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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칼럼

[세상읽기] 도살장 앞에서 / 홍은전

등록 :2020-02-17 18:44수정 :2020-02-18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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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전 ㅣ 작가·인권기록활동가

‘서울애니멀세이브’에서 개최하는 ‘비질’에 참여했다. 비질은 도살장을 찾아 공장식 축산이 가린 폭력을 직면하고 기록하는 활동이다. 도살장까지 가는 데는 서울 집에서 3시간이 걸렸다. 도살장은 아무 멋도 부리지 않은 커다란 공장이었고, 입구엔 집채만한 트럭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돼지를 보기도 전에 난생처음 맡아보는 악취가 코를 찔러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트럭 속엔 똥과 오줌, 토사물을 온몸에 시커멓게 뒤집어쓴 돼지 수십마리가 옴짝달싹도 할 수 없도록 빽빽하게 뒤엉켜 있었다. 그들은 태어난 지 6개월 된 새끼들이었고, 도살되기 1시간 전이었다.

돼지를 마주하세요, 라고 진행자가 말했을 때 나는 당황했다. 그건 어떻게 하는 걸까. 주변 사람들을 곁눈질했다. 어떤 여성은 철창살을 물어뜯는 돼지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고 있었고, 어떤 남성은 트럭을 돌며 돼지에게 물을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대기 중인 트럭 기사가 별 희한한 걸 다 본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방 속엔 돼지에게 주려고 삶아 온 감자가 있었지만 나는 어쩐지 그것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삶은 감자가 트럭 기사의 생계와 노동을 비난하는 것처럼 보일까 두려웠다. 도살장은 이상한 곳이었다. 목마른 돼지에게 물을 주는 일도, 아무 죄 없이 곧 교수형에 처해질 생명을 위해 울어주는 일도, 그것이 도살장 앞이라면 어딘가 조금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나는 한마리의 돼지와 계속 눈이 마주쳤다. 다른 아이들이 추위와 공포에 떠느라 잔뜩 움츠리고 있을 때 녀석만은 계속 몸을 움직이며 철창 바깥의 인간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나는 용기를 내 감자를 꺼내 녀석의 입에 넣어주었다. 깔끔한 도살을 위해 돼지들은 전날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였다. 그의 눈이 붉었다. 아픈 것인지, 우는 것인지, 둘 다인 것인지. 나는 그러는 동안에도 혹시 그에게서 나쁜 균이라도 옮을까 걱정되었고, 녀석의 침이 내 손에 닿지 않게 하려고 손가락 마디마디에 잔뜩 힘을 주었다. 나의 깨끗한 손이 몹시 위선적으로 느껴졌다. 돼지가 세번째 감자를 받아먹고 있을 때 트럭에 시동이 걸렸다. 엎드려 있던 돼지들이 동요하며 일제히 머리를 들자, 수십개의 커다란 귀들이 다홍빛으로 출렁거렸다. 그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소, 돼지가 아니다.” “장애인도 인간이다.” 그것은 우리의 오랜 슬로건이었다. 짐승이란 권리 없는 존재였고, 인권은 항상 그들을 딛고 올라서는 것이었다. 그들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도살장 앞에 섰을 때에야 깨달았다. 그날 살아 있는 돼지를 처음 보았다. 태어나자마자 어미와 분리되었고 마취 없이 성기를 잡아 뜯기고 꼬리가 잘린 돼지를. 똥오줌으로 가득 찬 좁은 축사에서 쓰레기 같은 음식과 다량의 항생제를 먹으며 오직 살이 찌는 기계로 6개월을 산 돼지를. 온몸이 피부병과 상처인 배고픈 어린 돼지가 감자 세알을 다 먹지도 못한 채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나는 바라보았다. 그는 곧 컨베이어벨트 위에 올려질 것이고 머리에 전기 총을 맞을 것이다. 운이 나쁘면 목을 베인 뒤 거꾸로 매달려 피를 철철 쏟아낼 때까지 숨이 붙어 있을 것이고 그대로 끓는 물에 들어갈 것이다. 그에게 세상은 한치의 과장도 없는 지옥이고 아우슈비츠였다. 나는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지난주 밸런타인데이를 맞이해 동물권 활동가들이 ‘피로 물든 젖꼭지’ 시위를 벌였다. 20대 여성들이 주축이 된 시위대가 상의를 벗자 젖꼭지에 붉은 피 분장을 한 맨몸의 가슴이 드러났다. 초콜릿 등의 유제품을 위해 끊임없는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며 새끼를 빼앗기고 젖을 착취당하는 소들이 있음을 폭로하는 행동이었다. 젖소들의 고통에 연대하기 위해 한겨울의 광화문에서 젖가슴을 드러낸 여성들을 보며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살장 앞에서 흐느껴 울던 여성이 전사처럼 당당하게 서 있었고, 그들 옆엔 ‘동물 해방’이라고 쓰인 깃발이 나부꼈다. 맹렬히 비폭력적이고 맹렬히 과격한 그들의 시위가 너무 멋있어서 나는 가슴이 아플 지경이었다. “인간도 동물이다.” “우리는 동물을 위한 사회적·정치적 변화를 한 세대 안에 이룰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슬로건이었다. 모르는 단어가 하나도 없는데 이토록 낯설고 아름답고 혁명적인 조합은 처음 보았다. 새로운 세상을 품은 그들이 온다.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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