 :2021-01-14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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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새벽 4시, 잠을 푹 자지 못해 약간은 멍한 상태에서 맞춰놓은 알람 시각보다 일찍 잠에서 깼다. 냉장고에서 찬밥을 꺼내 반찬 두어 가지에 아침을 먹으려니 어머니가 안방에서 나오신다. “어디, 가니?”

리우진ㅣ연극배우

나는 연극배우다. 반년 넘게 공연도 없고, 단역으로라도 불러주는 촬영 일정도 없었다. 불안하고 우울한 나날이 지속되는 일상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아무 일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 것이다. 생각 끝에 얼마 전까지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는 후배에게 전화해서 만나자고 하였다. 돼지 저금통을 따서 소주값 몇 푼을 들고 후배를 만났다. 후배가 일했다는 건설 현장에 가서 나도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곳은 머나먼 남쪽 지방이었다. 후배는 그곳에서 몇 개월간 먹고 자며 일을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어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서울에서 일을 알아보기로 하고 그냥 서로 사는 이야기만 하다가 자리를 파했다. 헤어질 때쯤 후배가 말했다.

“아, 참, 형! 건설 현장에서 일하려면 안전 교육 이수증을 먼저 따야 돼요.”

이건 또 뭔가 싶어 물었더니 설명을 해준다. 후배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는 정보였다.

다음날 인터넷으로 건설업 안전보건 교육을 무료로 해주는 곳을 검색하고 찾아갔다. 오후에 4시간 교육을 받고 이수증을 그 자리에서 발급받았다. 국가 공인 자격증을 취득한 것 같아 괜스레 뿌듯했다. 집에 오는 길에 역시 인터넷으로 인력 사무소를 검색해봤다. 여러 군데가 나왔다. 그중에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전화했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다른 곳에 해보았다. 전화를 받는다. 그런데 요즘 일을 줄 수 없는 상황이란다. 다시 다른 곳에 해보았다. 없는 번호란다. 그렇게 몇 군데 전화해보는데 살짝 두려움이 스며든다. 나 같은 무경험자에게도 일을 줄까? 어떤 기술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 몇 시에 일을 나가서 몇 시에 마치는 것일까? 복장은 어떻게 입고 가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지금은 이런저런 사정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내 코가 석 자.

이윽고 한 인력 사무소와 연결이 되었다. 집에서 지하철로 네 정거장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이었다. 일하고 싶다고 했더니 아침 5시까지 사무실로 오란다. 지하철 첫차도 다니지 않는 시각인데 어떻게 가냐고 했더니 버스 타고 오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 하아, 그곳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어야 말이지. 아무튼 알았다고 하고 이런 일은 처음인데 뭘 준비해 가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안전화는 있냐고 묻는다. 안전화? 신발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그래서 군대에서 신던 전투화를 신고 갈 것이라고 했더니 펄쩍 뛰며 안 된다고, 꼭 안전화를 신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일단 알았다고 하고 다른 준비물은 없냐고 물었다. 각반이랑 목장갑은 사무실에서도 판매하니까 내일 아침 사무실에 와서 구입해도 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되느냐, 기술이 있어야 하냐고 물었더니, 기술 필요 없단다. 그냥 청소 정도 하면 된단다. 청소 정도야 뭐. 그래서 알았노라고 내일 아침에 사무실로 가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일단, 안전화를 구입해야 했다. 검색을 해보았다. 언젠가부터 건설 현장에서는 의무적으로 안전화를 신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럼 어디서 구입을 해야 하나?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며칠 걸릴 테고. 동네 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신발 가게에 가서 혹시 안전화 있느냐고 물었더니 몇 개를 보여준다. 디자인은 다 비슷비슷한 것 같았다. 하긴, 지금 디자인이나 멋을 따질 때가 아니지. 얼마냐고 물었더니 6만원. 깎아서 5만5천원에 안전화를 사서 집에 들어왔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5시까지 인력 사무소에 가려면 4시에는 일어나서 대충이라도 아침을 챙겨 먹고 가야 했다. 첫날이라 택시를 타고 갈 생각이었다. 모든 게 처음 맞닥뜨리는 일이었다.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잠을 못 이루고 밤새 뒤척였다.

다음날 새벽 4시, 잠을 푹 자지 못해 약간은 멍한 상태에서 맞춰놓은 알람 시각보다 일찍 잠에서 깼다. 냉장고에서 찬밥을 꺼내 반찬 두어 가지에 아침을 먹으려니 어머니가 안방에서 나오신다. 우리 어머니는 매일 새벽 4시에 새벽 기도를 가신다.

“어디, 가니?”

“아, 네. 촬영이 있어서요.”

“어디로 가는데?”

“가까워요.”

어머니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다. 생전 해보지 않은 일을 하는데 괜한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아서다. 어머니는 촬영 잘하고 오라고 말씀하시며 먼저 집을 나서서 새벽 기도를 가셨다. 괜히 코끝이 찡해진다. 낡은 가방에 수건과 티셔츠 한 장, 집에 있던 목장갑 한 켤레를 넣고, 역시 낡은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집을 나섰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지난해 주최한 ‘10회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입니다. 하편은 다음주에 실립니다. 수상작 일부를 해마다 <한겨레>에 게재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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