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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생각

노예는 스스로 노예다움을 포기할 수 있는가

등록 :2020-03-27 04:59수정 :2020-03-27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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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이현우의 언어의 경계에서
자발적 복종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지음, 손주경 옮김/도서출판b(2020)

16세기 프랑스의 젊은 인문주의자 라 보에시의 <자발적 복종>이 한차례 더 번역되었다. ‘젊은’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은 그가 33살에 요절했기 때문이다. 29편의 시를 남긴 시인이기도 했지만 오늘날 라 보에시라는 이름은 그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쓰고 사후에야 간행된 <자발적 복종에 대한 논설>을 통해 기억된다. ‘격문’으로도 일컬어지는 짧은 책자가 여러 차례 번역된 것은 이 저작의 특이한 현재성 덕분이다.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수용되고 해석된 <자발적 복종>의 운명이 한국어판에도 반영되었다고 할까.

사정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라 보에시는 당대의 인문주의자로 세 살 아래였던 몽테뉴와 절친했고(몽테뉴는 그를 ‘영혼의 형제’라고 불렀다),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고들은 몽테뉴에게는 넘겨진다. 몽테뉴는 <자발적 복종>을 자신의 <에세>에 포함하여 출간하겠다고 공언하지만 끝내 생전에는 출간하지 않는다. ‘자발적 복종’의 내용이 외부에 미리 알려지면서 군주제의 폭정에 맞서 선동을 촉구하는 불온한 책자로 간주돼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실상 몽테뉴는 군주제에 반대하지 않았고 <자발적 복종>도 군주제보다는 폭정 비판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군주제에 대한 라 보에시의 태도는 모호하다.

하지만 그와 무관하게 <자발적 복종>은 민중봉기를 촉구하는 작품으로 수용되었고 이러한 위상은 18세기 프랑스혁명기에 더 강화되었다. 독재에 대한 증오를 담은 저작으로 읽히면서 라 보에시는 급기야 급진적 혁명주의자로까지 치켜세워진다. 이러한 이미지는 20세기에도 이어져서 <자발적 복종>은 프랑스 공산당의 ‘민중의 총서’에 실리고 젊은 인문주의자는 노동해방의 주창자이자 민중의 구원자로까지 격상되었다. <자발적 복종>의 앞선 번역본들이 우리에게 소개한 라 보에시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사실 <자발적 복종>의 몇몇 대목은 그런 이미지에 부합한다. “한 사람이 수십만의 사람들을 억압하고 그들에게서 자유를 약탈하는 일은 도처에서 그리고 매일같이 벌어진다”는 진단에서 “나라 전체가 그에 대한 복종에 동의하지만 않는다면 그는 스스로 무너지게 된다”는 처방까지 고려하면 그렇다. 하지만 문제는 너무도 간단해 보이는 처방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폭군에 맞서 그들을 떠받드는 것을 멈추기만 하면 민중은 자유를 쟁취할 수 있지만 “그들은 자유를 물리치고 굴레를 찬다.” 바로 이러한 현상을 라 보에시는 ‘자발적 복종’이라고 부른다. 자발적 복종 체제에서 스스로를 학대하는 자 역시 민중이다. 역설적이게도 민중은 폭정의 협력자가 되는 것이다.

적어도 라 보에시는 민중이 자발적 복종의 굴레를 걷어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낙관하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첫째,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로 자랐기 때문이다. 복종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폭군의 통치를 받으며 비겁하고 유약해지기 때문이다. 폭군은 민중을 속이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어떤 미끼들이 있었던가. “연극, 놀이, 익살극, 공연, 검투경기, 신기한 동물들, 그림들, 그리고 그러그러한 다른 마약들”이 복종의 미끼였고 자유의 대가였다. 라 보에시의 이러한 분석은 근대 이데올로기론을 선취하는 것이면서 <자발적 복종>의 현재성을 새로 음미하게 해준다. <자발적 복종>은 해방의 가능성을 선동하기보다는 그 어려움을 숙고하게 해준다는 데서 새롭게 의의를 찾아야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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