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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전북대에서 9차 동아시아출판인회의 개막식이 열리고 있다. 동아시아출판인회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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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100권의 책’ 보니…
‘학술적 성과·대중성·영향력’ 기준 선정
진보색채 뚜렷…한·중·일서 번역 출간
동아시아에서 오래된 책이나 옛 경전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고전’이 특정 분야의 권위서나 명저를 지칭하게 된 것은 서구의 클래식(classic) 개념의 번역어로 채택된 근대 이후의 일이다. 서구에서 ‘고전적’(classicus)이란 개념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2세기쯤으로 전해지는데, 흥미로운 점은 당시만 해도 ‘고전적’이란 개념의 반대말은 ‘새로운’(new)이 아니라 ‘천박한’(vulgar)이었다는 사실이다. 고전이란 개념에는 처음부터 가치판단적 요소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동아시아출판인회의가 29일 목록을 공개한 ‘동아시아 100권의 책’은 각국의 출판계가 자부심을 갖고 내놓은 ‘현대의 고전들’이다. 동서와 고금을 막론한 모든 고전들의 목록이 그렇듯 이 책들 역시 선정 과정에 특정한 가치판단이 개입돼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 점은 특히 사회과학 저서들의 목록에서 쉽게 확인되는데, 한국의 경우 <전쟁과 사회>(김동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박명림) <한국의 노동운동과 국가>(최장집) 등 대체로 진보적 관점에서 쓴 학술서들이다. 여기에 <뜻으로 본 한국역사>(함석헌), <갈릴래아의 예수>(안병무), <흔들리는 분단체제>(백낙청) 같은 종교·사상서와 시론집을 더하면 비판적·진보적 색채는 한층 두드러진다.
일본 책들 역시 사토 신이치, 이시모다 다다시 등 좌파정당이나 사회운동에 관여했던 진보적 연구자들의 저작이 60~70% 정도를 차지하는데, 이는 선정자 개개인의 성향 탓이라기보다 책이 쓰인 당대의 사회·문화적 지형과 관련이 깊다는 게 출판인들의 설명이다. 오늘날의 동아시아, 특히 한국과 일본의 출판계와 담론시장을 주도하는 인물들 대부분이 사회운동이 활발하던 1960~80년대 청년기를 보낸 세대(일본의 안보투쟁 세대와 한국의 386세대)라는 점, 무엇보다 독창적이고 문제적인 저작들은 대체로 사상과 가치체계가 극심한 변화를 겪는 문화적 격변기에 등장한다는 ‘출판계의 진리’가 100권의 목록 안에 고스란히 관철되고 있다는 얘기다. “우리의 독창성은 시대가 우리에게 각인시킨 낙인으로부터 나온다”는 보들레르의 단언과 같은 이치다.
목록 선정은 인문·사회과학을 포함해 문학평론, 예술사, 과학철학 등 넓은 의미의 인문서를 대상으로 했다. 학술적 성과와 대중성을 함께 고려하면서 사회에 미친 지적·사회적 영향력을 주요 기준으로 삼아 선정 작업을 진행했는데 이 과정에 진통이 적지 않았다. 한국 쪽 선정위원으로 참여했던 한경구 서울대 교수는 “학자와 출판인들로 구성된 추천팀이 1차 목록을 뽑았는데, 이견이 적지 않아 설문조사와 몇 차례의 회원사 간담회를 거쳤다”며 “이 과정에서 원칙과 절차가 균형을 이루고, 최대한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목록을 만들어내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선정된 책은 한국의 경우 ‘지식의 갈래사’에 관한 것이 가장 많다. <한국의학사>(김두종), <한국과학사>(전상운), <한국음악사>(장사훈), <한국수학사>(김용운·김용국), <한국근대문예비평사>(김윤식), <한국미술의 역사>(김원용·안휘준), <한국문학통사>(조동일) 같은 책들이다. 한국 학문 역사에 생소한 동아시아 독자들을 염두에 둔 선정으로 읽힌다.
<지눌의 선사상>(길희성), <한국유학사상론>(윤사순),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유동식)은 한국의 독창적 사상세계를 담고 있다는 점이 고려된 경우다. <백범일지>(김구)는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의 저작으로, 문학성과 사상적 깊이를 두루 갖췄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아 1950년대 이전 저작으로는 이례적으로 포함됐다. 박명림 교수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은 한국전쟁에 관한 전통주의·수정주의의 대결구도를 넘어 치밀한 고증과 분석으로 전쟁의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김동춘 교수의 <전쟁과 사회>는 기원에 집중하기보다 피해자인 민간인을 중심으로 한국전쟁에 접근해 전쟁 연구의 새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점을 인정받아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저작임에도 목록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중국과 일본, 대만, 홍콩의 저작의 경우는 일부를 제외하고 국내에는 소개되지 않은 생소한 책들이 대부분이다. 중화권 책 중에선 <중국철학 약사>(풍우란), <미의 역정>(리저허우), <현대중국사상의 흥기>(왕후이), <중국예술정신>(슈후관), <만력15년>(레이황) 등이 한국어로 출간되거나 번역중이다.
일본 책 가운데는 <전시기 일본의 정신사>(쓰루미 슌스케), <천황의 초상>(다키 고지), <천황이 죽어가는 나라에서>(노마 필드) 등이 국내에 번역돼 있다. 박진우 숙명여대 일본학과 교수는 “진보적 시각의 학술서들이 주종을 이루는 것 같다”며 “대중들이 읽기에는 쉽지 않은 내용이지만, 학문적 소통과 상호이해를 높이기 위해선 꼭 번역돼야 할 책”이라고 평가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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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100권의 책’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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