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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생각

에메렌츠는 오직 에메렌츠일 뿐

등록 :2021-02-19 05:00수정 :2021-02-1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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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이주혜가 다시 만난 여성

도어

서보 머그더 지음, 김보국 옮김/프시케의숲(2019)

일러스트 장선환
일러스트 장선환

폭설을 새하얀 풍경으로 즐길 수 있다면 누군가 거리의 눈을 쓸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커다란 자작나무 빗자루를 들고 건물 11곳의 제설 작업을 책임진 사람은 환갑의 전문 가사노동자 에메렌츠이다. 에메렌츠의 세계는 빗자루질을 하는 사람과 빗자루질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이루어졌고, 빗자루질을 하지 않는 사람은 전부 똑같은 권력자다.

‘나’는 전업작가 경력에 집중하기 위해 집안일을 맡아줄 가정부를 구하는데, 지인의 소개로 만난 에메렌츠는 일을 맡을지 말지, 노동 시간과 급여 등을 어떤 조건으로 할지 자신이 선택한다고 선언한다. 심지어 선택 과정에 ‘나’와 남편의 평판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처음 듣는 놀라운 조건을 일방적으로 늘어놓은 에메렌츠는 ‘맑고 제대로 된 소프라노로’ 이렇게 덧붙인다. “누구의 것이든 더러운 속옷은 빨지 않아요.”

‘1인 제국의 1인 국민이었으며 그 통치권은 로마 교황보다 더 강력’했던 에메렌츠는 지독한 반지성주의자에 냉소적인 사람으로, 히틀러도 왕조도 공산당도 의사도 교회도 똑같이 신뢰하지 않고 오직 몸으로 하는 노동의 진실함만을 굳게 믿는다. ‘노동에서 기쁨을 느꼈고, 노동을 즐겼으며, 일이 없는 시간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 집에 돌아가서는 문을 굳게 닫고 어떤 이도 집 안에 들이지 않는 사람, 그런 에메렌츠가 ‘나’의 집안일을 수락하면서 두 사람의 20년 관계가 격정적으로 펼쳐진다.

두 사람의 관계를 주도하는 쪽은 에메렌츠이다. 관계의 거리도 깊이도 전부 에메렌츠가 결정한다. ‘나’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이 괴팍하기까지 한 에메렌츠의 행동을 쫓아가느라 숨이 가쁠 정도다. 그러나 몇 차례 위기를 겪으며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두 사람의 관계를 지켜보는 독자들은 뜻밖의 지점에서 애정의 탄생을 목격한다. 에메렌츠는 ‘나’와의 관계가 비틀어질 때마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한 조각씩 떼어내 들려준다. 눈앞에서 어머니와 어린 쌍둥이 동생이 주검으로 변해버리는 끔찍한 고통을 경험한 어린 에메렌츠가, 막냇동생처럼 돌봤던 암소가 도살당하는 장면을 두 눈 뜨고 목격해야 했던 학대받는 에메렌츠가, 약혼자가 성난 군중의 손에 갈기갈기 찢겨 죽는 모습을 지켜봤던 젊은 에메렌츠가 한 조각씩 증언하고 나면 ‘나’는 비로소 에메렌츠의 단편들을 한 조각씩 해석하고 이해한다. 에메렌츠는 가사노동자이자 피고용인이면서 역사의 증언자이고 ‘나’는 고용인이자 돌봄노동의 수혜자이면서 역사의 기록자다. 우정 혹은 애정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의 관계가 20년 넘게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렇듯 여러 겹으로 직조된 탄탄한 관계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러 파국을 맞는 두 사람의 관계를 목격하는 일은 실로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서보 머그더는 <도어>를 발표하면서 헝가리의 국민 작가 반열에 올랐고, 이 작품은 2015년 뉴욕타임스 ‘올해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면서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다. 소설의 성취 가운데 하나는 질곡과 혼돈 자체였던 헝가리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그 어떤 문학작품 속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독특한 여성 인물을 그려낸 점이다. 그러므로 에메렌츠를 ‘여자 누구누구’처럼 다른 남성 캐릭터에 빗대어 소개할 수는 없다. 에메렌츠는 오직 에메렌츠이고, ‘용감했고 매혹적이며 악할 정도로 영리했고,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 정도로 뻔뻔’했던, 빗자루를 들었던 단 한 사람이므로.

이주혜 소설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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