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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6.20 17:49 수정 : 2008.06.20 19:58

디아스포라의 눈

디아스포라의 눈 /

지난주 일요일(6월8일), 나는 오랜만에 도쿄 도심에 나갔다. 오차노미즈에 있는 메이지대학에서 열린 ‘제주 4·3’에 관한 심포지엄에서 모처럼 서울에서 온 서중석 교수의 강연을 듣기 위해서다. 하지만 오늘 쓰려고 하는 얘기는 그게 아니다.

강연을 한참 듣고 있는데 내 휴대전화가 울기 시작해 주변에 실례를 범했다. 받아 보니 아내였다. 강연을 들으러 간다고 얘기해 뒀는데 굳이 전화한 것을 보면 어지간히 급한 일이 있나 보다 생각했는데, 아내는 “괜찮아요? 조심하세요”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어서 도무지 요령부득이었다.

심포지엄이 끝나고 다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보니 그는 “임시뉴스에서 지금 당신이 가 있는 곳 근방에서 무차별 살인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괜찮아요?”라고 했다. 오차노미즈와 아키하바라는 지척이다. 그 아키하바라에서 정체불명의 남자가 행인들을 무차별 살해했다는 것이다. 그 시점에서는 아직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여서 아내로서는 내가 거기에 휘말려 피해를 당했을지도 몰라 불안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한국에서도 보도됐겠지만, 그날 이후 알게 된 사실을 정리해 보자. 8일 일요일 낮 12시30분 조금 지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기제품상가 아키하바라에서 한 남성이 타고 온 트럭으로 행인들을 친 뒤 잇따라 다른 행인들을 칼로 찔렀다. 남자 6명과 여자 1명이 죽고 1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곧 경찰에 체포된 범인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아키하바라에 왔다. 세상이 싫어졌다. (죽인 상대는) 누가 되든 상관없었다”라는 얘기를 했다.

사건 소식을 들었을 때 “있을 수 없다”거나 “믿을 수 없다”고 반응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실은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비슷한 사건이 요즘 잇따랐다. 올해만 해도 1월에는 도쿄 시나카와에서 남자 고등학생이 행인 다섯명에게 칼부림을 한 사건이 있었다. 3월에는 이바라키현에서 24살 남자가 한 사람을 죽이고 7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아키하바라 사건을 알고나서 내가 받은 인상은 “일본 사회도 올 데까지 왔구나” 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사건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신자유주의의 길로 돌진해 가는 한 아키하바라 사건의 교훈은 한국 사람들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게 될 것이다.


아키하바라 사건의 범인은 25살이다. 아오모리현 출신으로 중학교 졸업 때까지는 성적이 우수했다고 한다. 그런데 유수의 대입준비학교에 진학한 뒤부터 성적부진에 빠졌다. 대다수 학우들이 대학에 진학했으나 그는 자동차 정비기술을 가르치는 단기대학에 들어갔다. 사건 당시 그는 시즈오카현의 자동차공장에서 도장(칠) 작업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정규사원이 아니었다. 인재파견회사에서 파견된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그의 직장에서는 최근 200명의 비정규직을 50명으로 줄이는 대규모 구조조정 계획이 추진되고 있었다. 사건 사흘 전 출근했을 때 늘 입던 작업복이 보이지 않자 그는 자신이 감원 대상이 됐다고 오해한 나머지 분개하며 조퇴를 했다고 한다. 그 다음날 먼 후쿠이현까지 가서 서바이벌 나이프 여섯 자루를 구입했다. 사건 당일 그는 아침 일찍 렌터카 트럭으로 상경한 뒤 아키하바라에서 행인 3명을 트럭으로 치고 다른 행인들을 잇달아 칼로 찔렀던 것이다. 어느 평론가는 그가 자신이 연기할 ‘극장’으로 ‘오타쿠의 메카’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키하바라를 택했다고 말했다.

그는 범행을 결행하기까지 휴대전화 사이트에 범행을 예고하는 많은 글을 남겼다. 거기에는 “친구를 사귈 수 없다”는 등 고독감을 호소하는 내용이 눈에 띄는데, 그중 가장 내 시선을 끈 것은 “고교를 졸업한 뒤 8년간, 연전연패”라는 글 한 줄이다. 고이즈미 정권하의 신자유주의 정책 결과 일본은 극단적인 격차(양극화)사회가 돼 방대한 수의 프리터(Free Arbeiter의 줄임말)를 양산해 왔다. ‘프리터’라는 건 안정된 취직이 불가능한 젊은이들을, 마치 그들 자신이 그렇게 살고 싶어서 비정규직을 택한 듯이 일컫는 일본 특유의 화법이다. 신자유주의 경쟁사회의 생존경쟁에서 이겨 상승하는 자는 ‘가치구미’(승리조), 몰락하는 자는 ‘마케구미’(패배조)이고 ‘마케구미’가 된 것은 당사자의 ‘자기책임’이므로 동정하거나 구원의 손길을 내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팽대한 비정규직 젊은이들은 해고 불안과 격차사회에 대한 막연한 분노를 품지만 그 불안이나 분노를 서로 나눌 또래를 만날 수도 없어 자신한테 ‘마케구미’의 낙인을 찍을 수밖에 없도록 길들여지고 있다. 그중에서 방향성을 잃은 폭력을 폭발시키는 자가 나타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할 것이다. 아키하바라 사건에서 내가 받은 인상은 “일본 사회도 올 데까지 왔구나” 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사건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임이 분명하다.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사건 이틀 뒤 강의 때 이 사건에 대한 내 생각을 학생들에게 밝혔다. “이 강의 테마는 ‘인권과 마이너리티’지만 여러분도 어떤 의미에서는 마이너리티라고 할 수 있다. 사회에서 주변화되고 있는데도 그것을 호소할 방법을 모르고, 또 설사 호소하더라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주지도 않는다. ‘마케구미’로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해, 라는 질타를 받을 뿐이다. 그러나 이 격차사회의 구조 속에서는 누군가는 ‘마케구미’가 될 수밖에 없다. 여러분 다수도 마음속으로는 자신이 ‘마케구미’로 전락하는 게 아닌가 겁을 내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아키하바라 사건) 범인은 여러분과 무관한 괴물이 아니라 여러분의 이웃이다. 그런 폭발에 이르지 않기 위해, 그리고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인간을 ‘가치구미’와 ‘마케구미’로 양분하는 잘못된 가치관과 싸우고, 격차사회를 바꾸기 위해 상황에 맞서야 한다.” 학생들은 숨을 삼킬 듯한 표정으로 내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한국에서는 미국산 쇠고기 문제로 촉발된 시민의 촛불시위가 이명박 정권을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 고립된 채 자폭하는 일본 젊은이들에 비하면 한국 젊은이들이 훨씬 더 희망에 차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신자유주의의 길로 돌진해 가는 한 아키하바라 사건의 교훈은 한국 사람들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게 될 것이다.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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