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로그인
컨텐츠

등록 : 2010.04.08 19:46 수정 : 2010.04.08 19:46

소설가 박범신(64)

산문 ‘산다는…’ 소설 ‘은교’ 함께 낸 박범신





“산다는 것은 깊고 푸른 갈망
질투는 문학을 발화하는 뇌관”

4월의 초입, 모처럼 봄볕 따스하던 날에 소설가 박범신(64)씨가 장편소설과 산문집을 한꺼번에 상재했다.

나는 2009년 이른 봄에 죽었다. 소설 <은교>(문학동네)의 첫 문장이다.

봄꽃들 때문에, 미치겠다. 산문집 <산다는 것은>(한겨레출판)의 첫 글이다. 봄이 열일곱 젊음이라면, 두 책을 꿰는 낱말은 욕망 혹은 갈망. 작가의 역설을 따라가면, 봄은 생의 분출이요 죽음일 수도 있다.

작가가 5년 만에 내놓은 산문집 <산다는 것은>에는 ‘존재의 안부를 묻는 일곱 가지 방법’이라는 부제가 달렸다. 그 일곱 가지는 눈·귀·코·혀·몸의 다섯 감각기관이 느끼는 희로애락애오욕. 책은 60여편의 짧은 글들을 일곱 가지 욕망(情)의 무늬에 따라 분류하여 묶어낸 것이다. <산다는 것은>의 글들은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작가는 말한다. “산다는 것은 오랜 병을 앓는 것과 다름없다. 오랜 병은 오랜 꿈이다. 그 꿈은, 깊고 푸른 갈망은, 상복과 같은 망토를 둘러쓰고 우리들의 등 뒤에 우두커니 서 있다. 그러니 뒤돌아보라. 당신이 혹시 온갖 핑계로 버리고 왔을지도 모르는 또다른 당신이 거기 있지 않은가.”(‘작가의 말’에서)

7일 기자들과 만난 박씨는 변덕스런 봄날에 내는 두 권의 책을 이렇게 설명했다. “소설을 쓰면서 나를 평생 고통스럽게 한 짐이 무엇이었던가. 알고 보면 단순한 거죠. 오욕칠정이었어요. <산다는 것은>은 오욕칠정에 따른 플롯을 갖고 있어요. 소설 <은교>에도 내가 가졌던 다양한, 숨길 수 없는 욕망이 드러나 있어요. <은교>는 연애소설입니다. 결국 내 오욕칠정을 다양한 층위에서 다룬 소설입니다.”


〈산다는 것은〉, 〈은교〉.
‘나’의 부고로 시작되는 소설 <은교>는 ‘불같은 청년’임을 자임하는 육십줄에 접어든 작가가 쓴 노년의 욕망에 관한 일종의 존재론적 보고서라 할 만하다. <고산자>를 탈고한 지 불과 열 달 만에 내놓는 장편소설이다. 줄곧 원고지를 고집하던 박씨가 처음으로 컴퓨터 자판에 ‘독수리타법’으로 올 1월 집필을 시작한 지 한 달 반 만에 탈고됐다. <은교>는 전자책으로 동시 출간되어 교보문고에서 판매된다.


<은교>는 희대의 위대한 시인과 그 제자, 그리고 열일곱 살 소녀의 삼각 연애구도를 띠고 있지만, 밑바탕에는 노년 판타지를 깔고 있다. 소설을 구축하는 두 화자는 칠순을 앞둔 늙은 시인 이적요와 그의 반평생을 보필한 제자, 재능 없는 열정에 사로잡힌 30대 후반의 소설가 서지우다. 시인 이적요는 젊을 적엔 반독재투쟁으로 10년을 감옥에서 살았으며 평생 잡문 한 줄 쓰지 않고 시만을 써왔다. 무엇보다도 대중과 평단, 시대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시인이다. 스승에게 노상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는 서지우는 장르소설로 출세한 베스트셀러 작가다.

소설은 ‘나’의 죽음, 곧 시인 이적요의 죽음과 함께 이 위대한 시인이 자신의 제자인 서지우를 죽였다는 충격적인 고백에서 시작된다. 두 사람이 죽기 전에 각기 남긴 노트를 당혹감 속에 읽는 변호사 ‘큐’가 은교와 함께 두 죽음의 진실을 조각조각 맞춰나가는 과정이 소설의 얼개를 이룬다.

늙은 시인과 그 제자, 서로 삶이 엉겨붙어 ‘너와 나’의 경계가 모호한 두 남자는 모두 열일곱 은교를 욕망한다. 두 남자의 욕망이 현실적이고 생생한 데 비해 정작 은교는 아련히 저기 서 있는데, 그렇다면 은교는 누구인가. “은교는 닿을 수도 없고 멀리 있지도 않고, 아름다운 젊은 처녀이면서, 동시에 나한테는 새로 쓰고 싶은 수많은 소설들입니다. 은교는 내가 이루지 못한 모든 꿈의 다른 이름 같은 것입니다.”

‘나’의 욕망에 가 닿을수록 ‘너’에 대한 질투는 타오르기 마련이다. 이적요의 서지우에 대한 질투, 서지우의 이적요에 대한 질투는 두 사람의 글이 일종의 뇌관처럼 얽혀 있다는 점에서 노시인 이적요의 자기 혐오가 된다.

“노인은 결국 자기부정으로 죽어요. 자기부정이 없으면 문학은 죽어요. 질투심 없이는 예술가가 될 수 없죠. 질투심은 문학을 발화시키는 뇌관 같은 것이에요. 내 별명이 ‘우변덕 좌질투’예요. 질투심은 강력한 힘이에요. 질투는 나를 파괴할 수 있는 것. 사랑 자체가 그런 것이에요.”

글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