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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문화일반

멈춰버린 세상에서도 자기 할 일 다 하고 있는 쪽파들

등록 :2020-09-19 10:49수정 :2020-09-19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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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런 홀로
줄 서지 않는 기쁨, 베란다 농사

마스크, 감자… 코로나 소비 대란
줄 서는 특별한 경쟁 포기하고

감자, 파, 허브, 창가에 심었더니
농산물 폭등에도 유용한 식재료

관심 주지 않는 동안 흙 속에서
조용히 몸을 키운 식물들
화분을 정리하려고 흙을 엎었더니, 조그만 구근(알뿌리)이 쏟아졌다. 물도 관심도 주지 않는 동안, 쪽파가 흙 속에서 조용히 구근을 불리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자 마음 한켠이 시큰했다.
화분을 정리하려고 흙을 엎었더니, 조그만 구근(알뿌리)이 쏟아졌다. 물도 관심도 주지 않는 동안, 쪽파가 흙 속에서 조용히 구근을 불리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자 마음 한켠이 시큰했다.

올여름, 태어나 처음으로 감자꽃을 보았다. 홀치기 염색을 하고 대충 펼쳐놓은 손수건처럼 생긴 꽃이었다. 주말 아침에 화분 위로 은은하게 피어난 꽃잎을 바라보다가, 봄에 싹 난 감자를 그냥 버렸더라면 이번 생엔 감자꽃이 무슨 색인지 영영 알 일이 없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검색만 거치면 뭐든 알 수 있지만, 오히려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은 줄어드는 세상을 살고 있으니까.

연초에 베란다가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집에서 이것저것 식물을 키워볼 생각에 들떠 있었다. 내가 새집에 품었던 기대는 하나였다. 식물을 마음껏 키울 수 있는, 볕 잘 드는 남향 베란다가 있다는 것. 따스한 봄만 되면 회사에서 키우던 제라늄을 가져와 베란다 가장 밝은 자리로 옮기고, 은빛 솜털이 돋은 유칼립투스도 들이고. 방 안에 기분 좋은 그늘을 드리울 풍채 좋은 극락조화와 켄차 야자도 키울 것이라고. 그러나 그 부푼 희망들이 다 이뤄질 봄보다도 앞서 찾아온 것이 코로나19, 그리고 감자였다. 강원도 핵감자.

마스크, 감자, 아스파라거스, 스타벅스 레디백…. 올해 코로나19의 대두 이후 생존과 직결된 물품으로 변모한 마스크 수요와 대조되어서일까. 차례로 ‘대란’을 일으킨 각종 한정품에 대한 열기는 좀 희한하다 싶을 만큼 뜨거웠다. 특히 도지사가 홍보에 나섰던 강원도 감자 특판은 회사에서도 대단한 화제였다. 감자 주문이 시작되는 아침 10시가 되면 은근히 사무실 안이 조용해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피케팅’(피 튀기는 티케팅)의 최고봉이라는 방탄소년단 콘서트 예매도 척척 해내는 금손 동료 빼고는 대부분 사이트 접속조차 못 해본 채 판매가 끝나버렸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본 감자꽃.
태어나 처음으로 본 감자꽃.

창가 화분 잎 뜯어 요리하는 재미

다시 돌아보면 한정품 유행은 일종의 사회적 애착인형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다. 전염병 때문에 전에 없이 사회적인 반경이 위축된 상황에서 일어난 ‘특별한 소비’ 경쟁. 누구도 익숙지 않았던 이상하고 불안한 일상에서, 한정품을 내건 선착순 경쟁은 여전히 내가 이 사회 안의 존재라는 소속감을 일깨우는 가장 쉽고 강렬한 자극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정품이라는 말, 선착순이라는 말 자체가 나 이외의 존재들과의 부대낌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케팅은커녕 명절 기차표 예매조차 단박에 성공해본 적 없는 나는, 3월 감자 대란이 다 끝난 뒤 동네 마트에서 핵감자님을 영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저장감자라 그런지 며칠 지나지 않아 서너 알은 싹이 나버렸다. 평소라면 도려내고 쓰든 버리든 했을 텐데, 이제 베란다도 생겼으니 한번 길러볼까 싶었다. 그길로 흙을 사다 빈 화분에 싹 난 감자 몇 알을 심었다. 요리하고 남은 파 뿌리도 모아 화분에 심고, 화원에서 손바닥만한 허브 모종도 몇 개 들여놓으면서 첫 베란다 농사를 시작했다.

봄과 여름 내내 채소와 허브를 키우는 재미가 쏠쏠했다. 요리를 하다 베란다에서 바질잎 몇 장을 툭툭 뜯어다 쓸 때면,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의 그 유명한 ‘뒷마당 바질’이 떠올라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여름 끝물 잦은 폭우로 채소값이 폭등했을 때도 한 단에 오천원 하는 대파 대신 그동안 길러놓은 대파 화분을 요긴하게 썼다.

