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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루프물’로서의 대한민국 / 박권일

등록 :2016-05-05 19:54수정 :2016-05-05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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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명이 영문도 모른 채 목숨과 건강을 잃었다. 잠재적 피해자는 약 30만명으로 추산된다. 사태를 일으킨 기업과 그들의 ‘법률 용병’은 책임회피에 혈안이다. 기업이 마음대로 가습기 살균제를 판매하도록 허가한 건 대한민국 정부였다. 직접 책임은 기업에 있지만 최종 책임은 정부에 있다. 뉴스를 읽다가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말이 입에서 절로 흘러나왔다. 그러다 흠칫, 기시감을 느꼈다. 대체 이 말만 몇 번째지?

2000년대 이후로만 따져봐도 여러 번이다. 세월호 참사, 천안함 침몰 사건, 황우석 논문조작 사건…. 언젠가부터 국가의 총체적 무능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일은 예외 사태가 아닌 일상생활이 됐다. 마치 ‘루프물’ 같다. 루프물이란 고리(loop)에 갇힌 것처럼 동일한 사건이나 시간이 무한히 반복되는 이야기를 가리킨다. 1993년에 나온 할리우드 영화 <사랑의 블랙홀>은 루프물의 고전 중 하나인데, 어째선지 매일 아침 같은 날(2월2일)을 시작해야 하는 남자가 주인공이다. 루프물은 꽤 유서 깊은 장르다. 거슬러 올라가면 시시포스 신화가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시시포스가 힘겹게 밀어올린 바위는 산 아래로 떨어지고, 그것을 밀어올리기 위해 그는 다시 내려가는 일을 되풀이해야 한다. 루프물에서 어떤 상황이 거듭되는 데 합리적인 이유 같은 건 없다. 신의 형벌 또는 초자연적 이변이다. 하지만 국가의 총체적 무능이 반복해 전시되는 상황, 즉 ‘한국형 루프물’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다.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재난이 일어나고, 일어난 다음에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광경이 되풀이되는 것엔 분명한 사회적 이유가 있다.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원칙과 대의가 장식물로 존재한다. 반칙을 한 약자에게는 가혹한 반면, 반칙을 한 강자에게는 관대하다 보니 원칙이나 대의는 모든 이들이 냉소하는 허수아비가 되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이윤보다 인간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명제가 실제로 사회에 관철되게 만드는 건 개인의 도덕심이 아니라 구체적인 제도와 문화다. 둘째, 제대로 기록하지 않는다. 기록하지 않으니 어떤 사고가 나도 집요하게 책임을 묻기 어렵고 흐지부지 망각되기 쉽다. 그래서 시간이 조금 지나면 유사한 잘못이 또 발생한다.

이 두 가지 습속은 하나의 뿌리를 갖고 있다. 바로 성과주의다. 철학자 한병철은 “하지 마”의 규율사회가 오늘날 “할 수 있어”의 성과사회로 이행했다고 말하지만, 사실 한국은 이미 오래전 개발독재 시기부터 초(超)성과주의 사회였다. “해봤어?”와 “하면 된다”의 성과주의, “유도리(융통성) 있게”와 “빨리빨리”의 성과주의 말이다. 국가는 공동체 구성원들을 혹독하게 억압했지만, 실적이 좋은 구성원은 규율을 어겨도 눈감아주곤 했다. 얼마짜리 대형 수주를 따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지 어떤 경로로 따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가 성공이면 잘못된 것도 정당화되고, 실패면 잘한 것도 깡그리 부정되었다.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거나 기록되지 않으니 성공과 실패의 경험이 사회의 자산으로 축적되지도 못한다.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안전난간이 없어 사람이 쇳물에 빠져 죽고, 반도체 부품을 만들던 이가 백혈병에 걸려 죽는 일이 21세기에 벌어지고 있는데, 기업과 국가는 그런 죽음들이 어쩔 수 없는 사고라고, 자신과 무관하다고 부정해왔다. 반세기 넘게 이어져온 한국 사회 시스템은 한마디로 표현해 ‘인간을 갈아 넣는 체제’였다. 루프에서 빠져나오는 것, 그것은 체제의 이런 속성을 바꾸는 것이다. 아득하고 막막하지만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없다. 우리가 해야 한다.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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