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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부끄러움은 왜 학생의 몫인가 / 윤태웅

등록 :2016-10-25 18:27수정 :2016-10-25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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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웅
ESC 대표·고려대 공대 교수

이해충돌이 만연합니다. 부정한 청탁과 정당한 요청의 경계는 흐릿하고, 공사의 구별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주변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요. 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은 이런 세상에 살던 우리에게 거절의 근거를 마련해주었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취직이 확정된 졸업예정자들의 조기 출근 문제로 골치 아파하는 교수들이 꽤 있습니다. 학기도 다 마무리하지 못한 학생들의 출근을 기업들이 강요할 땐, 개별 대학이나 교수에겐 별 뾰족한 대책이 없었습니다. 합격자를 다른 곳에 빼앗기지 않으려면 일찍 출근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게 기업들의 주장이었고, 취업률을 높이려는 대학으로선 이를 묵인할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었으니까요. 교수들은 또 제자의 앞길을 막는 셈이 될까 두려워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불출석을 용인해오기도 했습니다.

수업도 듣지 않고 학점을 달라고 요청하는 건 부정 청탁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졸업예정자들을 미리 데려가겠다는 기업의 요구도 마찬가지고요. 청탁금지법은 그런 요구를 거절할 법률적 근거입니다.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일이 그리 풀리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청탁금지법이 시행되기 이틀 전인 지난 9월26일, 교육부는 각 대학에 공문을 보내 학칙 개정을 권고했다 합니다. 조기 취업 대학생이 무사히(?) 출근하며 학점을 딸 수 있게끔 배려하라는 뜻이지요. 그에 따라 이미 학칙 개정을 했거나 준비 중인 대학이 꽤 있다고 합니다. 교육부가 학칙 개정을 유일한 해결책으로 내놓은데다 대학들도 취업률 높이기 경쟁에 나서고 있어, 곧 더 많은 대학이 학칙을 바꿀 거로 예상됩니다.

조기 취업생을 배려하는 선의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선의가 늘 좋은 결과로 이어지진 않습니다. 게다가 원칙을 훼손해가며 방책을 찾으려 해서도 안 되겠지요. 학점을 다 따지도 않은 학생을 출근시키려는 기업에 그게 부당할 뿐 아니라 이젠 위법한 행위라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하는 대신 제대로 출석하지 않아도 학점을 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게 과연 교육기관이 해야 할 일인지요? 교육부는 왜 그렇게 반대 방향으로 가려 하고, 대학은 또 어찌 그리 속절없이 교육부에 끌려다니는지요?

“부끄러움은 왜 학생의 몫인가?” 최순실씨의 딸이 수업에 참여하지도 않고 학점을 챙기는 등 온갖 특혜를 받은 데 항의하며 이화여대 학생들이 교정에 내걸었던 현수막입니다. 학교도 학사관리에 명백한 문제가 있었음은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학이 이처럼 스스로 권위를 무너뜨린다면, 어쩌면 기업이 학생들을 미리 데려가겠다 해도 형식적 논리를 빼곤 할 얘기가 별로 없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모두가 부끄러웠지만, 학생들이 먼저 일어섰습니다. 교수들도 함께했습니다. 결국 총장 사퇴로 이어졌습니다. 학교 당국이 원칙을 훼손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면, 이렇게 구성원들이 직접 나설밖에요. 다른 길은 없어 보입니다.

청탁금지법이 거절의 근거가 될 수 있는데도 학칙까지 바꿔가며 조기 출근 요구를 들어주려 하는 교육부와 대학이 안쓰럽습니다. 기업엔 대학의 학사일정을 존중해달라고 거듭 부탁합니다. 더불어 우리 대학들도 존중받을 만한 교육과정과 학사관리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하리라 여깁니다. 마지막 강의까지 제대로 듣는 게 학생들의 미래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학교수로서 저도 책임감을 느낍니다. 부끄러움은 교수의 몫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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