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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2.24 08:26 수정 : 2009.02.24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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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스트레스 호소…심리상담 건수 급증
구조조정 소문 귀 쫑긋…상사말엔 ‘예스맨’
승용차 대신 통근버스…개인 술자리 줄여

국내 4대그룹의 한 계열사에 다니는 이 아무개 차장의 사원증엔 요즘 메모지 한장이 붙어있다. ‘회사 6대 중점추진 과제’다. “혹시라도 윗사람이 갑자기 물어보면 대답할 정도는 되야 하지 않겠냐”며 그는 멋적게 웃었다.

대기업 직원들 사이에 구조조정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고용대란에도 주요 대기업들이 “인위적 구조조정은 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만큼 주변에서 “너희는 팔자 좋다”는 소리를 듣지만 실상은 다르다.

이런 불안감은 외환위기를 경험했던 간부급 직장인들에게 특히 더하다. 한 대기업 차장은 “바로 옆 사람들이 하루만 지나면 사라지는데도 그 사람 몫의 일을 하느라 정신없던 기억이 선명하다”고 말했다. 삼성 몇몇 계열사에서는 직원들 사이에 구체적으로 몇년차가 구조조정 대상이란 ‘소문’이 떠돌고, 엘지전자도 ‘20% 생산성 향상 계획’에 따른 전환배치 움직임에 직원들이 촉각을 곧두세우고 있다.

전자계열의 대기업에 다니는 한 과장은 비이커 물속에 집어넣은 개구리에 ‘유예된 구조조정’을 비유했다. “물을 갑자기 끓이면 ‘앗 뜨거’하고 살겠다고 뛰쳐나가기라도 하지만, 서서히 물을 데우면 알지 못한 채 죽어가는 거 아니냐.”

깊어가는 불안감

실제 각 기업의 심리 상담실엔 스트레스나 불안감을 호소하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삼성전자가 전국 7곳 사업장에서 운영중인 열린상담센터엔 올들어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호소하는 상담이 부쩍 늘었다. 수원 사업장의 경우 1주일에 들어오는 30여건의 상담 가운데 10% 이상이 이런 내용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보통은 자신이 갈등이 어디서 오는지 알고 상담을 하는데, 최근엔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불안, 우울, 그리고 가족내 또는 직장내 본인의 위치에 대한 고민 등에 대한 상담이 늘어났다”며 “이는 개인의 삶에 불확실성이 증가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고 전했다. 심리검사에서도 스트레스 진단의 인기가 크게 늘었다.

가장 고민이 많은 이들은 고참 부장급이다. 한 대기업의 부장은 “사정상 계열사를 옮겨야 하는데 이전과 달리 ‘무겁다’는 이유로 다른 계열사에서 받아주질 않는다”고 한숨을 쉬었다. 엘지전자의 심리치료실에도 1, 2월 들어 전직이나 직장내 불안을 상담해오는 건이 늘었다. 대기업 인사팀에 있는 나 아무개 과장은 “경영지원 직군의 경우 직접적인 감원 대상이 될까 걱정하기보다는 지원 인력을 줄여 영업 등 현장으로 배치되는 데 대한 불안이 크다. 영업경험도 중요하긴 하지만 이런 어려운 시기에 그 대상이 된다는 것 자체가 개인에게는 상대적 박탈감을 가져 올 수 있다”고 말했다.


늘어난 눈치

의견이 틀려도 상사에 맞장구치기, 아부성 멘트하기, 필요없는 보고하기…. 최근 취업컨설팅회사 인크루트와 엠브레인이 직장인 1075명에게 불황과 경기침체로 직장에서 비굴하고 민망한 행동을 한 적이 있는지 물은 조사에서 80.1%의 응답자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중견기업의 엔지니어인 이 아무개 대리는 “예전엔 팀장이 술 한잔하자고 번개 회식을 하면 약속있다고 안 모이던 팀원들도 지금은 거의 100% 출석이다. 출근도 더 당겨서 하게 된다”고 요즘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또 “3월중에 구조조정이 있을 거란 소문이 들리며 뒤숭숭하다”며 “당장 일보다는 어떤 소문이 도는지 정보에 귀를 세우게 되고, 팀장의 전화 통화내용도 귀를 쫑긋 세워 듣게 된다”고 말했다.

그룹 지주회사에 근무하는 조아무개 과장은 “안 그래도 기업에 개별 성과주의가 강화되면서 옆 사람과 협업을 꺼리는 경향이 짙어졌는데 전환배치나 구조조정 문제가 나오면서 더더욱 자기 성과만 챙기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의 차아무개 차장은 “삼성이 하면 우리도 구조조정을 하지 않겠느냐는 불안감이 퍼져있다”며 “임원들은 밑에 사람들한테 일을 갑절로 시킨다. 예전 같으면 ‘못한다’고 들이박기도 하고 그럴텐데 지금은 시키는 대로 한다”고 전했다.

얇아진 지갑

‘짠돌이 생활’은 불황에 대처하는 직장인의 기본자세다. 대기업이라고 예외는 없다. 경기침체와 유가 상승 등으로 직장인들이 승용차 출퇴근을 줄이면서, 엘지그룹의 경우 통근버스 이용률이 1년전보다 20% 가까이 올랐다. 서울 서린동에 있는 에스케이 본사 사옥 구내식당은 지난해 1월 34%였던 이용률이 43%로 높아졌다. 직원 둘 가운데 한명 꼴로 사내식당을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변화는 임직원의 독서 행태에도 나타나고 있다. 에스케이 사내 도서관 대출건수는 지난해에 견줘 20% 이상 늘었고, 읽는 책도 취미·여가 등에서 실용서 위주로 바뀌고 있다. 역사나 영화·레저·스포츠 관련 도서는 대출 건수가 각각 35%, 10%씩 감소한 반면, 어학과 경제·경영관련 책이 각각 37%, 16%씩 늘어났다. 에스케이 사내도서관 관계자는 “특히 위기 속에서 성공한 기업이나 개인을 다룬 책들의 대여가 급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업무상 필요한 자리가 아니면 저녁 모임도 가급적 줄이는 분위기다. 대기업 한 직원은 “일주일에 두세번 갖던 동창이나 친구들끼리 모임도 이젠 한달에 한두번 꼴에 그치고 있다”고 말했다.김영희 이재명 기자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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