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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6.12 20:54 수정 : 2009.06.12 20:54

〈기싱의 고백-헨리 라이크로프트 수상록〉





내 인생의 책 /

〈기싱의 고백-헨리 라이크로프트 수상록〉
조지 기싱 지음·이상옥 옮김/효형출판·1만2000원

9년 전 겨울 나는 사냥꾼에 쫓기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어린 짐승처럼 막막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나는 그때 특집 드라마 연출을 막 끝낸 직후였는데, 몸과 마음이 지쳐 혼곤해야 하는 여느 때와는 달리, 일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칼날처럼 벼려진 내 마음은 무디어질 줄을 몰랐다. 밤이 낮보다 더 환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나는 외로웠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위안을 주지 못했고, 나 또한 어느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았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연출한다는 것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 텔레비전 드라마를 연출한다는 것이 어느 누구 말처럼 거대한 벽화를 그리는 일도 아니고 예쁜 꽃꽂이를 하는 일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일인가?

“세상 사람들이 내 작품을 부당하게 대접한 적은 없었다. 다행히도 나는 독자들에게 부당한 대접을 받았다며 세상을 원망하는 일만은 하지 않을 만큼 현명해졌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설령 불멸의 작품을 썼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의 냉대에 어찌 분노할 수 있을 것인가? 누가 그 작가에게 책을 내라고 권한 적이라도 있단 말인가? 누가 그에게 글을 쓰면 읽어주겠노라고 약속이라도 한 적이 있는가? 누가 그런 약속을 저버린 적이라도 있는가? 가령 어떤 제화공이 훌륭한 구두 한 켤레를 만들어 주었는데 내가 짓궂게 심통을 부리며 구두를 내던진다면, 제화공은 이 부당한 대접에 대해 불평할 만도 하다.”

나는 조지 기싱이 쓴 <기싱의 고백-헨리 라이크로프트 수상록>의 이 구절을 읽고,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나에게 텔레비전 드라마를 연출하라고 권유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불어 어느 누구도 내가 만든 드라마를 보겠노라고 약속한 적도, 그리고 그 약속을 저버린 적도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나아가 내가 구두를 만드는 제화공이 지닌 솜씨만큼 훌륭한 연출 솜씨를 전혀 지니지 못했다는 사실도 함께.

김윤철 연출가
“남의 도움을 찾아다닌다든가 작가로서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남의 호의를 청탁하는 따위는 내 본성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내가 한 걸음이나마 나아갈 수 있었다면 오직 나 자신의 힘으로 이룬 성과였다. 나는 남의 호의를 무시했던 것처럼 남의 충고 또한 멸시했다. 나는 내 머리와 마음에서 우러난 충고 이외에는 다른 어느 누구의 충고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나는 유학을 준비했다. 나는 시나리오도, 연기도, 카메라도 전혀 공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배우도, 작가도, 촬영감독도 제대로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시청자도, 관객도 전혀 사귀지 못했다는 사실도 새삼 깨달았다. 나는 내 마음속에 얼마나 오만과 독선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자리 잡고 있는지 깨달았다. 나는 유학을 떠났다. 그러곤 3년 뒤 돌아왔다. 유학을 마친 후 여전히 나는 내가 하는 일의 본분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내가 만든 드라마를 사람들이 좋아해도 그리 기뻐하지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아도 그리 슬퍼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때 내가 담담하게 최선을 다했는가를 생각한다. 그저 내 마음속에 허영이나 사치는 없었는가를 생각한다. 왜냐하면 텔레비전 드라마를 만드는 일이 값싸고 튼튼한 의자를 만드는 일에 진배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김윤철 TV드라마 연출가·<내 이름은 김삼순>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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