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도로의 사정을 보고 추정해 보니, 그건 왼쪽 길에서 차들이 진입하여 합류해 들어온다는 경고 표지였다. 영어로 굳이 말하자면 'Merge from Left'가 되겠는데, 미국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그림으로 알려준다. 즉 곧게 뻗는 간선도로를 선으로 두껍게 그린 뒤에 그 왼쪽에 가느다란 선을 그려 간선도로에 합류시키는 화살표 표시를 만든 그림 말이다. 굳이 글로써 표지를 세우겠다면, '왼쪽에서 진입' 정도가 그 뜻에서 한층 더 명쾌할 것 같다. '좌로'보다는 '왼쪽에서'가 훨씬 더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교통 용어로 '유입'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병영사회에서 성장한 386 세대에게 '좌로'라는 단어는 '왼쪽을 향해' 내지는 '왼쪽으로'라는 뜻으로 거의 각인되어 있으며, 솔직히 까놓고 말하면 '좌로'나 '우로'라는 말은 제식훈련할 때 쓰는 군대용어다. 현재도 그런 뜻으로 계속 쓰인다. (예: 좌로굽은길) 그렇다면 '좌로유입'이라는 말은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도 있다. 즉 지금 당신이 달리는 찻길이 전방에서 '왼쪽으로 유입'할 것이라는 뜻으로도 풀이가 되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이상한 한자어를 만들었을까? (2) 우차로경사: 이건 내가 서울에서 무주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본 것인데, 작년 여름의 일이라 '우차로경사'인지 '우차로서행'인지, 아니면 '우차로OO'인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 암튼 그때는 후배가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또 그 뜻을 물어보았다. 근데 후배도 모르겠단다. 후배는 박사다. 또 한국에서만 살았다. 그런 운전자가 보고 그 뜻을 냉큼 알 수 없다면, 이거 누가 문제인가? 후배가 문제인가, 아님 교통부가 문제인가? 나중에 언덕길이 나오고 터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추정해보니, 전방에 언덕배기가 있으니 속도를 내기 힘든 차량은 가장 오른쪽 차선(lane)으로 운행하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그저 '느린 차량 오른쪽으로'라고 쓰면 되지 않을까 싶다. 초딩이 보아도 아무런 혼동없이 즉각 알 수 있는 좋은 우리말을 두고, 왜 저런 얼치기 한자어를 이 21세기에도 꾸준히 만들고 있는지.. 답답하다. 가뜩이나 날씨도 더워 죽겠는데 말이다. (1)과 (2)의 경우에 나를 특히 헤깔리게 한 건 바로 '좌로' 및 '우로'라고 하는 새로운 명사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그동안 잘 쓰이던 '차선'이라는 단어에 대해 누군가 시비를 걸었고, 그 결과 정작 차들이 다니는 길(lane)을 '선'에서 '로'로, 즉 '차선'을 '차로'로 바꾼 듯싶다. 그러나 '차선'이라고 할 때 그게 반드시 페인트로 근 선만 가리키지 않고, 그 선을 경계로 하여 실제로 차들이 다니는 길도 '차선'이다. 웬만한 국어사전을 보면 이런 용례의 예문까지 나온다. (예: 지금 차선 하나를 막고 공사 중이다.) 따라서 국어사전에서 잠자고 있던 '차로'라는 단어를 억지로 깨워 부활시켜 쓸 필요가 과연 있었는지 모르겠다. 꼭 그러고 싶었다면 그저 '찻길' 정도면 충분하지 않았을까? '우차로' 대신에 '오른쪽 찻길' 내지는 '우측찻길'을 쓰면 뜻도 더 분명하고 거부감도 덜할 것 같은데…. 왜들 이렇게 졸속 한자어들을 마구 찍어내는지 모르겠다. (3) 좌로굽은길: 이건 여의도에서 강변남로로 진입하다가 본 표지다. 같은 '좌로'인데, 여기서는 '왼쪽찻길'의 뜻으로 쓰이지 않고, '왼쪽으로'의 뜻으로 쓰인 게 분명하다. 옛날에 아무 문제없이 잘 쓰던 '차선'을 <차로>로 바꾼 성과가 사실상 거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다. 사람의 생명이 달린 문제일 수도 있는 교통표지 용어가 이렇게 모호하면, 이건 정말 문제 아닐까? '왼쪽으로 굽은 길'이라고 쓰면 얼마나 좋은가? 우리말 써서 좋고, 뜻이 분명해 좋고, 학력에 관계없이 누구나 알 수 있어 좋고. (4) 제연경계벽(소방시설): 이건 아무 지하철 역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표지다. 나는 내 직업상 한자는 물론이고 아예 한문 원전을 큰 어려움 없이 읽고 독해한다. 그런데도, 만약 (소방시설)이라는 부가설명이 없었다면, 내가 <제연경계벽>의 뜻을 쉽게 알아채는데 시간이 좀 걸렸을 것이다. '제연'이라는 건 아마도 한자로는 '制煙' 내지는 '除煙'일 텐데, 우선 그런 단어가 국어사전에 없다는 게 문제다. 없는 한자어를 억지로 꿰맞추어 만들어 내느니, 차라리 '연기 막는 벽'이라고 쓰면 훨씬 더 쉽고 분명하지 않을까? 더우기 정말 화재가 발생했을 때 우리의 꼬마 아이들이 보고 그 뜻을 쉽게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한편, 같은 소방시설을 놓고도 어느 학교의 건물 내부에는 <화재시 방연셔터 내려오는 곳>이라고 표시한 걸 보았다. 같은 소방설비지만, 이 경우에는 그 뜻이 아주 명쾌하다. 지하철역의 표지보다 훨씬 낫다. <화재시>라는 단어를 아예 빼버리고 <방연셔터 내려오는 곳>이라고만 써도 다들 쉽게 알아볼 것이다. <연기 막는 벽이 내려오는 곳>이라고 쓰면 유치원생들도 이해할 수 있어 더 좋겠지만. 왜들 이다지도 한자어를 급조하여 뜻을 더 혼란케 할까? 더우기, 불특정 다수를 위한 표지판을 만들어 세울 때에는 어떤 용어를 써야 할까? 공공표지판이 한심한 공무원들의 얼치기 한자실력을 과시하는 도구로 쓰여서야 말이 되겠는가 말이다. 저런 공무원들부터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아울러, 지금 한국역사에서는 중국의 동북공정 때문에 허리가 휠 판인데, 공무원들은 스스로 떨쳐 일어나 얼치기 한자어를 계속 만들어 내며 <한자의 동북공정>을 돕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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