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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밤의 시대에 새벽은 찾아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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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의 눈 / 가을답게 쌀쌀한 날, 집에서 2시간 걸리는 쓰쿠바대학엘 다녀왔다. 대학축제 강연 때문이다. 일본에서 가을은 대학축제의 계절이다. 내가 근무하는 대학에서도 11월 초 사흘간 축제가 열린다. 대학 당국도 축제기간 중에는 휴강을 해서 협력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이미 20년 이상 정치문제나 사회문제를 정면에서 다루는 ‘무거운’ 주제의 행사는 거의 본 적이 없다. 강연회라면 으레 연예인들이 강사로 나서는 풍토가 자리잡았다. 이런 목적 없는 경박한 축제 소란에 휴강까지 해가며 협력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도 1960년대, 70년대에 대학생활을 보낸 세대의 교수들 사이에서 간간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쓰쿠바대학 예술학과 학생들이 내게 강연을 부탁했다. 나는 좀 놀랐다. 우선 나는 쓰쿠바대학과는 아무 인연도 없고 보통의 학생들이 흥미를 보일 만큼 유명인도 아니다. 게다가 나는 무거운 얘기밖에 할 줄 모른다. 요즘 대학생들이 좋아할 구석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강연 의뢰를 해온 학생들은 뜻밖에도 모두 여학생들인데다 그들이 보내온 메일은 온통 진지한 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사에키 유조가 예감했고 아이 미쓰를 삼켜버린 저 밤의 시대에 새벽은 찾아왔는가. 틀림없이 날은 새고 있는 것인가. 어둠은 더 짙어졌는데.” 사에키 유조도 아이 미쓰도 화가 이름이다. 사에키는 파리에서 독자적 화풍을 구축해 일본에서 화단의 스타가 됐으나 약속된 성공에 등을 돌리고 다시 파리로 가서 미친 듯 그림을 그리다 1928년 객사했다. 일본에서 치안유지법이 제정 공포되고 군국주의 시대로의 전락이 가속화하던 무렵의 일이다. 아이 미쓰는 1938년 국가총동원법이 제정된 해에 쉬르레알리슴풍의 대작 <눈(眼)이 있는 풍경>을 그렸다. 그 불안한 눈은 임박한 대전쟁을 예견하고 있다. 대다수 화가들이 국가에 영합해 전쟁화를 그리던 시절에 아이 미쓰는 그것을 거부했다. 그는 병졸로 중국 전선에 소집됐다가 일본 패전 뒤 군병원에서 사망했다. 같은 일본 군인들한테서 이지메를 당한 결과라고 한다. 요컨대 사에키와 아이 미쓰는 근대 일본 미술계에서 국가로부터 독립한 개인으로서의 존엄을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주장한 드문 존재였다. 그들의 메일을 좀더 소개해보겠다. “(지난해 가을 이후 불황 속에 대량해고와 과로, 임금 삭감 등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을 지적한 뒤) 학생들은 아슬아슬하게 주어진 학생시절이라는 모라토리엄(위기의 일시적 정지, 지급유예)을 즐기고 아르바이트와 서클활동에 열중하면서 취직이 잘될 것이라 막연히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굴욕적이지 않은가? 이런 상태가.” “예술을 감상하거나 제작하는 일은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을 갖고 눈앞에 있는 것을 자신의 머리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지금 예술을 배우거나 제작하는 곳도 마비돼 있거나 모조품을 보고 안심하듯 만족해하고 있는 것이 예사다. 이래서는 스스로 표현하거나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이 있을 수 없다. 납득할 수 없는 것투성이인데 그것을 속이지 말고 몸 전체로 느껴보고 싶다. 그나마 공부하고 있는데, 정직하게 말해, 자극제가 됐으면 좋겠다.” “사에키 등에게 있던 원동력이라고 할까, 기둥 같은 것이 우리에겐 완전히 결여돼 있다. ‘경험한 바 없다’고 하는 것만으로는 이유가 되지 않는 더 근본적인 무엇인가가 빠져 있다. 그게 안타깝다. 사치스런 얘기일지 모르겠으나 우리에게 현재는 너무 불편하다. 이런 이상한 사회에서 어떤 그림을 그리라는 건가!” 치안유지법이 공포되던 무렵 사에키는 일본에서 화단의 스타가 됐으나 파리로 가서 1928년 객사했다. 아이 미쓰는 대다수 화가들이 전쟁화를 그리던 시절에 그것을 거부했다. 둘은 근대 일본 미술계에서 국가로부터 독립한 개인으로서의 존엄을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주장한 드문 존재였다.
이들은 여학생 12명으로 구성된 자신들 그룹을 ‘예술해방군’이라 이름 붙였다. 이 작명은 물론 현대의 젊은이들다운 농담이 섞여 있지만 그래도 그들이 오싹한 억압을 감지하고 있고 거기로부터 해방을 희구하며 몸부림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과 상의하면서 나는 강연 타이틀을 ‘전쟁과 예술-현대의 표현이란’으로 정했다. 굳이 ‘무거운’ 타이틀을 선택한 것이다. 당일의 내 강연은 올해 한국에서 출판된 <고뇌의 원근법>이라는 책 내용을 토대로 한 것이다. 우리의 ‘예술해방군’은 열심히 준비를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날 청중은 많지 않았다. ‘예술해방군’ 중 한 명은 학우들에게 알림 전단지를 뿌렸으나 ‘전쟁’이라는 글자를 보기만 해도 뒷걸음질 친다며 탄식했다. 지인들에게 참가를 호소해봤자 대체로 “너무 진지하군” 하는 반응만 돌아올 뿐이란다. ‘진지하다’라는 말은 상대와 거리를 두기 위해 일본 학생들이 흔히 쓰는 소극적 거절의 의사표시다. 불안을 외면하려는 사람들에겐 ‘진지’하고 ‘무거운’ 것은 성가실 뿐이다. ‘예술해방군’들은 자신들이 일상적으로 부딪치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강연 뒤의 질의응답 시간에 한 학생이 “무관심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내는 좋은 방법이 있는가” 하고 묻기에 이렇게 대답했다. “바로 그것이 예술에 던져진 과제다. 그 무관심의 벽을 예술의 힘으로 깨뜨리려는 고투에서 저 카라바조, 고야, 피카소, 딕스 등의 표현이 태어난 것이다. 당신도 예술에 뜻을 두고 있다면 그런 예술적 투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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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도쿄경제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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