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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1.18 20:07 수정 : 2008.01.18 20:13

〈에도의 몸을 열다〉

〈에도의 몸을 열다〉
타이먼 스크리치 지음·박경희 옮김. 그린비·2만원

일 근대의 밑불 된 네덜란드어 서양의학
사무라이 몰락 시기 ‘해부학’ 열풍 일으켜
리얼리즘 유행 등 일본인 세계관 변혁 낳아

19세기 후반 근대화의 불길이 일본 열도를 빠르게 뒤덮는 데 밑불 노릇을 한 것이 ‘난학’이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개항과 유신으로 서구화에 시동을 걸기 한참 전에, 개화에 관한 한 일본은 앞으로 대문을 걸어잠그고 뒤로 쪽문을 열어둔 형국이었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 내내 쪽문이 열려 있었고, 그 작은 문으로 네덜란드인들이 드나들었다. 네덜란드인은 물자만 들여온 것이 아니라 학문도 들여왔는데, 그것이 바로 난학, 다시 말해 네덜란드어로 유통된 서양 근대 학문이었다. 난학은 특히 18세기에 들어와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지원에 힘입어 빠르게 발전했다. 그때 발전을 선도한 것이 서양 의학이었다. 난학은 다른 어떤 것 이전에 먼저 의학이었다.

영국의 일본문화사학자 타이먼 스크리치(런던대 교수)가 쓴 〈에도의 몸을 열다〉는 바로 그 시기에 불기 시작한 일본 내 서양 의학 열풍과 서양 의학이 일으킨 문화적 변동을 포착해 서술한 책이다. 지은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서양 의학 중에서도 해부학이다. 신체를 절개해 그 안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해부학이라는 새로운 의학 분야는 그 시대의 일본인에게는 충격이었고 공포였고 경이였다. 외과용 메스와 가위로 대표되는 ‘칼날’은 두려움과 호기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신의학의 아이콘이었다. 칼날 그 자체가 일본인에게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애초에 칼로 세운 체제였다. 지배계급인 사무라이에게 칼은 계급의 상징이자 권력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이 상징은 18세기에 이르면 말 그대로 상징으로 떨어졌다. 사무라이는 외출할 때면 언제나 칼을 찼지만, 칼이 칼집에서 나와 사람을 베는 일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정장의 넥타이 같은 구실만 하게 된 칼은 칼집에서 붉게 녹슬었다. 이렇게 사람의 몸을 베고 가르는 칼의 기능이 사라진 자리에 바로 외과용 메스가 등장했다고 이 책은 말한다.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수박도>(1839). 잘린 수박의 “피를 흘리는 듯한” 붉은 면이 천으로 덮여 있다. 지은이는 이 그림이 내부를 들여다보는 데 대한 당시 일본인들의 여전한 거부감을 보여준다고 해석한다.
동아시아 전통 의학, 곧 한의학이 다 그렇듯이 일본의 전통 의학에서도 몸에 칼을 대는 절개 시술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한방이라 부르던 동아시아 의학은 신체 절개 따위는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반면에 서양에서 인체 절개와 해부는 의학의 본령 가운데 하나였다. 지은이는 두 의학의 차이가 ‘세계관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말한다. 서양에서 인체는 대우주를 축소한 소우주로 여겨졌고, 특히 기독교의 영향으로 신의 형상을 닮은 것이 인체라고 생각됐다. 인체에 대한 해부학적 탐구는 종교적 의미를 띠고 있었다. 그런 관념이 외과학과 해부학의 발달을 자극했다.

18세기에 이 서양 의술로 무장한 네덜란드 의사들이 일본에 들어왔고, 18세기 중엽이면 이들에게서 의술을 전수받은 일본 외과의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외과학을 더욱 널리 퍼뜨린 것은 해부학의 유행이었다. 산 사람을 대상으로 한 외과 시술은 마취제가 없던 시절에는 큰 고통을 동반하는 일이었으므로, 흔한 일이 아니었다. 이와 달리 죽은 신체를 활용하는 해부는 상대적으로 시행하기가 쉬웠다. 해부학은 관련 책자의 번역·출간으로 더욱 활성화했다. 1759년 최초의 해부도록인 〈장지〉가 발간됐고, 1774년엔 해부학서의 기념비라 할 〈해체신서〉가 세상에 나왔다.



외과의 미나가키 야스카즈가 그린 <해부존진도>(1819).
지은이는 서양 의학의 발흥으로 전통 의학과 서양 의학 사이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고 말한다. 전통 한방이 보기에 신체를 가르고 뜯어내는 것은 ‘기의 통일체로서의 몸’을 외면하는 짓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한방의였던 사노 야스사다는 〈장지〉 출간 이듬해 〈비장지〉를 펴내 〈장지〉를 격렬하게 공격했다. “무릇 장(내장)이 장인 것은 형상을 지녀서가 아니라 기를 간직하고 있어서다. 신체가 사라져 기가 흩어지면 장은 그저 허기일 뿐이다.” 그러나 어찌됐든 한 번 바람을 탄 외과학과 해부학은 더욱 멀리 번졌다.

지은이는 이쯤에서 해부학으로 대변되는 난학의 융성이 일으킨 문화적 변동에 주목한다. 요컨대 사람들의 세계 감각이 바뀌었다. 그런 변동의 한 양상이 회화에 침투한 리얼리즘 정신이다. 관념적 산수가 아닌 실제의 경치를 그리는 그림이 등장한 것이다. 화가들은 이제 풍경을 제 발로 찾아가 눈으로 보고 그리기 시작했다. 여행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여행자는 풍경의 해부학자가 된다. 이름이 알려진 장소에도 갈 뿐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발견에 이끌려 옆길로 새기도 한다.” 신체를 샅샅이 까발려 모든 것을 알고자 한 태도가 그대로 여행에서도 관철됐다는 것이다. 해부학은 지리학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해부학적 세계관이 지리에 투영된 것이다. 예컨대 수도를 나라의 심장이라고 하는 비유가 나타났는데, 당시로선 신선하기 이를 데 없는 발상이었다. 바깥에서 들어온 학문이 봉건시대 일본인들의 삶의 감각을 바꾸어 놓기 시작한 것이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그림 그린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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