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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9.01 21:12 수정 : 2010.09.01 21:12

다산을 현대 행정학의 렌즈로 조명한 책 <다산의 행정사상>과 <다산의 행정개혁>의 출간기념회가 열린 지난 30일 서울 종로 인사동에서, 이를 주도한 세 명의 학자(왼쪽부터 최병선 서울대 교수,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김영평 고려대 명예교수)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고전 연구 새모델 ‘다산행정연구모임’

‘다산 고전’ 번역본·기존연구 바탕
현대 행정학의 눈으로 6년여 토론
‘제도주의’ 사상 찾아내고 책으로
“서양 학문 틀 벗어나는 계기 희망”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는 자조적인 표현이 나올 정도로 고전의 인기는 그리 높지 않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고전은 대부분 우리글이 아니라 한문으로 적혀 있기 때문에 그 경향은 더욱 심하다. 여기에 서양에서 비롯된 주류 학문 체계 탓인지, 똑같이 ‘번역’을 필요로 하면서도 우리나라 고전은 서양의 고전보다도 되레 찾는 발걸음이 뜸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 고전은 주로 인문학자들만 옆에 끼고 있을 뿐,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최근 행정학자들이 다산 정약용을 현대 행정학의 관점으로 연구한 결과물을 <다산의 행정개혁>과 <다산의 행정사상> 두 권의 책으로 내놓아 눈길을 끌고 있다. 책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고전에 대한 1차 연구인 우리말 번역, 사회과학자들의 우리 고전에 대한 관심, 장기적이고 꾸준한 공동연구 등 새로운 학문이 만들어지기 위한 요소들이 조화를 잘 이룬, 하나의 모범사례가 보인다. 지난 30일 이 책들의 출간에 주도적 구실을 한 김영평 고려대 명예교수(행정학)와 최병선 서울대 교수(행정학), 그리고 이들에게 다산의 모든 글들을 원재료처럼 공급했던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을 만났다.

일은 박석무 이사장으로부터 시작됐다. 다산에 관한 최고 전문가로 꼽히며 다산 번역과 연구에 한평생을 바쳐온 박 이사장은 어릴 때부터 친구인 김영평 교수를 늘 압박했다고 한다. “행정학을 한다면서, 왜 조선의 최고의 ‘정법가’(政法家)인 다산을 연구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목민심서>나 <경세유표>가 모두 정부 개혁에 관한 것이니 당연히 행정학자가 연구를 해줘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다가 2004년 다산연구소가 만들어진 것이 새로운 계기가 됐다. 스스로도 고전에 관심이 많았던 김 교수가 여러 행정학자들을 다산연구소로 끌어들여 ‘다산행정연구모임’이 만들어진 것이다. 20여명 정도가 모여 2주에 한 차례씩 다산의 저작물을 윤독하고, 그 내용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이런 활동은 고전 연구자들의 기존 성과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공부한 최병선 교수는 “우리가 한문투성이인 고전을 직접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번역본과 기존 연구 내용을 바탕으로 삼아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산의 행정개혁>과 <다산의 행정사상>
다산연구소는 이들에게 다산의 모든 저작물을 번역본으로 제공했고, 박석무·임형택(성균관대 교수) 등 다산학의 대가들은 아무런 보상도 없이 강의를 해줬다. 이런 토양에 힘입어 다산 연구에 깊이 빠져든 행정학자들은 2005년 아예 학술진흥재단의 연구과제에 응모해 연구비 지원을 받아냈다. 그동안 주기적인 토론의 결과물들을 행정학회나 정책학회의 토론회에서 발표하거나 학술지·학회지에 게재하는 등 꾸준히 세상에 알려오다가, 이번에 아예 책으로 내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행정학의 렌즈로 본 다산은,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가? 다산은 관(官)-민(民)의 관계 설정에서 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했던 ‘제도주의’ 학자에 가깝다고 한다. 김 교수는 “최근 행정학·정책학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강제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게임의 룰’에 대한 연구가 각광받고 있다”며 “<목민심서> 등에서 나타나는 다산의 행정사상은 바로 그 제도이론”이라고 말했다. 곧 인간의 협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보편적 제도를 연구하고 있는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엘리너 오스트롬의 고민을, “다산은 이미 200여년 전에 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다산의 인간 본성에 대한 천착은, 동시대를 살았던 애덤 스미스와 비슷하다”고 평가한다. 다산은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쫓는 인간의 본성을 인정하는 한편, 교육·법제도·관료제도 등 제도적 처방을 통해 사회에서 나타나는 부조리를 막는 방법을 고민했다는 것이다. 그 고민의 뿌리가 ‘인간의 본성’에 있었다는 것은 굉장히 높은 수준의 사회과학적 접근이라는 얘기다. 그는 “가렴주구와 수탈은 조선시대가 아닌 지금에도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며 “다산의 고민과 연구를 지금의 행정학자들도 이어받아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세 학자는 고전 번역과 행정학이 만나서 낸 이번의 성과에 대해, “징검다리 구실을 한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현재 우리의 학문 풍토가 서양에서 만들어진 틀을 주로 쓰고 있는데, 그런 틀을 벗어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행정학은 20세기 초 미국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사실 인간 세상이 생긴 뒤 행정학·정책학은 항상 있었던 것”이라며 “우리의 역사적 현실을 잘 모르고 서양에서 온 것만 공부했던 것이 부끄러웠던 적도 있다”고 말했다. 현재 학문의 역사가 끊어져 있는데, 이를 다시 이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작업은 행정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박 이사장은 “행정학뿐 아니라 다른 학문 분야에서도 이런 연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일이 다른 학문 분야에도 좋은 자극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전에 대해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는 자조적 표현이 아닌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표현도 있다. “읽을수록 새로운 책”이란 표현이다.

글·사진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