그러나 보기 좋게 자라면 그만인 풀 키우기와 달리, 감자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아이고, 누가 감자를 저렇게 심는다니!” 화분 한가운데에 싹 난 감자를 통으로 꽂아놓은 사진을 가족 채팅방에 공유하자마자, 부모님의 비대면 온라인 수업이 열렸다. 과목명은 ‘내가 농사 지어봐서 아는데’. 대한민국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이답게, 수경재배로 고구마와 당근, 양파 정도는 키워보았지만 이건 도무지 속수무책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걸 수확해야 하니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가장 궁금한 것은 수확 시기였다. 흙 안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농부들은 감자가 얼마큼 자랐는지 어떻게 알고 캐내는 것일까.

하지만 비료도 주고 친환경 약도 쳐가며 보살피다 백일 만에 수확을 감행한 감자 농사 결과는 피식하는 헛웃음 수준이었다. 감자 화분들에서 자라난 이파리가 주변 화분을 다 가릴 만큼 무성했는데, 정작 흙을 엎고 보니 속은 초라했다. 생수병 뚜껑만한 알감자가 도합 일곱개. 그나마도 흙을 뚫고 들어온 햇빛에 노출되었는지 죄다 초록색이었다. 이 소박한 수확물 사진을 본 부모님은 한바탕 웃으시고는, 잘 두었다 가을에 다시 심어보라며 황급히 농사 수업 종강을 선언하셨다. 핵감자를 심었는데 씨감자가 되다니, 역시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나무가 된다는 남귤북지는 진리인가….

100일 만에 수확을 감행한 감자 농사의 결과로 생수병 뚜껑만한 초록빛 알감자 도합 7개를 얻었다.
100일 만에 수확을 감행한 감자 농사의 결과로 생수병 뚜껑만한 초록빛 알감자 도합 7개를 얻었다.

흙 안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농부들은 감자가 얼마큼 자랐는지 어떻게 알고 캐내는 것일까.
흙 안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농부들은 감자가 얼마큼 자랐는지 어떻게 알고 캐내는 것일까.

겉보매만으로는 결과를 알 수 없었던 것 중엔 쪽파 화분도 있었다. 두어번 잎을 잘라 먹은 뒤엔 힘이 쇠했는지 좀처럼 새잎이 올라오지 않았다. 그런데 긴 장마 동안 방치하다 며칠 전 화분을 정리하려고 흙을 엎었더니, 안에서 조그만 구근(알뿌리)이 우르르 쏟아졌다. 매끈매끈한 연자줏빛이 고와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사람이 물도 관심도 주지 않는 동안, 쪽파가 흙 속에서 조용히 구근을 불리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자 마음 한켠이 시큰했다. 거리두기로 인한 휴업이 길어지면서 내 마음에도 코로나 블루가 드리우기 시작할 때였기 때문이다. 봄에는 3일에 한번 쉬던 회사를, 8월부터는 하루 걸러 쉬었다. 월급은 그만큼 줄어드는데 업무량은 그대로라, 하루에 이틀치 일을 몰아서 해치우다 보면 문득문득 화가 치밀었다. 그러고 나면 다음날은 혼자 집에서 무기력하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보이지 않아도 영글고 있다

그러다 베란다 구석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있는 쪽파 구근들을 발견한 뒤 변화가 생겼다. 쉬는 날이든 일하는 날이든, 아침에 눈을 뜨면 곧바로 물조리개를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점점 햇빛으로 밝아지는 공간 속에서 마른 것을 적시고 젖은 것에 바람을 쏘이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며, 내일이야 어떻게 되든 오늘도 허투루 보내선 안 되는 소중한 하루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주말에 하고 싶던 일들, 밥을 잘 챙겨먹고, 스트레칭을 하고, 책을 쓰고 글을 읽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점차 징검다리처럼 돌아오는 휴업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무언가에 온전하게 마음을 쏟을 수 있는 나로 돌아가기 위한 재활의 시간이 되었다.

겨울엔 ‘봄 지나면’, 봄에는 ‘여름 지나면’일 줄 알았던 전염병의 종식은 이제 적어도 두세 해는 더 이 병과 공존하게 될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관망으로 바뀌었다.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질본의 간곡한 당부는 진작에도 있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계절이 거듭 바뀌고 마음의 몸살을 겪은 뒤에야 나는 이제 정말로 ‘덜 좋을 수도 있는 미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가고 있다.

올가을에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을 새로운 한정품은 무엇일까. 그러나 이제 나는 선착순으로 주어지던 기쁨을 추억하는 대신, 서툴고 낯선 과정을 천천히 영위해나가는 것으로 이 낯선 현재에 적응해볼까 한다. 그리고 믿고 싶다. 코로나 속에서도 우리 삶의 어딘가는 더 나아지고 있다고, 혹은 보이지 않아도 속에서 영글고 있다고. 처서 지나 다시 심은 감자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글·사진 유주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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