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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호의 기억과 미래] 일본 대신 우리가 분단된 까닭

등록 :2020-08-13 04:59수정 :2020-08-13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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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미래

정병호|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왜 패전국 일본이 아니라 조선이 분단되었을까? 한민족 누구나 한번쯤은 가졌을 의문이다. 8월15일을 해방의 날로 기념하기에는 바로 그날부터 시작된 분단이 너무 억울하기 때문이다. 민족의 말과 글은 되찾았지만, 천만 가족이 생이별하고 온 나라 땅이 세계적인 전쟁터가 되었던 역사가 억울하고,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긴장과 갈등이 억울하다. 이 역사의 아이러니는 우연이었을까? 최근 연구들은 비밀해제 기록을 통해 당시 정황을 밝히고 있다.

전쟁에 승리한 연합국은 패전국 독일처럼 일본을 분할 점령하기로 했다. 1945년 6월 독일의 분할통치가 시작되었고, 일본이 다음 차례였다. 7월 포츠담 회담에서 미·영·중·소 연합국은 일본 분할점령에 합의했다. 미국이 간토와 간사이, 소련이 홋카이도와 도호쿠, 영국이 규슈와 주고쿠, 중국이 시코쿠를 각각 차지하고 도쿄는 베를린처럼 4개국이 분할통치하는 점령계획이 논의되었다. 8월13일 미 국무부는 “일본 점령을 위한 국가별 무력구성안”을 마련했다.

일본 분할계획이 왜 그대로 시행되지 않고, 엉뚱하게 조선이 대신 분단되었을까? 그 며칠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운다던 일본은 왜 서둘러서 8월15일에 항복했나? 지금까지는 주로 원폭 투하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재미 일본학자 하세가와 쓰요시 교수는 원폭 투하보다 소련 참전이 더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소련이 참여하는 일본 분할을 피하고, 천황제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원폭 때문에 항복했다는 주장은 미국의 일본 열도 단독 점령을 뒷받침했다(<종전의 설계자들>, 메디치미디어).

다른 한편으로 고시로 유키코 교수는 일본 군부가 미국과 소련의 충돌 지점이 일본 열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이나, 만주, 조선이 되도록 유도하려 했다고 한다. 패전 후 일본이 재기하는 데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조선의 38도선 부근도 일본군이 꼽은 유력한 미·소 대립 지점 중 하나였다. 소련은 8월9일 개전하자마자 만주와 남사할린으로 진격하고, 하루 만에 함경북도 웅기를 점령했다. 다음날인 10일 일본은 항복 의사를 알려왔다. 미군 소령 딘 러스크는 하룻밤 사이에 조선의 38도선을 분할점령선으로 제안했다. 소련군의 홋카이도 상륙은 시간문제였다. 일본 천황은 8월15일 ‘종전(패전도 항복도 아닌) 선언’을 했다. 일본이 가장 두려워했던 소련이 참여한 일본 열도 분할점령은 피할 수 있을 만큼 빠른 항복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소련을 동아시아로 끌어들이고, 원자탄 같은 인류적 재앙을 불러온 너무 늦은 항복이었다. 1945년 2월, 얄타에서 연합국 정상이 소련의 대일전쟁 참전을 논의하고 있을 때 일본의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는 “패전 불가피론”을 주장했다. 패전 이후 공산혁명을 피하고 천황제를 유지하려면 조속히 영·미 쪽과 교섭해서 전쟁 종결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쇼와 천황은 그래도 종전 협상을 유리하게 하려면 적에게 확실한 타격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4월의 오키나와 전투였다.

“출혈작전”이라고 했다. 목적은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적의 출혈을 최대한 야기해서 항복 조건을 완화하는 것이었다. ‘출혈’은 맞서 싸우는 일본군과 모든 민간인에게도 요구되었다. 가미카제 자살특공대도 투입됐다. 일본 본토를 지키는 ‘방파제’, ‘버리는 돌’이라고 했다. 오키나와 전투는 참혹했다. 직접 전투를 한 양쪽 군인 사상자도 많았지만, 주민 46만명 중 12만명이 죽었다. 긴급 동원된 1만명에 이르는 조선인 ‘군부’와 ‘위안부’도 함께 희생되었다.

무모하고 잔혹한 “출혈작전”과 마주친 미국은 소련의 참전을 재촉하면서 동시에 원자폭탄 개발을 서둘렀다. 폭탄이 만들어지자 전쟁을 빨리 끝내려고 수십만 인구의 도시에 두차례나 원폭을 투하했다. 신무기의 위력을 과시해서 전후 패권을 다지려는 목적도 있었다. 소련은 침공 날짜를 앞당겨서 일본 점령의 지분을 챙기려 했다. 천황제를 지키려고 항복을 늦춘 일본과 동아시아 질서를 자기 쪽에 유리하게 만들려 한 강대국의 전략 때문에 수백만이 희생되고 민족의 운명이 갈렸다.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김구 선생은 그 교묘한 시점에 한탄했다. 중국에서 오랜 국공내전을 겪으며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지켜본 망명정부 수반은 ‘해방’을 그냥 반기지 못했다. 해방과 함께 온 분단이 어언 75년, 남북 대립과 전쟁 공포는 아직도 이 땅을 억누르고 있다. 분단의 아픔을 딛고 우리는 선생이 그토록 바라던 ‘문화의 힘’을 쌓아 올렸다. 국제 정세는 다시 이 땅을 미·중 초강대국 충돌의 최전선으로 떠밀고 있다. 자주외교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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