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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숙의 강화일기] 플라스틱 일상

등록 :2020-10-18 15:39수정 :2020-10-19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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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숙 ㅣ 그래픽노블 작가

찬바람이 분다. 발목을 덮는 양말을 꺼낸다. 새것이다. 작년에 신었던 것들은 고무 밴드가 헐어서 자꾸 벗겨졌다. 새것에 가격표 딱지가 붙어 있다. 딱지는 플라스틱 고리에 제대로 박혀 손으로 잡아당겨도 떼어지지 않는다. 가위로 종이 상표와 플라스틱을 잘라낸다. 한 손에 쥐어도 쥐어지는 양말 한켤레에 종이, 플라스틱, 비닐까지 쓰레기가 한 움큼이다.

멍멍! 감자가 짖는다. 컹컹! 웅장한 소리로 당근이가 환장을 하며 감자를 따라 짖는다. 감자는 마당에서 짖어대고 당근이는 집 안에 들어와 짖다가 나가서 짖다가를 반복한다. 나를 부르는 것이다. “알았어, 기다려.” 2층 작업실에 있던 나는 당근이를 안심시켜보지만 소용이 없다. “그만 짖어. 이웃집 아주머니가 싫어하셔.” 아무리 타일러도 짖는다. 아마도 고양이를 보았거나 유기견을 보았으려니 싶다. 나는 서둘러 1층을 향해 계단을 내려간다. 거실 문을 여는데 갑자기 무언가 쿵! 하며 육중한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나가보니 사람의 흔적은 없고 상자 하나가 마당에 놓여 있다. 상자 위에는 “조심하세요. 무거워요”라고 붉은색으로 적혀 있다.

지인이 택배 일을 1년 이상 했다. 지인의 키는 180㎝에 덩치가 좋았다. 택배를 시작하고 한달 후에 그를 보았다. 많이 말라 있었다. 일이 몹시 힘들다고 했다. 때로 10층까지 엘리베이터도 없는 주택에 김치 상자를 배달할 때면 온몸이 아프다고도 했다. 상자를 잘 싸도 냄새가 심한데 김치를 싼 상자가 터지면 김치 국물이 입던 옷으로, 때로는 얼굴로 몸으로 쏟아졌단다.

그 말을 듣고 난 후부터 택배만 오면 그가 생각났다. 나는 마당에 있는 상자를 들었다. 나도 모르게 “아이고” 소리가 났다. 무거웠다. 책인 것 같다. 이렇게 무거운 택배일 때는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든다. 택배 기사를 봤다면 두유라도 하나 건넸을 텐데. 코로나 때문인지 택배 기사는 물건만 놓고는 금세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간신히 상자를 부엌으로 옮겼다. 칼로 박스테이프를 그어 열었다. 역시나 책이었다.

책을 꺼낸 후 상자를 버리기 위해 상자에 붙어 있는 비닐테이프를 칼로 뜯어내기 시작했다. 종이에 단단히 붙은 테이프는 분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주소가 적힌 종이 위에 씌운 비닐도 떼기 시작했다. 이마에 맺힌 땀이 볼을 타고 목으로 흘러내렸다. 분리가 잘되지 않자 짜증이 났다. 무슨 비닐이 이렇게 많이 붙어 있을까? 분리수거고 뭐고 그냥 버릴걸. 순간적으로 유혹도 생겼지만 남은 비닐 조각 하나까지 떼어내었다.

쌓여 있는 관리비 고지서를 봉투에서 일일이 꺼내어 계좌이체를 한다. 계좌이체가 끝난 고지서 위에 영어로 OK를 표시하고 한쪽에 둔다. 주소란에 투명 비닐이 붙어있는 봉투는 비닐을 따로 떼어낸 후 분리배출한다. 자동이체를 하면 종이도 절약되고 내 시간도 절약될 텐데 계좌이체에 대해 신용이 안 간다. 예전에 자동이체 신청했다가 실제 금액보다 매달 더 빠져나갔고 2년 후에야 그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작업하기가 쉽지 않다. 늘 날씨 탓을 하지만 가을은 너무도 아름답다. 짧기 때문에, 올해 여름 날씨에 지쳤기 때문이기도 하다. 간신히 마음을 잡고 원고를 쓰는데 감자가 꼬리를 흔들며 작업실에 온다. 내 손을 핥고는 나를 쳐다본다. 시계를 보니 정확하게 오후 5시다. 감자는 살아 있는 시계다. 산책 갈 시간인 거다. “알았어” 하고는 감자와 당근이를 데리고 나갔다. 논두렁으로 간다. 조금 걸어가는데 빈 플라스틱 포대와 봉투, 병들이 눈에 띈다. 비료포대, 농약병이다.

산책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쓰고 버려진 마스크들이 주인의 입 냄새를 간직한 채 뒹굴고 있다.

강화도로 이사 온 지 1년이 조금 넘었다. 거대한 트럭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화도와 도시를 오가는 모습이 보인다. 논밭, 작은 산 귀퉁이들이 잘려나간다. 일주일, 한달 사이 어느새 없던 집들이 들어섰다. 외국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화려한 저택들이 땅에서 봄나물 돋듯 솟아올랐다. 길옆에 피었던 달맞이꽃들은 짓밟혀 사라졌고 대신 그 자리에는 전원주택 짓느라 쓰다 버린 플라스틱 자재 쓰레기가 쌓였다.

좀 더 ‘낫고 편리한 일상’을 위해 플라스틱을 만들고 쓰고 버린 플라스틱을 처리하기 위해 에너지를 만든다. 그 에너지 가동으로 지구는 더워지고 인간은 미세먼지에 시달린다. 더위를 견디기 위해 에어컨을 만들고 미세먼지를 흡입하지 않기 위해 공기청정기를 만든다. 그것들을 만들고 사용하기 위한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 에너지를 또 만든다. 악순환이다.

플라스틱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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