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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제일반

‘맛의 방주’를 꿈꾸는 토종 씨앗 전도사

등록 :2014-01-21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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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사랑리에서 텃밭을 일구고 있는 박영재씨는 토종 씨앗을 늘리고 보급하는 일을 사명으로 삼고 있는 토종 씨앗 전도사이다.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사랑리에서 텃밭을 일구고 있는 박영재씨는 토종 씨앗을 늘리고 보급하는 일을 사명으로 삼고 있는 토종 씨앗 전도사이다.
[나는 농부다] 박영재 씨드림 운영위원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사랑리. 살얼음에 덮인 드넓은 밭. 한 뼘쯤 자란 밀 싹이 서리를 맞아 퍼렇다. ‘앉은뱅이밀’ ‘남해밀’ ‘진주밀’ ‘참밀’ ‘다홍밀’ 푯말들. 반갑다, 토종 우리 밀. 이랑을 따라 멀리까지 쭉 푯말이 박혀 있다. 호밀, 귀리, 양파, 여주 마늘, 괴산 마늘, 완주 마늘, 가평 마늘. 마늘 종자가 그리 많았나 싶다. 햇살이 따스하게 들이치는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가니 갖가지 종자가 들어 있는 망이 주렁주렁 걸려 있고, 땅에는 배추들이 심어져 있다.

“여주 개골무, 평창 찰옥수수, 완주 뒤안마늘, 횡성 자주감자, 곡성 동부….” 종묘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름들이다. 잊혀가고 있는 작물들이 이 토종밭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1500평이나 되는 너른 밭, 200여가지 품종을 키우느라 손이 여간 많이 가지 않을 터. “스물대여섯명 되는 토종학교 학생들이 거들어줘요.” 토종 씨앗을 수집하고 증식해서 보급하는 일을 외면할 수 없는 자기 소명으로 여기는 텃밭지기 박영재(48)씨. 그는 어쩌다 토종에 꽂히게 되었을까?

“맛을 보니까 역시 다르더군요. 토종 고추랑 딸기를 심었었죠. 장모님께서 ‘그래, 맞아, 이 맛이야’ 하면서 감탄하시더군요.” 온갖 식품첨가물에 길들여진 입맛으로는 느끼기 쉽지 않은 맛이었을 것이다. 종자회사에서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개량 씨앗들에 휩쓸려 사라져가는 토종에 대한 애정은 그렇게 싹텄다.

2008년부터 안완식 박사와 귀농운동본부에서 주관한 토종 수집단 대열에 합류해 경기도 여주와 가평, 강원도 평창과 횡성, 전라도 완주와 곡성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농촌이 그렇게 허물어져 있을 줄은 몰랐어요.” 할매 할배들만 남아 있는 마을. “푸드뱅크에서 챙겨주는 밑반찬에 기대어 사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노인네들을 보살펴줄 마을 공동체가 사라진 몰골은 충격이었다. 그러나 거기 아직 토종 씨앗들이 남아 있었다. “산간오지에서 만나는 할매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어요. 씨앗은 여지없이 그분들이 간직하고 있더라고요.” 할매들은 여기저기 쑤셔두었던 씨앗 봉지들을 내놓았다. “시집올 때 어머니가, 할머니가 챙겨주셨다”는 씨앗들.

“이제 농촌에는 젊은 층도 없거니와 간혹 있더라도 돈이 되는 과수나 축산에 매달려 있죠. 할매들이 돌아가시면 누가 그 씨앗들을 이어받아 키워 나갈까요. 수백, 수천년을 우리 기후와 토양에 맞게 적응해온 귀한 자원들이 사라져 버릴 위기죠.” 그래서 그는 토종 씨앗을 모으고, 늘리고, 나누는 ‘씨드림’(대표 안완식) 활동에 힘을 보태는 길로 나섰다. 그러나 토종 종자를 심을 밭을 마련하는 것조차도 만만치 않았다. 지금의 화성 농장에 오기까지 세 번이나 밭을 옮겨 다녀야 했다. 다행히 지난해 경기도에서 예산을 지원해 시설을 마련할 수 있었다. 올해는 농촌진흥청에서 토종 종자 관리기관으로 지정하여 어느 정도 숨통을 틀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씨를 뿌리고 씨를 거두는 권리를 다국적 종자회사들의 손에서 찾아오려면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생태적 가치를 따라 삶을 바꿔보려는 귀농인들에게 희망을 걸게 돼요. 지역을 되살리면서 정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는 연구센터 냉동실에 갇혀 있는 씨앗이 아니라 해마다 심어지고 거두어지는 살아 있는 씨앗을 지킬 수 있는 활동들을 기획해 나갔다. 2012년부터 토종학교를 열고, 지난해 토종씨앗 도서관을 연 것도 그런 활동 가운데 하나다. 씨앗 어린이학교도 열었다. 새해에는 그 동네에서 수집한 토종은 그 동네에서 키워낼 수 있도록 지역별로 네트워크를 꾸리는 일을 시작했다. 전라도와 경기도에 사는 농부들이 먼저 나서고 있다. “토종 씨앗으로 기른 작물을 전통 방식으로 가공하여 ‘맛의 방주’에 등재했으면 싶어요.” 지역마다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작물을 고유의 맛을 가진 음식으로 특화하는 것이야말로 이 땅에서 농사가 해야 할 또 하나의 몫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박씨의 비닐하우스에 토종 씨앗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다.
박씨의 비닐하우스에 토종 씨앗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다.

