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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기(59)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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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 황현 전집 최초로 완역한 한학자 임정기씨
학교 안가고 가학 전수받은 ‘선비’고전번역원서 33년간 연구 활동
“매천의 의리·정의 지금 절실해”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500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 몸을 바친 자가 한 명도 없다면 어찌 통석할 일이 아니랴!”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하자 전남 구례의 선비이자 조선 후기 최고의 시인으로 꼽혔던 매천 황현은 이렇게 말한 뒤 독을 마시고 죽었다. 100년이 흐른 뒤 그의 문집인 <매천집> 전체 3권을 처음으로 완역해낸 임정기(59·사진)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은 “그의 죽음은 고루한 충정이 아니라 온 나라 국민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주기 위한, 지식인으로서의 결단”이라고 평가했다. 한국고전번역원은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순국선열인 매천 황현과 향산 이만도의 문집인 <매천집>과 <향산집>을 최근 발간했다. 그동안 각종 추모사업은 많았지만 정작 이들의 정신세계를 볼 수 있는 글은 번역조차 안 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미 깊은 성과다. 특히 번역원은 영재 이건창, 창강 김택영과 더불어 조선 후기 3대 문장가로 꼽히는 매천의 번역을, 번역원의 최고참이자 시 번역에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진 임정기 수석연구위원에게 맡겼다. 임씨는 요새 보기 힘든 ‘진짜 선비’다. 전남 보성 출신으로 1951년생인 그는, 평생 학교라는 곳에 다녀본 적이 없다. 대대손손 한학 연구를 해 온 집안의 5대 종손으로서,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가학(家學)을 전수받았다”. 이른바 ‘사회’에 진출하게 된 것은 스무살께 부모님이 세상을 뜬 뒤였다. 임씨의 높은 학문 수준을 잘 아는 누군가가 한학계의 거두인 청명 임창순(1914~1999) 선생에게 그를 소개해, 서울에 있던 태동고전연구소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1974년 현재 고전번역원의 전신인 민족문화추진회가 문을 열 때 참여를 했고, 부설기관인 국역연수원 연수부를 졸업한 뒤 아예 연구원으로서 취직을 했다. 그 뒤 33년 동안 번역원에서 연구에만 매진했으니, 결국 예순 평생 한문만 읽은 셈이다. 임씨는 “어렸을 때부터 집단생활을 해본 적이 없으니, 처음에는 사회생활이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이런 그를 도운 것은 언제나 학문 그 자체였다고 한다. “졸립다가도 글을 보면 잠이 깬다”는 그는, 학문이 주는 재미와 선비로서의 소신에 기대어 어렵고 힘든 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목은집>, <점필재집>, <사가집> 등 그의 수많은 번역 작품들은 바로 그런 내적인 투쟁의 결과물이다. 임씨는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 헤아리니,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되기 어렵다”는 매천의 절명시를 인용하며, 매천으로부터 선비, 곧 지식인의 모범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매천은 스스로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사회에 메시지를 주려고 했고, 이것은 이익과 손해만을 따지는 요즘 세상에서 특히 다시 새겨야 할 지식인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는 “총칼 없는 조직적 독재 등으로 우리 사회가 곪아가고 있는 이때에, 매천이 몸소 보여준 ‘의리’, 곧 ‘정의’라는 가치는 더욱 절실할 것”이라고 뼈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글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