어린이집에 식자재 공급 계기로
안전 농산물 찾다 직접 뛰어들어
여주 개골무, 완주 뒤안마늘 등
전통종자에 반해 수집·보급 시작
올해부터 지역별 네트워크 구성
“지역마다 다른 특성 가진 작물
고유맛 내는 음식으로 특화해야”

그가 도시농업에 눈을 뜬 것은 10여년 전. ‘수도권 생태유아공동체’에 근무하면서 유치원, 어린이집에 친환경 식자재를 공급하는 일을 하면서부터다. 식자재가 생산되는 과정을 속속들이 알아보고 나서 안전하다 싶은 농산물을 대느라 친환경적으로 농사짓는 생산자들을 만나고 다니다 보니 자신도 농사를 짓고 싶었다. 사무실 창고 옆에 텃밭을 만들고 상자에도 이것저것을 심었다. 재미도 쏠쏠했지만 텃밭에서 키우는 채소의 맛은 남달랐다.

“아이들에게 제아무리 좋다는 먹을거리를 챙겨주면 뭐하나, 잔반통으로 버려질 바에야.” 회의도 들고 친환경 급식보다 아이들의 죽어 있는 입맛을 살리는 것이 먼저겠다 싶은 생각이 들던 차였다. “아이들도 자신들이 돌보고 가꾼 것은 더 맛나게 먹지 않을까?” 인터넷에서 외국 사이트를 찾아보니 선진국에서도 이미 텃밭이 미각교육의 일환으로 접근되고 있었다. 농업행정의 백미도 식생활 교육에 있었다. 그래서 귀농운동본부와 손잡고 어린이집, 유치원에 텃밭을 만들어주는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텃밭을 하면서 아이들만이 아니라 교사들도 변해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본격적으로 농사를 배워야겠다 싶어 2005년에는 도시농부학교에도 등록했다. 텃밭지기를 맡으면서 그의 농사는 무르익었다. 똥오줌을 받고, 음식쓰레기를 모아 퇴비를 만들고, 씨앗을 채취해서 되심는 농사에 신명이 났다. 원래 어떤 일이라도 재미없으면 하지 않는 성미에 맞게 “너무나 재미있었다.” 땀 흘리며 일하고 났을 때의 상쾌함은 마약처럼 그를 텃밭으로 불러냈다. 몸을 움직이고 나면 작물의 변화로든, 아이들의 변화로든 성취감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매력이었다. 고무 함지박에서 벼와 연꽃을 기르던 농사는 수백평의 논에서 벼와 연꽃을 기르는 농사로 이어졌다. 지금은 논밭 1200평을 빌려 벼와 70여가지 작물을 키워 돈 주고 사 먹을 일이 없다. 그의 든든한 동지이자 스승은 한집에 사는 장모님. 농사도 같이 짓지만, 갈무리해서 보관하는 법은 어려서부터 몸에 익혀온 장모님을 따라갈 수가 없다.

“언젠가는 고향에 내려가서 농사지을 거예요.” 그의 고향은 전남 고흥.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유학을 온 그는 대학교까지 줄곧 자취를 했다. 어린 나이에 객지에서 혼자 살다 보니 먹을 것을 제대로 챙겨 먹기 어려웠다. 고3 때는 폐결핵에 걸려 군대도 못 갔다. 그 후유증은 마흔살 되었을 때 아토피로도 나타났다. 가려움을 견딜 수 없어 두 팔과 등이 피범벅이 되도록 긁적여야 할 정도였다. 아토피에 좋다는 것을 다 해 보아도 여전했다. 그러다 단식을 하고 나서 씻은 듯이 나았다. 먹는 대로 몸이 된다는 것을 절감했다. 지금 시대를 사는 우리의 미각이 오염되어 있다는 것을 몸으로 확인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는 요즘 부쩍 요리에 정성을 쏟는다. 그동안 ‘이러저러한 것은 먹이지 마세요’ ‘좋은 것 먹이세요’ 하면서 활동했지만 정작 하나뿐인 아들을 챙겨주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원죄처럼 사무쳐서다. 자신이 기른 작물로 맛깔난 음식을 만들어 먹이고 싶은 아버지로서의 꿈이 활동가로서의 꿈과 맞물릴 때 그의 행복도 배가하리라.

글·사진 이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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